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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그의 콧물감기가 러시아를 구했다?

- 역사 속 기회주의자의 전형 나폴레옹

지치지 않은 정복자 나폴레옹. 그는 1769년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통치에 협력한 아버지 덕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에 유학하여 병사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는 지독한 사투리 때문에 본토 귀족자제들로부터 ‘코르시카의 촌놈’이라고 놀림을 당하며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졸업 때 성적은 58명 중 42등. 하지만 지독한 피해의식 때문에 출세욕만큼은 단연 1등이었다.

나폴레옹이 사관학교를 마치고 포병장교로 근무하던 1789년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의 손에 점령되었다. 당시 스무 살의 나폴레옹은 그런 역사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혁명 대열에 끼어들지 않았다. 1792년 8월, 국왕 루이 16세가 시민의 손에 끌려 다니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천민의 자식들’이니 ‘머저리 같은 놈’이니 하며 시민과 국왕을 싸잡아 비아냥거렸다.

그러던 나폴레옹이 1793년에는 당시 집권자로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된 로베스피에르에게 접근하여 혁명 정부의 장교가 된다. 그리고 왕당파의 반란을 격파한 공로로 스물다섯 나이에 이탈리아 원정군 포병 사령관이 되었다.

부르주아 세력 등에 업고 황제 자리에 도전

그러나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 일파가 제거되고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장교의 지위를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10월에 왕당파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다시 진압군 지휘관으로 발탁되고 총재 정부의 군사령관에 임명된다.

벼락출세한 그는 이듬해에 이탈리아 원정에 올라 많은 재물과 예술품을 강탈해 왔다. 나폴레옹이 개선하자 외무대신은 “프랑스는 오직 그대의 힘에 의해서만 자유로워질 것”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하였다.

그가 택한 다음 정복지는 동서양의 관문인 이집트. 영국의 인도 진출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5만 원정군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넌 나폴레옹은 작열하는 사막에서 이집트 기병대를 연달아 격파하고 카이로를 거쳐 수에즈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영국 해군이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는 왕당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었다. 무능한 총재정부가 헤매는 동안 부르주아 세력의 자금 지원도 끊어질 위기였다.

기회주의자에게 위기는 기회였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지루한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1799년 10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치 원로 시에예스 등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파리 곳곳에 병력을 배치한 반란자들은 자코뱅파의 테러 음모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500인 의회와 원로원을 파리 교외로 옮겨버렸다. 무장한 병사들은 총검을 들이대고 회의장을 점령하였다.

그로써 총재 정부는 해체되고 나폴레옹은 임기 10년의 제1통령이 되어 새 헌법을 공포하였다. 새 헌법에서 나폴레옹은 ‘평등, 자유, 소유’의 혁명 원칙을 ‘소유, 평등, 자유’로 바꾸었다. 평등 대신에 소유를 으뜸으로 세운 것이니, 이는 든든한 후원세력인 부르주아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부르주아 세력의 대변자 나폴레옹은 삼각모자와 긴 망토 차림으로 본격적인 ‘유럽 사냥’에 나섰다.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네덜란드를 차지한 그는 1802년에 영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휴전 기간에 그는 농민의 토지 소유를 입법화하였다.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과 식량을 쉽게 조달하려는 속셈에서였다. 또 교육 시설을 확충하고 실업률을 낮추었다. 농민과 시민들은 나폴레옹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에 힘입어 나폴레옹은 1802년, 마침내 종신 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열렬한 지지와 권력에 도취된 독재자는 왕이 되는 꿈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혁명의 아들’을 자처한 그가 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정치 도박을 벌인다. ‘왕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황제가 되자’는 것이었다.

기회주의자의 초라한 최후

1804년 5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공화국을 세습 황제에게 맡긴다는 ‘원로원령’을 발표하였다. 그에 따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그해 12월 2일, 나폴레옹은 노트르담 사원에서 성대한 황제 대관식을 열었다. 작곡가 베토벤은 새 황제에게 교향곡 ‘에로이카’를 헌정하였다. 그로써 프랑스 혁명은 덧없는 해프닝으로 끝막음되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전쟁 광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패하고 유럽 각국의 동맹군의 반격에 직면했다. 정복자는 교활한 유인전술로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을 차례로 격파하고 1807년에 틸지트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그런 다음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저 유명한 ‘대륙봉쇄령’을 발표한다. 더불어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하고는 그곳 시민과 병사 5만여 명을 무차별 학살함으로써 정복자의 잔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한편 1812년에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에 응하지 않은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하여 직접 6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나폴레옹 생애 최대의 원정군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에 걸려든 프랑스군은 혹한 속에서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50만의 병력을 잃고 나머지 10만 명과 함께 간신히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1814년 3월, 파리로 들이닥친 연합군에 의하여 강제 퇴위당한 그는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로써 왕정이 복고되어 루이 18세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루이 18세를 쫓아내고 재집권에 성공하지만, 다시 워털루 전투에서 연합군에 패하였다. 그의 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세인트헬레나 고도로 유배됨으로써 그는 역사의 뒷면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흔히 나폴레옹을 프랑스 혁명의 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혁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좇은 착한 아들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정복의 자유’와 인접 국가에 대한 ‘평등한 박해’만 있었다. 그는 단지 출세에 중독된 기회주의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르주아지 역사가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왜곡되었다. 나폴레옹은 네 시간 이상을 잔 적이 없다고 하며, 작은 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삼각형 모자를 만드는 디자인 감각을 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하루 8시간 수면에 낮잠까지 잤다는 말도 전해 온다.

나폴레옹의 후손들

한편 러시아 원정 당시 보로지노 전투에서 만약에 나폴레옹이 콧물감기를 앓지 않았다면 러시아는 오래 전에 멸망하여 세계지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억측도 있다. 그 말대로라면 나폴레옹의 ‘콧물감기’가 러시아의 구세주인 셈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10년 정도 일찍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권력투쟁의 회오리에 말려들어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일찌감치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났을 지도 모른다.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를 교묘하게 피해갔기 때문에 출세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조의 봉건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프랑스 민중의 지지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다. ‘기회주의(機會主義, opportunism)’란 역사적 신념과 원칙을 저버리고 오직 권력의 끈을 잡기 위해 양지(陽地)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행태를 말한다.

우리 역사 속에도 기회주의자들이 넘친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에 돈과 권력을 위하여 친일행각을 벌이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군화 발에 달라붙어 너스레를 떨던 자들이야말로 나폴레옹의 후손들이다. 그 후손들이 오늘날 청와대와 여의도, 그리고 땅값 비싼 동네의 주인이 되어 있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불렸으나, 레닌에게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배신자로 비판받은 칼 카우츠키
본디 기회주의라는 말은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계에서 개량주의·수정주의와 함께 쓰였던 용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변질된 노선을 비판하는 의미다.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닌이 그의 저술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에서 사용한 이후 비판적 용어로 자주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우측으로 왜곡하거나 수정하는 조류를 비판하여 ‘우익기회주의’라는 말이 많이 쓰였으나, 나중에는 무작정 무력투쟁을 일삼는 부류를 지칭하는 ‘좌익기회주의’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런데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기회주의’라는 말은 더 이상 흉볼 것도 아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은 물론이고, 자칭 진보 진영 가운데서도 기회주의의 덫에서 자유로운 정치세력이 있던가? 어디 있으면 손 좀 들어 보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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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 , 박남일 ,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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