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6호]2중대의 역사

시리즈 순서

1) 개관 - 역사의 범죄자 혹은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민주의자들의 역사
2) 학살의 역사 - 독일에서 벌어진 사민주의자들에 의한 노동자 도살
3) 이중대의 역사
4) 식민지 문제
5) 여성문제
6)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7) 사회적 분업과 직접 민주주의
8) 산별노조


민주노동당이 분열로 치닫는 과정에서 많이 등장한 말이 "2중대"였다. 자유주의 정당과 소위 민주개혁을 위해 공조하고, 수구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해 공동전선을 편다는 명분하에 뒷꽁무니를 쫒아다닌 행위에 대해 사람들은 2중대라는 굴욕적인 딱지를 붙였다.

민주노동당이 분열되고 등장한 진보신당은 그들이 그토록 저주를 퍼부었던 2중대 작태를 더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심상정 후보는 대운하 반대 전선을 내걸고 반한나라당 연대를 주장했으며, 민주당의 후보단일화 제안을 수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나, 공히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용기와 배짱이 처음부터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지만, 기실 그 배후에는 인민전선(민족해방 통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자들 혹은 덜 고약한 보수정객들과 부끄럼없이 연대해왔던 속성과, 자본주의 번영에 기초한 민주개혁에 목을 걸었던 사민주의적 속성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사민주의는 2중대의 원조이고, 2중대로서 살아갈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밀레랑 사건

혁명을 반대하고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민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맹목적 신념이 있다. 이들의 신념은 "부르주아 정당들과 협조하고, 정부의 책임있는 정당이 되겠다는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혁명적 반대파를 무력으로라도 억압하는 것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원대한 전투성을 단속"하겠다는 의지로 이어진다.

이들은 그들의 원대한 민주적 개혁을 위해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하고, 부르주아들과 연정을 하고, 부르주아들과 정치적 연대를 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말이 연대였지, 그들은 부르주아 정당의 이중대가 되었고, 애완동물이 되었다.

유럽의 사민주의자에게 가장 큰 스캔들을 들라면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1차대전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지만, 앞서 1899년 프랑스의 사회주의 지도자 알렉상드르 밀레랑이 상업장관으로 정부에 입각한 사건도 만만찮은 파장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르 밀레랑 - 노동부장관으로 입각한 후 노골적인 반노동적 태도를 취했고, 급기야는 1910년 철도파업 진압에 군대까지 동원했다. 결국 우파로 전향하여 20년에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것이 스캔들로 기록된 이유는 사회주의 정당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반대하고,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공정성이나 중립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국가의 주권은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느니, 국가는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조정자역할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가 자본가 정부의 장관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밀레랑은 민주개혁을 가속화하기 위해 입각을 결심했으니, 그 자체가 스캔들이 된 것이다. 밀레랑은 입각 후 그가 목적한 대로 "자본주의"내에서 의미심장한 개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1899년이면 1871년의 최초의 노동자국가, 빠리꼬뮨의 학살이 일어난 지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꼬뮨시절, 71명의 구역장의 하나로서 나폴레옹 동상을 넘어트리고 스위스로 망명했던 천재화가 꾸르베가 수십만 프랑의 벌금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광염으로 온몸이 오줌통으로 변해 죽은 지 20년이 갓 지난 시점이었다.

때문에 여전히 생존자도 존재했고, 학살의 기억도 뚜렷했다. 당연히 혁명주의자들은 밀레랑에 저주를 퍼부었고, 그 저주는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다. 빠리꼬뮨의 학살자가 장관자리를 자치하고 있던 밀레랑 정부는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발포를 했고, 전투적 노동운동은 교수형 올가미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시절을 보내야 했다.

밀레랑 스캔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민주개혁을 위한 연합이라는 큰 흐름의 연장선에 있는 사건이었다. 우리 같으면 군사독재 시절 민추협으로 상징되는 양김씨와 재야세력이 연대한 것과 매우 유사했다.

밀레랑에게는 민주적 개혁의 목표가 전부였다. 초기 사회주의 정당은 민주적 개혁과 함께 성장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체제의 민주화를 통한 노동자 정치의 확대(19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좌파가 목도하고 있던 보통선거권의 점진적인 확대)에 고무되어 있었고, 사태가 그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종국엔 집권의 길로 갈 것이라는 암시를 너무 뚜렷이 보여주는 일련의 선거승리에 매료되었다. 부르주아 국가에 좀더 강력한 변화의 압력을 준다면 이 목표는 훨씬 빠르게 달성될 거라는 생각이 사회주의 장관의 입각이라는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민주개혁에 홀린 사람들

보통선거권의 확대와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에 따라 의회로 진출한 초기 사회주의의원들은 부르주아국가는 부르주아들의 집행위원회(이명박 정부는 땅부자들의 집행위원회지만)라는 사실을 애써 강조했고, 기존 부르주아 정당들이 정부구성에서 사회주의 정당을 배제하는 관행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부청사에 무화과를 먹이는데 주저하질 않았다.

그러나 승리의 메이데이 행진(1890년 5월 1일, 독일사민당이 직전 선거에서 20%의 득표율을 얻고 개최된 최초의 노동절행진)이후, 의회에 우르르 들어간 사민당의원들은 점점 강력해지는 자신들의 힘을 근거로 점점 제국주의국가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기존국가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을 포기한 대가로 사민주의 정당은 제 2당, 혹은 1당으로서 의회내의 신사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대신 그들은 투쟁하는 민중들로부터 고립되어 갔고, 이들은 자신들의 고립감을 떨쳐내기 위해 민주적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다른 정당과의 제휴를 모색했다.

비겁으로 시작해 파멸로 끝난 연립정부 실험

이들의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짝사랑은 1차대전이 끝나고, 혁명의 시대에 진입했을 때 절정을 이루었고, 이는 거리의 혁명적 대중에게는 재앙으로 다가왔다. 1920년대에 벌어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사태는 대표적인 경우다.

1918년에 갑자기 몰아닥친 혁명적 파고에 의해 권력의 정점으로 밀어 올려진 두나라의 사민당 지도부는 단독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조건에서조차 질서 수호라는 명분으로 부르주아정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독일사민당 당수였고, 혁명에 힘입어 임시정부 총리 및 바이마르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그의 재임기관은 배신과 노동자학살로 얼룩졌다.
혁명대중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킬 목적으로 독일사민당 지도부는 그나마 남아있는 폭력기구의 지휘관들과 거리의 노동자를 제압할 깡패들을 고용할 자금을 제공할 대자본가의 돈을 필요로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왕권이 권자에서 굴러떨어지자 이 자리를 혼자 차지할 배짱이 없었던 사민당은 자본가들을 배제한 권력이 내전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한쪽이 압도적일 때 내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슷한 역량이 갈등을 일으켜야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붉은 빈이라고 불릴만큼 노동자들의 행동력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권력을 잡고 반동세력을 일소하는 단호한 조치는 이미 구체제의 멸망으로 크게 기우려 있던 노동자와 자본가의 역관계를 더 공고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작자들은 주어진 권력조차 휘두를 줄을 몰랐던 것이다.

곧이어 독일에서는 혁명대중에 대한 학살이 이어졌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모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18년에 세워진 헝가리 사회주의 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공공연한 임무해태가 벌어졌다.

특히 오스트리아 사민당은 18년에서 19년 사이에 충분히 가능했던 봉기를 거부하고, 헝가리인들의 파멸을 방치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 혁명대중과 단절하는 결정적 실책을 저질렀다.

그리고 대신 선택한 것이 연립정부하에서 "사회화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시도, 자본가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을 시도는 1920년 연립정부의 붕괴로 이어졌고, 야당으로 복귀한 오스트리아 사민당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독일에서도 카프반란을 진압한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연립정부를 사수한 독일사민당은 "경제민주화"를 자신들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어떤 개혁조치도, 자본주의정부와 기업가들을 찍어 누르지 않고는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혁명대중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이 혼미한 독일사민당은 기업과 정부에게 주도권을 넘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결국 야당으로 밀린 독일사민당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더 나쁜 상황이 올까봐 두려운 독일 사민당은 보수적인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찌의 친위대는 성큼성큼 권력으로 가는 길을 열고 있었고, 자기 사무실에서 얻어터진 사민당 지도부에게 남은 길은 감옥뿐이었다.

자본주의 질서의 단절에 대한 공포

자신을 사민주의자라고 자처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기존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를 변화시키고, 종국에는 통제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개혁적 입장을 고수하려는 사람을 우리는 사민주의자라고 부른다.

자본주의 번영에 의해 지탱되는 국가체제를 옹호하는 입장은 극심하고 격렬한 단절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정치적 경력을 지역구후보로 시작했던, 혹은 밀림의 게릴라로 시작했던, 단절에 대한 공포를 갖는 사민주의자들은 등장한다.

하나의 예가 무장투쟁과 대중봉기를 선도했던 남아공의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SACP(남아공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택한 행동이었다. 흑인 정치지도자, 반란군의 엘리트들은 흑인들의 폭동으로 남아공 전체가 쓸려갈 수 있다는 공포를 온건한 백인지도자들과 공유했다.

이러한 공포는 27년 감옥에 있던 만델라가 현직 대통령과 더불어 흑인들의 보통선거권과 백인들의 기득권(그것은 백인소유권의 유지, 즉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와 동일어다)을 거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배경이 되었다.

가끔 백인들을 납치해 살해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산적떼나 다름없이 취급받던 하급전사들의 정서와 동떨어지게 이들 검은 엘리트들은 불굴의 전사, 하디(Hardi)까지 포함해 흑인들의 성자이자 백인들에게도 성자였던 만델라의 협상을 지지했다.

협상이 타결되고, 같은 양복점에서 맞춘 것이 틀림없을 검은색 정장을 입은 흑인정치지도자들이 대통령궁 앞에서 백인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흑백분리정책의 사형선고를 상징하는 바라고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남아공 부르주아 의회정치의 생존을 알리는 축제였다. 제1당으로 등장한 ANC는 자본주의 리더십에서는 백인소수정당의 2중대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 정치의 민주주의가 이중대의 역사를 청산한다

그러면 사회주의 정당이 2중대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레닌주의 정당이 그 일을 해냈다. 볼세비키는 까다롭지만 주변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의 정점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 직업적 혁명가의 정당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을까? 오로지 혁명을 직업으로 생각하고 생활비는 당에서 대주는 그런 시절은 볼세비키에서 혁명 전에 유감스럽게도 한번도 없었다. 돈문제라면 강도질을 할 만큼 방법이 없었고, 당원은 1905년에 이미 4만명이 넘어 버렸다.

레닌주의 정당이 이중대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의원단도 통제하고, 지도부마저 통제할 수 있었던 당내 민주주의와 당원들의 자발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지구의 볼세비키 당원들은 맘에 들지 않는 중앙위원들을 향해 소환요구를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당의 노선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뻔질나게 발표했다.

주사파에서 세계최초 당의 수령이라고 떠받드는 레닌마저 본인이 제출한 안건의 30%만이 채택될 정도였다. 의원단과 조합주의에 빠져있는 당원들로 이원화되어 있던 서구 사민주의 정당들에게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속성이었다.

의원단은 부르주아 의회의 신사들로 따로 놀고, 노동대중은 정치문제는 의원에게 맡기고, 소위 현장운동에만 집중력을 보였던 사민주의 정당에게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을 극복해야

그러면 의회, 혹은 부르주아 선거는 필연적으로 이중대의 역사를 만드는 곳인가? 베네주엘라의 차베스는 제헌의회 소집을 통해 이를 간단히 넘어버렸다. 차베스가 아직도 자신이 언명하고 있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실현할 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차베스는 쿠데타가 아닌 선거를 통해 기존 국가기구들을 무력화시켰다.

물론 여기에는 막강한 정치적 대중운동의 후견이 있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차베스는 미션이라는 이름의 생활속의 대중정치운동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속한 역할과 권한을 체계적으로 박탈해왔다. 의료, 교육, 소액금융 등의 분야에서 해당분야를 아우르는 대중운동으로 새로운 해결주체를 창출해왔다.

한편으론 의회는 광범위한 대중운동에 둘러싸인 제헌의회를 통해 입법권을 박탈당했다. 역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던 칠레의 아옌데가 의회의 질서, 군대라는 가장 폭력적인 국가기구내의 극소수 지지자들을 믿다가 발등을 찍힌 것과 비교되는 실천이었다.

이중대는 다만 기존보수정당의 뒷꽁무니를 따라가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결여된 사회주의 세력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수호하려는 자들의 이중대가 된다.

자본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자에게 자본주의는 자신이 넘을 수 없는 의식의 벽이다. 의회주의를 거부한다고 거듭 주장하지만 조합주의에 머물러 있고, 신자유주의 반대 타령에 머물러 있는 정치선동을 거듭하고 있는 세력은 무의식적으로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굴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요는 의회주의니, 선거니 하는 말에서 사태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빈곤한 정치적 상상력, 그리고 계급의 이해를 박력있게 옹호하는 당파성의 결여가 이러한 이중대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