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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반자본주의없는 생태주의는 공허하다

- 서평 [개발주의를 비판한다](홍성태, 당대) -

지금처럼 화석원료에 의존할 경우 금세기 말 지구 평균기온이 4도 올라가고, 해수면은 60cm 상승할 것이다. 북극의 빙하는 전부 녹아 없어지고, 뉴욕 맨하탄과 상하이 등 저지대 도시는 침수한다. 그리고 홍수, 폭염 등 기상이변과 전염병이 빈번해진다. 아시아에서는 1억 명 이상이 식량난에 시달리고, 세계인구의 절반은 물 부족 사태를 겪을 것이다. 금세기가 지나면 기상이변과 전염병 속에서 인류의 10분의 1만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지난 2월 130여국 2천5백여 명의 전문가들이 모인 UN IPCC(기후변동에 관한 정부간 패널)가 발표한 제4차 기후변화보고서의 내용이다. 그리고 IPCC는 지구온난화가 화석연료의 사용에 의해 초래됐을 가능성이 90% 이상, 즉 인류가 부른 재앙임을 분명히 밝혔다. 충격적인 것은 1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지 못하면 파국은 불가피하다는, 이미 사선에 다가섰다는 경고였다.
정말 두 눈을 번쩍 뜨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얼마나 지구를 지지고 볶았기에 10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단 말인가. 사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오존층파괴, 환경호르몬, 스모그, 미세먼지 등의 생태위기에 대한 경고는 끊임없이 울려왔었다. 그러나 경고음을 무시하고 부나비처럼 대재앙을 향하여 알면서도 달러온 것이다. 임박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생태주의가 울리는 경고에 진지하게 따라야 할 시간이 왔다.

생태위기의 근본적이고 유일한 대안은 ‘오래된 미래’로의 귀향이다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인 홍성태 교수도 계속 생태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지적해온 생태주의자 중의 한 명이다. 그가 지난 2003년부터 2006년 사이 여러 학술지와 단행본에 발표한 논문들을 묶어서 <개발주의를 비판한다>를 펴냈다.
저자가 느끼는 생태위기의 심각성은 IPCC의 기부변화보고서가 던져주는 충격과 다르지 않다. “현대문명은 이미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넘어섰고, 따라서 현재의 상태로는 그렇게 머지않은 시간 안에 파국이 닥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생태계에 대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으로 공업문명을 지목한다. “공업은 본질적으로 반자연적”이다. 그러므로 파국을 피할 유일한 대안은 생태사회로의 ‘생태적 전환’이며, “생태적 전환을 통해 우리가 결국 이르게 될 곳은 농업이라는 ‘오래된 미래’의 시공간”이다.
이처럼 현대공업문명은 생태적 한계로 인해 결국은 지속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농업문명이라는 ‘오래된 미래’로의 귀향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홍성태는 공업문명에 대한 양보 없는 생태적 반성을 촉구하는 근본적 생태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한편으로 농업사회는 “사실 양적인 면에서 생산력의 급격한 퇴보를 뜻하며, 따라서 이런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공업의 성과를 최대한 활용해서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형 농업의 시대로 점차적인 전환과 이행을 추진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대안은 근본적이면서도, 그 이행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박정희 체계가 생태위기를 낳고 있다

저자의 현실적인 면모는 한국의 생태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책의 장점이기도 한데, 서구의 생태주의 이론의 되풀이가 아닌, 한국의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의 시도가 돋보인다. 즉 한국 생태위기의 근원을 쫓아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책임을 밝혀, ‘조국 근대화’에 대한 생태적 반성을 물었다는 점이 책의 핵심이랄 수 있다.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란 곧 개발주의이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적 개발은 공업문명을 확산하는 행위이며, 개발주의란 이런 근대적 개발을 사회의 핵심적 목표로 삼는 태도를 뜻한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최고목표로 추구하는 성장주의에 따라, 민중과 자연의 착취라는 ‘이중의 착취’를 통해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중의 착취’에 따른 저항을 극악한 폭력으로 짓눌렀다. 따라서 박정희의 개발주의는 압축적이면서도 폭력적인 것이다.
박정희의 자연에 대한 착취는 특히 공업화를 위한 공간의 급격한 변형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공업화는 공업단지, 도로, 발전소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요구한다. 공업단지 조성을 위해 대규모의 토지 수용이 이루어지고, 공업인력의 생활공간을 위해 도시가 형성된다. 그리고 공산품을 운송하기 위한 도로와 철도가 국토를 가로지른다. 특히 전기를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대형 댐과 원자력 발전소는 자연을 극심하게 훼손시킨다. 이런 개발의 과정에서 금수강산의 산이 깎여나가고, 하천은 메워지는 자연에 대한 파괴가 아무런 제재없이 폭력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더욱이 박정희는 국토개발을 경제성장의 주요계기로 여겨 끊임없는 난개발을 부채질하여 한국을 ‘토건국가’화 했다. 토건국가란 “토건업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런 난개발뿐만 아니라, 공장의 폐수와 매연 방출도 경제성장의 논리로 합리화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박정희의 반생태적 개발주의는 민주화와 함께 극복된 것일까? 그러나 지금도 참여정부는 신행정수도, 부안 핵폐기장, 새만금 간척 등의 형태로 개발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저자는 “박정희의 반생태적 근대화는 결국 반생태적 사회체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박정희가 구축한 반생태적 사회체계, 곧 ‘박정희 체계’는 아직도 맹렬히 작동하고 있다. 박정희 체계는 쉽게 말해서 심각한 성장중독증에 걸린 사회이다. 경제성장을 최고목표로 추구함으로써 민주주의와 분배정의와 생태보존의 가치를 무시한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생태적 전환의 첫 번째 과제는 ‘박정희 체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박정희 체계를 넘어 생태적 복지사회로

박정희 체계의 극복은 작게는 먼저 토건국가의 한 축인 대한주택공사, 한국수자원공사 등 6대 개발공사를 개혁하는 것이고, 크게는 박정희 체계가 그동안 무시해 온 분배정의의 확대와 생태보존의 강화를 이루는 것이다. “생태적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복지사회의 구현이 요청된다. 모든 사람이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결국 생태적 전환에 대한 논의가 깊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민주화는 다시 생태적 민주화, 즉 생태민주주의의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홍성태는 생태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복지사회, 즉 생태적 복지사회를 박정희 체계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그의 개발주의 비판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비판은 요란하고 실천을 위한 고민은 없다

홍성태의 개발주의 비판은 열심이지만 실천의 무기가 되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이는 그의 비판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대안과 이행경로, 이행의 주체, 이행주체의 형성에 관한 고민이 구체적이지 않거나 아예 없다. 즉 공업문명 이후의 대안으로서의 생태사회에 대해 농업경제, 생태적 가치가 우선하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농업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생산력의 저하가 낳을 문제, 즉 전근대 농업사회가 지녔던 열악한 영양, 의료, 보건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대략적인 상조차 그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생태사회로의 긴 이행의 경로는 물론이고 당장 박정희 체계에서 생태적 복지사회로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전략이 부재한다. 개혁, 생태적 민주화, 생태민주주의 등을 말하지만 생태적 패러다임의 내면화, 시민의 참여 같은 원칙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생태관리기구의 구성, 시민의 생태적 권리 인정 등의 생태적 가치의 법제화에 관한 내용도, 이를 강제하기 위한 녹색당, 대중동원 등에 대한 전략이 책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 누가 생태적 전환을 이끌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하다. 최대의 조직적 사회운동세력인 노동운동의 생태적 전환을 언급하지만, 생태주의가 어떻게 조직 노동자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 결국 원칙만 요란하고 정치는 없는 셈이다. 이러한 홍성태의 정치의 부재는 그의 개발주의 비판이 일면적이고 보다 근본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책 이곳저곳에서 생태위기에 대한 개발국가의 책임을 요란하게 묻지만, 정작 누구나 인정하는 기업의 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면성과 편향은 저자가 자본주의 비판을 피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를 생각해보면 개발국가란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국가와 다름 아니다. 그리고 생산의 자본주의적 성격이 초래하는 대량소비, 환경비용 억압이 생태위기의 주요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생태위기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성찰없는 공업문명 비판은 현재의 삶에 대한 대책없는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책임한 비판에 누가 귀 기울이겠는가? 또한 생태주의가 단지 생태 패러다임의 내면화를 주장하는 계몽주의적 기획에 머문다면, 자본의 사회경제적 압력 앞에서 결코 그 자신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무능력은 반자본주의를 분명히 하면서, 유일하게 혁명적인 노동자계급 속으로 생태주의가 파고들 때만이 극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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