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26호] 사회주의로부터 멀어진 후보들의 경제정책

20세기 초, 독일사회민주당에는 세 개의 분파가 있었다. 베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우파와 카우츠키로 대표되는 중앙파 및 로자 룩셈부르크로 대표되는 좌파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야 로자 룩셈부르크의 좌파가 더 정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당시 당 내에서 정통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카우츠키의 중앙파였다. 카우츠키는 엥겔스의 후계자라는 권위를 가지고서 베른슈타인으로 대표되던 우파의 개량주의의 한계를 로자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비판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중에는 베른슈타인과 동일하게 사회주의 원칙을 포기하게 되었는 바,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민족문제였다. 당시 독일 자본주의가 직면한 축적의 위기를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제국주의적 블록화와 전쟁 밖에 없었으며 독일 사민당의 중앙파는 이 흐름에 반대하기는커녕 이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그 극적인 표현이 바로 제국의회 내에서의 전쟁국채 승인이었으며, 이에 찬성함으로써 카우츠키의 중앙파는 반전과 국제주의를 핵심가치로 하는 사회주의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필자가 갑자기 20세기 초의 독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 민주노동당의 상황이 자칫하면 이와 유사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당내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세 후보 특히 권영길 후보와 심상정 후보의 경제정책의 골간을 보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한 마디로 이건 좌파 정당이 내세울 수 있는 비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파와 중앙파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름도 비슷하다!) 민족주의적 경제비전이 가져올 후과를 걱정한다면 그것은 과연 기우일까?

물론 구체적인 공약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나름대로 무난하거니와 개중에는 상당히 괜찮은 공약들도 있다. 적어도 이런 각론에서만큼은 맹목적 시장주의나 성장지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래도 보수정당보다는 나은 점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대선이란 공약의 각론 하나하나에 대한 평가보다는 총론 즉 우리 사회를 추후 어떤 방향으로 끌고나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평가받는 자리이며 따라서 전체적인 틀 자체가 문제가 있으면 각론의 유의미성은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권영길 후보와 심상정 후보의 경제정책의 전체적인 틀을 훑어보면 대단히 유사하다. 양 후보 측 특히 심 후보 측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지 모르나, 각각의 세부적인 내용에서 심 후보 측이 좀 더 정교하고 좀 더 왼쪽이긴 하지만 핵심적인 프레임은 거의 동일하다. 심상정 후보의 세박자 경제론은 다음과 같다. 국내 서민경제론, 한반도 평화경제론, 동아시아 호혜경제론. 한편 권영길 후보의 경제성장 3대 동력론을 보자. 노동중심 혁신클러스터, 한반도 통일경제, 북방대륙 경제권 개척. 양자를 비교해보라. 국내-한반도-동아시아로 이어지는 틀이 똑같지 않은가?

내용이 중요하지 틀이 똑같은 것이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틀이 동일하다는 것은 사고의 전개방식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국내부문에서의 차별성을 제외한다면, 한반도 통합경제에 대한 고민이나 동아시아 내지 북방대륙에 대한 고민은 보수정당 및 자본가들도 이미 하고 있는 고민이다. 아니 사실은 그들이 우리보다도 훨씬 더 절실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다. 김대중의 햇빛정책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한국자본주의의 탈출구를 북에 대한 제국주의적 투자로 극복하려는 일부 자본분파의 기획이거니와 그 속에서 남북의 노동자 민중의 권리에 대한 고민은 아예 없거나 부차적일 따름이다.

한반도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더욱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북방대륙 개척 내지 동아시아 호혜경제라는 이름으로 제시된, 제국주의적 블록화를 용인하는 기획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블록화가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대선공약이란 현 시점에서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비전이다) 이런 류의 시도는 블록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혹자는 남미의 예를 들겠지만 남미는 무늬만이건 어쨌건 좌파 성향의 정부들끼리의 경제협력이거니와 그 속에서조차 자본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남북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일본, 중국, 러시아, 아세안 등 그 어디에도 좌파 성향의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에너지 개발에 대한 공동투자’니 ‘역내 낙후지역에 대한 공동개발’ 등등을 수행할 주체는 자본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자본의 제국주의적 진출을 옹호하는 논리에 다름아니다.

게다가 현실성의 문제도 존재한다. 남미 등과는 달리 한중러일은 아직까지 과거사에 대한 청산도 제대로 안 이루어질 정도로 역사적 앙금이 깊으며, 경제적으로도 상호보완적이라기보다는 상호경쟁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경제협력 내지 통합을 전제로 하는 기획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설사 현실성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 경제에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한중일 특히 중국과 한국은 상호경쟁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다. 그런데도 한미FTA보다 한중일FTA 내지 한중일 경제협력은 우리에게 더 낫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농업이나 중소기업에 미치는 영향 등 서민경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한미FTA보다도 더 심각한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크지 않는가?

그래도 세계화는 불가피한 것이니만큼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에 대항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론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란 생각처럼 공고한 것이 아니다. 금태환이 정지된 달러와 금융의 세계화가 결합된 현재의 세계경제질서란 끊임없이 위기를 국지적으로 전가함으로써 유지되는 체제일 뿐이며 그 수명은 길어야 오십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북방대륙 내지 동아시아의 블록화란 그 자체가 오십년 가까이 걸릴 수 있는 기획이다 (유럽의 예를 생각해보라).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질서 그 자체가 무너지는 판에 사회주의가 아니라 뒤늦게 블록화를 추구한다? 이건 좋게 봐주어도 뒷북일 따름이다.

결국 이런 논리의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가 앞으로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제 하에서 그에 대항할 방법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민족 내지 북방대륙/동아시아 지역 단위의 대응이 도출된 것이며 이는 정확히 민족주의의 경제비전인 것이다. 이런 비전 하에서는 미국 대 한국 및 그 주변지역의 대립구도가 일차적이며 자본 대 노동의 대립구도 내지 노동자 민중의 권리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는 언제든지 자본내 분파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기획이며, 실제로도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으로 무조건 미국 주도 하의 세계경제질서에 적극 편입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자본분파 즉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한미FTA 적극찬성파와 당장의 방향은 다르지만 미국에 대한 두려움 내지 자본주의에 대한 불가피한 승인이라는 핵심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사회주의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방향의 기획인 것이다.

물론 글의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구체적인 내용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 특히 국내 정책 분야에서는 - 나름대로 무난하거나 꽤 괜찮은 것들도 많다 (권영길 후보의 경우 국내 정책 분야에서도 문제가 되는 공약들이 제법 있지만 개별 공약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틀 내지 큰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부분적인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는 우리 사회를 변혁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20세기 초 독일 사민당의 경험에서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이 글이 권영길 후보 및 심상정 후보 측의 경제 비전에 대한 비판으로 집중된 이유를 짧게 덧붙이고자 한다. 노회찬 후보 측의 경우 구체적인 각론이 아니라 총론의 측면에서 좋거나 싫다고 말할 만한 경제 비전이 명확하지 않았다. 이는 나쁘게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다는 것일 수도 있고 좋게 보면 최소한 다른 두 후보처럼 뻘짓은 안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에게 맡기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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