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실천연대의 기관지 사회주의정치신문 해방

[38호]기억하라! 불덩이가 된 열사의 주검을 그 불덩이를 해방의 햇불로!



다가오는 재앙, 죽음만이 고통이 아니다

해마다 열사가 불덩이가 되어 세상을 등진 11월에는 단풍에 점화된 가을산도 불덩이가 된다. 그러나 공황을 앞둔 이 땅 백성들의 가슴은 이미 숯덩이가 되어 있다.

개중 약삭빠르다고 자처하던 자들은 불로소득에 눈이 멀어 펀드에 투자했다 절반 이상을 날려 숯덩이가 되었고, 벌써부터 인원조정을 시작한 곳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착취받던 노동자들이 실직으로 일찍부터 숯덩이가 되었다. 노동자대회장에 걸린 만장은 숯덩이가 된 노동자의 가슴을 상징한다.

실패한 시장을 퇴출시켜야 한다

지금의 혼란을 두고 시장의 실패라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시장의 실패에 대한 반대말이 국가개입이다. 그러나 시장은 자율과 동의어라고 말하면서 국가개입이 반대말이라고 우기는 것은 기만이다.

재화의 분배를 시장의 자율에 맡겼다면 그 반대는 재화의 분배를 사전에 계획하는 것이다. 시장실패의 대안으로 국가를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폐절과 계획을 도입하라고 말해야 한다.

부르주아 스스로가 계획경제의 반대가 민주적 시장경제라 하지 않았는가? 프란시스 후쿠야마라는 얼치기가 계획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해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책을 써서 민주적 시장경제의 영원함을 부르짖고, 이를 찬양하는 신도들이 부지기수였으니, 이 말이 절대 빈말이 아닌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은 소위 파생상품이라고 한다. 채권을 가지고 또 채권을 만드는 것을 파생상품이라고 하는데, 은행마다 이 상품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고작 2, 3명뿐이었고, 이들에게 모든 걸 맡겼다가 세계4위의 투자은행이였던 리만브러더스가 폭삭 주저앉았다.

자본주의의 생산규모는 온 사회가 달려들어야 유지가 되는데, 생산수단은 극히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다. 그런데 이번 금융위기는 수천만의 생사여탈권이 은행 한구석에 몰려 있는 2, 3명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 사내에서조차 통제가 되지 못했다. 이제 자본은 통제되어야 한다. 금융자본이건 산업자본이건 자본이 통제되지 않고는,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 금융위기를 보면 참으로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진다. 시장에 유동성(현금)이 넘쳐나서 파생상품이 등장했고, 이것으로 위기가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유동성이 부족해서 난리가 났다.

시장에 유동성 혹은 부동자금이 넘쳐났던 것은, 노동자를 착취해서 돈은 쌓이는데 생산에 더 투자를 해봤자 은행이자도 못 건진다고 판단한 자본가들이, 은행이자의 수배에 달하는 이익에 홀려 투기를 했기 때문이다.

지금 과잉자본으로 돈놀이를 하다 돈을 떼먹힌 은행들마다 현금을 확보하려고 시장에는 화폐기근이 닥쳤다. 이제 투기를 낳는 원천, 부동자금을 낳은 원천, 즉 노동착취가 더 이상 지속되어서도, 아니 지속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비정규직을 늘려 한몫을 챙기는 일은 경제활동이 아니라 범죄행위다. 세계 최고 부자라는 미국이 망한 이때, 노동자는 비정규직은 물론이고 정규직의 착취도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주의가 돈이 넘쳐나서 망하는 역사의 종언이 시작되고 있다.

시장을 대신할 개혁의 첫걸음, 노동자 통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무덤을 파는 계급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를 구제하는 자들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직장을 민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시장의 실패에 대응해야 한다.

공기업의 노동자는 소위 경영마인드로만 똘똘 뭉친 공기업 사장을 대신해 공공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는 노동자 통제를 실시해야 한다. 비정규직을 양산해 걷은 돈으로 펀드에 투자했다 돈을 잃어버린 경영주를 대신해, 노동자들은 공장의 통제자로 나서야 한다.

이제 노동자들은 공장/직장 위원회를 건설함으로써 비정규직을 일소하고, 더 나아가 공장/직장 통제의 주인, 궁극적으로 사회의 주인으로 나서야 한다.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에 매진하자

노동자가 사회의 주인으로 나서는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가 주인행세를 하려고 할 때마다 경찰, 군대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단을 겪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즉 노동자의 국가, 노동자를 위한 국가, 노동자에 의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는 과제는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을 건설해 권력 장악에 나섬으로써 완수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의지로만, 혹은 선언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정당 건설역량을 확보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정치활동능력, 정치투쟁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행동주의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며, 우리사회의 근본변화로 이어질 요구를 내세울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정당 건설이라는 조직적 태세를 갖추는 일과 대중들의 혁명적 행동이 결합될 수 있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반면 공황에 의해 촉발된 대중의 빈곤을 분노와 행동으로 모아낼 수 있지 못하면, 대중은 비참한 지경으로 몰리게 된다.

자신의 목숨을 노동자에게 기꺼이 바친 열사의 헌신성이 오늘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에 대한 다짐으로 승화되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