부산에서 평화협정 실현 한마당을 참관하다

[특집 _ 7.26 평화협정 실현 한마당]


△ 7월 26일, 원불교 서울회관에서 2009년 주한미군 내보내는 한반도 평화협정 실현 한마당 - "전쟁없는 평화세상, 미군없는 통일세상"이 열렸습니다.

 서울 평화협정 실현 한마당에 다녀왔다. 한편의 스펙터클한 영화를 본 느낌이다. 연출자와 출연자들이 모두 완성도 높은 작품을 추구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감상이 조금 강하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말할 수 있다. “평통사는 평화와 통일이라는 수사뿐 아니라 실제로도 젊음을 지향하고 사고가 유연한 단체이다”라고.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깊이 연구하고 실천적 대안을 고민한다. 평통사는 1994년생이며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한반도의 상황을 꿰뚫고 평화와 통일의 대안을 구체적으로 내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평통사를 평화 통일 운동의 ‘젊은 상상력’으로 호명하는 것은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발상의 전환의 귀재들’, ‘좌우파를 아우르는 상상력’ 이라는 다양한 호칭과 수사들이 계속 뒤따랐으면 좋겠다. 내가 평통사의 일원이 된 것을 스스로 자랑하게 되었으니 남들이 나보고 선술집에서 소주 몇 잔 들어가서 취기어린 상태의 주절거림이라고 해도 좋다.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평통사와의 진정한 만남 이전에 그 활동에 대해 수사적 차원에서의 평화 단체 정도로 조금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평통사의 활동에 떠밀리듯이 참여하면서 자신의 의지가 동반되지 않았기에 또 그렇게 물결치는 대로 빠져나오면 되겠지 생각하였다. 명분은 만들기 나름 아닌가? 하는 것이라곤 인원 동원 밖에 없지만 서울 평협 대회를 준비하면서, 내심 알고 싶었던 것은 박석분, 유한경 그리고 오혜란 등이 가지고 있는 듯한 ‘젊음’의 실체였다. 그들을 알게 된 뒤 난 평통사를 의미 있게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 누가 누구인지 번지수 찾기도 쉽지 않다. 막가고 싶지는 않지만 인상파 화가가 된 느낌으로 막 말하는 것이다. 평통사에는 김종일, 유영재, 박석진, 고영대도 있고 강정구도 있지만 단순히 강렬함과 우직함과는 다른 젊음의 가능성을 그 여성 동지들에게서 느꼈다. 단순히 발랄하다 경쾌하다가 아니다. 정확히 잡히지는 않는다. 활동 방법의 새로움을 젊음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형상화하여 대중의 에너지를 응집시켜 폭발케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적 기획 아닌가. 그 기획은 사람이 한다. 그런 기획에 대한 실낱보다 조금 더 큰 기대와 실천에 대한 공감이 그들에게 젊음을 느끼게 한다. 아니 그런 영웅에 대한 희망과 변혁 운동에 대한 간절한 바람때문에 나는 평통사가 젊어야 한다는 당위적 요청을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 2009년 주한미군 내보내는 한반도 평화협정 실현 한마당 행사에서 공연하고 있는 "바닥소리"입니다.

 오프닝 세러머니의 사회자로서 원불교 강당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없어 점심을 걸러 온 터라 부산 평통사 이종명 동지가 준 떡은 내게 중요한 보급품이었다. 옆에 쌍용차 해고자 윤대산 동지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인사를 멋적게 하고 쌍차 얘기를 들었다. 눈동자가 깊었다. 무건리 주민과 악수를 했다. 힘 조절을 잘못해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뼈들이 강하게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오른쪽 좌석에 본행사 사회를 볼 이수정 동지는 서울시 의원인데 야무지게 보였다. 어떻게 사회를 보면 좋겠느냐고 조언을 구하자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청중과 호흡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콘티를 보니 흠잡을 데 없이 매뉴얼과 멘트까지 잘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하는 사람들의 땀과 마음들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윤대산 동지가 말이 끝날 때쯤 울먹이고 있었다. 아까 앉아서 들었던 말도 있고 해서 그런지 나도 눈물이 났다. 사회자가 감정의 동요를 보이면 안 되는데 아무래도 난 감상주의인가보다. 옛 생각도 났다. 먼저 간 노동형제들과 지금도 사람사는 세상을 절규하는 풀처럼 쓰러졌다 일어나는 작은 이들이 생각났다. 빛고을이 탱크와 군화발로 진압되던 때가 떠올랐다. 그날의 피울음을 지금 윤대산 동지가 울고 있는 것이다. 7000만 겨레가 함께 한다고 하면서 연대 의사를 밝혔지만 우울했다.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인가? 김지하 말마따나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야 하는데 누가 죽음을 부르고 노동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가?
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이 초등학생 딸이 보는 가운데 수갑 차고 끌려 가기 전 난 똑똑히 들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압살하는 이 땅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자본과 권력이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려는 이 땅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평생에 할 욕을 단 하루 만에 다 쏟아 부어 욕의 달인이 되신 최상재님은 이제 곧 사람사는 세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와 평화의 따스한 바람과, 남북이 하나되어 빛나는 별과, 모든 쇠붙이들이 떠나버린 하늘과, 그 해방의 하늘을 나는 새와 시를 노래하는 그 날을 기다린다. 만약에 그가 오는 날, 아직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없다면 우리는 온 세상이 아직 사상의 감옥이란 알리기 위해 투쟁의 찬가를 불러야 하리라.
용산참사 이상림 열사의 맏아들 이성연님의 상복 완장을 보고, 아직 우리의 민중상은 끝나지 않았다는 지독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고이 가소서 열사들이여! 우리가 그 한과 애틋한 얘기들을 다 풀어드리겠습니다” 난 속으로 읊조리고 있었다.
문예창작단 들꽃이 ‘우리는 더욱 강하게’를 몸짓으로 노래했다. 울고 나서 그런지 노래의 메시지가 나를 공중 부양시키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았다. “촛불집회에 계속 나갔는데, 그 정치적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데 군가풍의 민중가요가 너무 듣기 힘든거에요.” 거리에서 젊은이들과 소위 시민 대중들이 하는 말이다. 민중가요란 이름으로 투쟁을 선동하는 것이 너무 상투적이고 구별 짓기 할 때 그 노래는 이미 우리의 외연을 좁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강하게’는 들꽃이 잘 소화했고 투쟁보고 현장에 적절한 비트의 멜로디와 메시지였다. 외려 공연의 질의 문제보다는 정말로 우리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 왜냐면 새 세상은 그리 쉽게 우리에게 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이소정 어린이, 시인 송경동, 노찾사, 바닥소리, 향린교회 어울림, 어디 흠잡을 데 하나 없었다. 근데 마지막 문규현 신부님의 연설에서 영상화면의 질이 확보되지 못해 정전 협정의 분단선을 넘어선지 어언 20년, 평화협정의 새 역사를 여는 상징적 연설이 빛을 바랬다. 피날레를 제대로 장식했다면 평화 통일 드라마의 한편의 작품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훨씬 컸을텐데, 아쉽다.


△ 2009년 추진위원 1,782명 부문별 통계

 나는 처음 참석이라 당연히 감동이 클 수밖에는 없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만 봐도 1%의 실수는 99%의 실수에 같은 것으로 사고하고 준비해야 한다. 결국 100%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관객이 환불 소동을 피우지 않아도 관객을 100%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콘티도 변경된 것을 보낸 줄 알았는데 현장에서 급히 수정하여 받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평협 대회 오길 잘했다. 많이 감동 먹었으니까.
그러나 감동먹었다는 말이 운동 미학적인 갱신에 대한 정치적 기획이 완성도를 가진다는 말은 아니다. 극장의 공연만의 문제가 아니라 각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에서도 마중이 정확하게 되질 않아 애를 먹었다. 자그마한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정치적 기획을 바탕에 깐 미학적 완성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그것과 똑같이 가려는 경향이다. 그것은 지면과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니 다음 기회에 얘기했으면 한다.

 내려오는 길은 힘들었다. 제일호 회원은 무릎이 쪼매 찌릿하기에 봉고의 달인인 친구 원장에게 물어보니 봉고 오래 타면 다 그렇다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힘든 몸을 이끌고도 함께하신 손재현 김지영 두 분 동지와 운전을 하신 대표님과 총무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아직 소년가장이라 주장하는(그는 아직 장가를 못 갔으니 소년이다) 제일호 회원은 젊은 기운이 넘쳐남에도 수업시간에 조금 힘들었단다.
이거 모두 우리의 업보이다. 부산 평통사의 회원이 수백명 수천명이 되어 참석 인원만 수백명이 되었다면 아니, 40명만 넘어도 버스를 대절하였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런 고통은 조금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제발 발 조금 넉넉하게 뻗을 수 있는 버스 한번 탑시다. 저의 얄팍한 바램입니다.” 제일호 동지의 바람을 한번 새겨듣고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아야겠다. 우리 모두 편안한 이동과 즐거운 평협 대회를 위해서라도 통일과 평화의 전도사가 되어야겠다.
나는 김지영 선생님, 손재현 선생님, 이의직 선생님과 같은 자리를 배석하여 대화를 많이 했다. 여행의 불편함은 대화의 기쁨이 있어 능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김지영 선생님은 주한 미군의 주둔을 전제로 한 어떠한 평화 통일 논의도 허구라고 했다. 100년이 지난 뒤 통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주한미군 철수를 먼저 이뤄내야 한다고 했다. 손재현 선생께서는 부산 경남권의 파르티잔 운동부터 해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민족주의자들의 얘기를 풀어 놓으셨다. 다 듣기엔 시간이 짧았다.
제일호 회원은 평통사의 출범 때부터 자신의 좌파적 고민을 피력하곤 했다. 통일에 대한 추상적인 당위성은 모든 계급을 안고 넘어서 한다지만 분단 상황 속에서 그것이 2차적이며 배가된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의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삶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통일은 이벤트도 아니고 이상적인 그림이 아니라 민중의 고달픈 삶의 한 요소를 제거해주는 해방의 단초일 뿐이라고 했다. 곱씹을 내용들이 참 많았다.
서울과 부산의 중간쯤을 넘어가고 있었나 싶었는데 비가 억수같이 왔다. 비바람은 치는데 승합차는 달리고 거기다가 번개도 치니까 고난의 깊은 터널을 뚫고 남북누리가 다 하나되는 그 해방의 그 곳을 향해 달리는 듯 편안했다. 특히 스스로를 대형 버스 운전기사로 말년에 이웃에게 봉사하고 싶다는 꿈을 밝히며 달리는 우리의 전봉준 장군(김홍술 대표)이 있기에 스릴감도 있었다.
이번 평통사 평화협정 대회는 내게 참 즐겁고 장엄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시간이었다. 준비하신 평통사 실무자들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감사를 드린다.


△ 2009년 주한미군 내보내는 한반도 평화협정 실현 한마당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를 풍선에 불어넣어 평화협정 망치 4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협정 망치로 각 지역을 대표하는 분들이 비핵개방 3000, 한미동맹, 대북침략전쟁연습, PSI, 주한미군 등 분단 장벽을 부숴 넘어뜨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