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13호/나의삶,나의투쟁(3)] 9월 총파업과 전평노조

- 열혈혁명가 이수갑의 삶과 투쟁의 기록 -

10월 인민항쟁으로 확산된 9월 총파업

1946년 9월 총파업에 대한 미 제국주의자들과 대한노총 테러단의 폭력학살에 대항하는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차라리 경찰에 체포되면 살아남을 희망이 있지만, 대한노총 테러단에 연행되면 죽음을 각오하라”는 말이 유행하였을 정도로 대한노총 테러단은 악명을 떨쳤다. 그럼에도 전평이 앞장서서 투쟁을 한 당시는 ‘조선민족의 주권은 조선인민에게 있다’는 사명감이 있었으므로 총파업은 파업에 동원된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민중전체의 지지를 받았다.

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에 대한 경찰과 대한노총의 학살만행에 저항하여 1946년 10월 2일에는 경상북도 대구지방에서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발생하였다. 대구민중들이 대구경찰서를 습격하였고, 민중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반동분자들을 직접 숙청하는 항쟁으로 확대되었다. 미군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서울에서 어용노조 대한노총 테러단을 대량 대구현지에 파견하여, 전평 노동조합원을 비롯한 소위 좌익계라는 사람들의 가가호호를 습격하고 부녀자들을 비롯한 노소를 불문하고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닥치는 대로 방화,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한 희생은 미국의 보도에서마저, 200여명이 경찰과 테러단에 의해 살해되고, 행방불명된 자가 3,600여 명, 부상자 26,000여 명, 검거투옥당한 사람만도 15,000여 명이었다. 10월 인민 항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11월에는 이 항쟁으로 투옥된 수많은 애국자들이 사형 등 중형으로 처벌당하였다.

대구 10월 인민항쟁은 연쇄 반응적으로 남조선 전역에 파급되었고, 이 과정에서 검거, 투옥, 학살당한 사람과 부상자, 그리고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 등을 합하면 십수만 명의 희생을 가져왔다. 인민항쟁 당시 민중들은 투쟁을 하면서 “원수와 싸워서 죽어간다.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라. 나의 시체에 뿔근 기를 덮어다오”라는 인민항쟁가를 부르며 시내 전역을 누비며 항쟁하였다.


계급의식이 확고했던 전평노조

9월 총파업 당시 전평 노조원들은 계급의식이 확고하였다. 우리들 노동자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민족 전체를 위하고 노동자 계급이 선봉적 투쟁을 함으로서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진정한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고하였다.

당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선열들이 일제식민지 통치에 저항하였던 민족해방 투쟁과 노동자계급 투쟁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노동자계급이 선봉적 투쟁으로, 조선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인 전통이 이어져왔다. 일제강점기에 노동자 계급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조국을 독립국가로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데에 앞장선 것은 당시 주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민중들은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8.15 이후, 일제가 물러가고 주권을 조선인민에게 이양하라는 요구가 거세었다. 그럼에도 미군정이 들어와 ‘미군정만이 조선을 대표하는 정부다. 여타의 모든 정치세력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전 인민의 뜻을 짓밟고 주권을 침탈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미 제국주의와 이들 편에서 같은 민족을 학살한 반민족, 반민중 세력 대한노총에 맞서 싸워야 했다.

전평노조는 남로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남로당은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지식인 등 대중단체의 전위정당으로서 민중을 대표하는 목소리와 희망과 염원을 반영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노선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결정된 당의 노선은 철저하게 전평을 비롯한 대중단체를 통해서 실천했다. 인민이 주권을 되찾아야한다는 남로당의 노선을 실천하며 전평 노조원들은 제국주의와 어용노조에 대해 적극적이고 단호하게 투쟁을 하였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의식을 강화하고 조합주의를 극복한 노동운동을 강화하는 투쟁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 활동가들에게 이어져야 한다.


전평의 산별노조

전평노조의 조직 형태의 주요한 특징은 평의회와 산별노조였다. 전평은 1945년 11월 5일 대회를 거쳐 각 지역의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17개 산별노조로 출발하였다.

전평노조는 모든 노동자 계급이 대등한 입장에서 참여할 수 있는 평의회로서 구성되었기에, 조합원들의 의사를 집약하여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조직체계는 노동조합이 소수 지도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막고, 노동조합의 상층부가 선두에서 노동자계급 전체의 의사를 집약한 투쟁방향을 좇아 실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결국 노동조합의 상층부가 노동자 계급의 의사를 반영하여 선도적으로 투쟁을 이끌어나가는 본연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단체의 기본원칙인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한다.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직접 비밀 무기명 투표를 통한 지도부와 대의원 선출은 이러한 측면에서 반드시 시급하게 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평노조는 동일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전체를 산별체제로 조직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모은 연대투쟁과 동맹파업을 벌이는 것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투쟁전선을 강화할 수 있었다. 9월 총파업 때에도 운수산별에 속해 있던 철도와 해상 노동자들이 같이 가장 먼저 파업에 돌입하였고, 곧이어 파업이 불길처럼 퍼져나가 각 산별노조가 동맹 파업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현재 민주노총에서도 산별노조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 자본과 권력이 비정규직을 대량으로 양산하고 노동3권을 박탈하는 로드맵을 추진하려는 지금, 이에 대항하려면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투쟁전선 강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또 2007년부터 복수노조가 허용될 경우 사용자의 사주에 의해 노동조합이 탄생할 수도 있기에, 노동운동의 전선이 교란, 분열될 위험이 예상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산별노조 구성이 필요하다.

현장노동자들의 의사를 반영하고, 조합원들이 중심이 되는 산별조직이 결성되지 못하면 상층부가 변질 개량화할 위험성이 있으며, 이것은 전체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산별조직 구성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무한으로 착취하는 것이 본능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을 탄압한다. 그렇기에 노사정합의나 사회적 교섭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확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확인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조직형태만 산별 모양새를 취하고서 투쟁은 하지 않는 채, 사용자가 상층부를 조정하는 도구가 되는 교섭편의에 역점을 두는 산별이 되어, 결국 상층부가 개량화, 관료화되는 결과를 낳는 위장된 산별노조가 건설되어서는 안 되기에, 조합원의 직접선거에 의한 조직구성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2006. 7. 12.

철도노동조합 명예조합원 이 수 갑



→ 열혈혁명가 이수갑의 삶과 투쟁의 기록 [나의 삶, 나의 투쟁]
→ [나의 삶, 나의 투쟁 (1)]
→ [나의 삶, 나의 투쟁 (2)] 테러집단 대한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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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갑 , 전평 , 9월총파업 , 대한노총 , 10월인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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