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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양반들만의 타락한 축제, 과거시험 현장

유교적 관리 선발제도인 과거제도는 본디 중국 수나라 때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청조 말까지 약 1300여 년간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실시된 ‘독서삼품과’를 과거제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식 관리 선발제도로써 과거제도가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 9년(958)이었다. 당시 후주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온 ‘쌍기’라는 사람이 건의하여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시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상류층에게 특혜를 주는 음서제와 병행되었고, 무과가 없었으므로 여전히 반쪽짜리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과거제도는 비로소 문·무과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역과, 의과 따위의 잡과도 생겼다. 그런데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였으므로, 단연 문과가 중시되었다. 문과는 다시 소과, 대과로 분류됐다.

소과는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시험이고, 대과는 식년시라 하여 3년에 한 번씩 33명을 뽑았다. 그러나 식년시 외에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임시 시험이 있어서 실제 합격자는 더 많았다.

조선시대 과장은 부정시험 만연한, 잡된 무리의 노름판

과거제도는 그동안 혈연이나 파벌에 따라 세습적으로 이뤄지던 인재등용 관행을 바꾸었다. 공정한 절차에 따라, 유교사상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는, 매우 모범적인 문명제도였다. 오늘날의 행정고시, 사법고시 등 국가고시도 과거제의 바탕 위에 도입된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함’을 기치로 내걸고 시행된 과거제도는 실제로도 공정하게 시행되었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난장판이었다. 이미 세종 대부터 대리시험과 감독관의 부정을 지적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른바 ‘커닝페이퍼’에 해당하는 예상답안지를 미리 만들어 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시험장에 책을 들고 가는 ‘협서(挾書)’도 예사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법이 해이해져서 응시생이 들고 온 책으로 과장이 마치 책가게와 같았다”고 한다.

또 성호 이익은 “과장에 들어간 사람 가운데 글을 직접 짓는 사람은 10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했다. 대리시험이 다반사였다는 말이다. 다른 수험생과 짜고 답안지를 바꿔치기하는 일도 흔했다. 채점관을 매수하거나 합격자의 이름을 바꿔치기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과 응시생이 거쳐야 했던 소과 시험장의 모습. 마치 관광하듯 자유롭게 시험을 치르고 있다.
시험 부정을 위하여 ‘첨단기술’도 동원되었다. 숙종 31년에 성균관 앞 반촌(泮村)의 한 아낙은 밭에서 나물을 캐다가 노끈이 땅에 묻힌 것을 발견하였다. 노끈은 땅속에 묻은 대나무를 통하여 과거시험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밖에 있는 자가 줄을 당겨 시험문제를 확인하고 답안지를 작성하여 되돌려 보내는 수법이었다. 당국이 조사를 했으나, 범인은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편 세도가의 자제는 천자문을 몰라도 합격했다. 임금이 직접 주관한 과장에서도 술판, 싸움판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요컨대 정조 24년 3월21일, 3개소에서 나누어 실시한 과거시험 응시생이 모두 11만1838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이 모두 순수한 수험생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답안지를 제출한 수험생은 3분의 1정도였다. 수험생 대다수가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잡된 무리였다. 그들이 관광 목적으로 몰려들다 보니 과거장이 북적거린 것이다.

답안지의 1%만 채점하여 합격자를 가리는 엉터리 시험

과거 시험은 따로 문제를 인쇄한 종이를 나눠주지 않는다. 문제가 제시된 현제판(懸題板)에 다가가서 직접 문제를 적어 와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현제판에 가까운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래서 밤을 새워 과장 밖에서 기다리다가, 새벽에 문이 열리면 밀물처럼 과장으로 들어가면서 몸싸움을 벌였다. 그런 과정에서 부상자는 물론이고, 짓밟혀 죽는 이도 있었다. 서로 싸우다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난장판. 그것이 바로 조선시대 과장의 풍경이었다.

조선시대에 과장에 출입하는 것은 양반 행세를 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실력이 안 되는 사람도 ‘체면’을 의식해 과거에 몰렸으니 과장이 터져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분업화된 대리시험도 있었다. ‘거벽(巨擘)’은 답안 내용을 전문적으로 지어주는 사람이고, ‘사수(寫手)’는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사람이다. 거벽과 사수를 고용한 세력가의 자제는 과장에서 팔짱 끼고 앉아 구경이나 하면 그만이었다. <청구야담>에 따르면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도 문필이 짧아 시골 유생을 속여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당시 거벽과 사수는 소설에 등장할 정도로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돈을 받고 과문(科文)을 대신 지어 주었던 거벽으로 유명한 사람은 류광억이다. 정조 때 소설가 이옥(李鈺)이 지은 ‘류광억전’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류광억은 실제 과문을 팔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합천 사람으로 과문에 능하여 이것으로 생계를 삼았다. 받은 돈의 액수에 따라 답안지의 수준을 조절할 정도로 전문 대필가였다는 류광억. 그는 원래 뛰어난 고시생이었으나 출신의 벽에 부딪혀 결국 과문 대필을 직업으로 삼게 된 것이었다.

한편, 훌륭한 답안을 작성하는 것만으로 합격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답안지를 빨리 내기 위해 응시생들은 또 일대 경쟁을 벌였다. 답안지의 앞머리만 훑어보고 채점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일찍 제출한 답안지 중에서 주로 합격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과거 응시자가 너무 많아서 빚어진 일이었다.

예컨대 정조 24년의 초시(初試) 답안지만 3만8천여 장이었는데, 최초 접수한 300장 안에서 합격자가 거의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답안지의 1%만 채점하여 합격자를 가려내는 국가고시가 버젓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지배층 스스로가 부정시험의 수혜자들

18세기에 이르러 이미 과거제도는 인재 선발 기능을 잃게 된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따르면 당시 문과합격자가 갈 수 있는 벼슬자리는 실제 500자리에 불과하였다. 대개 관료 한 사람의 평균 재임기간을 30년으로 보았을 때, 그 기간에 모두 2330명을 뽑게 된다. 그러므로 500명을 제외한 나머지 1830명은 실업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관료 예비군이 넘쳐나자 엽관운동과 관직매매가 성행하게 된다. 당쟁 역시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 것이 성호의 견해다.

과거는 원칙적으로 천민을 빼고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산이 없어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은 대다수 백성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어쩌다 돈푼깨나 있는 중인이나, 양가의 서얼이 과거에 합격한다 해도 판서나 정승 같은 요직에 오를 수는 없었다. 과거에 합격해도 중인, 서얼, 그리고 문벌이 변변찮은 양반들은 임용에 차별을 받음으로써 미관말직에 머물러야 했다.

과거가 공정성을 잃는 과정은 파벌독재 정치와 세도정권이 성립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실제 과거를 아무리 자주 치러도 권력을 갖게 되는 핵심 지배층은 특정 소수 가문들이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합격자를 발표할 적에 보면 ‘시(豕)’와 ‘해(亥)’ 자도 분별하지 못하는 젖내 나는 어린애가 장원을 차지하기 일쑤”라고 하였다. 그 ‘젖내 나는 어린애’는 물론 권세가의 자제였다.

조선후기 지배층 사이에서는 과거를 개혁하기 위한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1894년에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그 폐단은 고쳐지지 않았다. 지배층 스스로가 이미 부정시험의 수혜자들이었으므로 고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사회구조 자체가 그랬다.

과거시험은 오늘날 국가고시가 그렇듯 한 번 합격하면 평생 특권을 보장하는 제도였다. 그러한 특권의식으로 관존민비(官尊民卑) 관습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사회가 다원화된 오늘날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국가고시와 공무원시험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는 교육제도

교육과 시험제도는 지배계급의 신분과 재산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봉건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오는 변동기에는 엉성한 교육제도의 틈을 비집고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안정될수록 교육제도는 가진 ‘그들만의 리그’로 구축되기 마련이다. 지금 통치자들이 자립형사립고, 특목고, 국제중 등 귀족교육기관을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결과다.

겁 없이 학벌 경쟁 대열에 섰다가 벼랑 끝으로 밀려 떨어지는 수많은 들러리들을 보면서, 이 땅의 지배 귀족들 입가에 웃음기가 도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 또한 비슷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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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제도 , 박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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