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떠나 다시 사람들 속으로
지난해 3월, 아무 대책도 없이 달랑 가방 두 개를 챙겨 한국을 떴다. 전셋집을 빼 밑천을 마련하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정해진 거라곤 출발지밖에 없었다. 몇 년간을 해오던 감옥 인권운동은 내가 아님 달려가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권운동이라는 공간에서 해왔던 숙제들을 하나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다른 활동가들의 짐으로 하나씩 고스란히 떠넘기면서도, ‘할 만큼 했다.’라며 ‘내 몫만은 아니’라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없다면’이란 상황은 인권운동에 발을 담그던 8년 전이나 떠남을 결정했던 그때나 변한 것이 없었다. 해서 여기서 돌아보면 절대 떠날 수 없다며 나의 책임방기를 정당화시켰다. 당시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은 기한도 없는 외유의 허가장이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연수라고 힘주어 강조했지만,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최대한 멀리 도망가리라 작심하고 또 작심했다. 사람과 더불어 살고자, 사람만이 희망이라며 운동을 시작했는데 사람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아니 무섭고 두려웠다. 자리는 며칠이고 몇 년이고 지킬 수 있겠지만 ‘사람 중심’의 활동가로 서있을 힘이 없었다. 해서 사람을 피해 최대한 열심히, 멀리 도망치고자 했다. 짐 되는 건, 활동가의 책무라는 건 아무것도 갖지 말자 다짐했다. 만남이, 본 것들은 그저 좋은 추억만 되길 바랐다. 하지만 사람을 버리고자 떠난 길은 다시 ‘사람들’로 이어졌다. 돌덩이 같던 내 마음을 조건 없이 자신의 것을 나눠주었던 동티모르의 ‘뭄바이’가, 사람들의 발아래 선 듯하지만 가슴 안에 사는 필리핀의 ‘따따’가, 살아남기 위해 모욕을 견뎌야 했고, 또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던 네팔의 ‘사말’과 ‘만주’가, 죽음의 위협과 동행하면서도 독립을 갈망하던 웨스트 파푸아의 ‘베니’가, 도둑질이라도 하고 싶게 만든 난민지대의 아이들이, 그렇게 만나고 헤어진 무수한 이들이 훔쳐갔다. 비껴서고 싶었지만 비켜지지 않았던 만남들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말에 귀기울여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모름지기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그들과의 소통에 고마웠던 건 나였다. 더불어 살아왔단 생각이 그저 생각에, 시선에 불과했음을 일깨운 것도 그들의 삶이었다. 해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몰림이 아닌 운동을 시작했던 그 초심으로 자연히, 떠날 때 그 자리는 아니지만 또 다른 꿈을 꾸면서, 보다 긴 호흡을 고민하면서.
자연과 낯선 공간과의 조우
사회가 효율과 이윤을 내세워 쉴 권리를 박탈하는 것과 달리 활동가들이 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함은 아마도 자발적 의지의 발로일 게다. 넘쳐나는 일들 앞에서 고양이 손이라도 있음 빌리고 싶은 심정을 경험하지 않은 활동가는 없기에, ‘내가 없다면’이라는 상황을 인식하지 않는 활동가는 없기에 ‘쉼’은 권리라기보다는 때론 자신에게, 때로는 다른 활동가에게 ‘한가한 소리’가 되고 만다. 굳이 자발과 헌신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운동의 신념으로, 활동가란 정체성으로 선 이들은 매일의 고단함과 치열함을 감수해야 하고 언제나 전장에 나설 준비로 삶을 살아야 한다. 해서 쉬지 못함은 활동가의 탓이 아니다. 열악한 인권상황 때문이며, 손가락으로 헤아려지는 인권진영 활동가의 수 때문이며, 활동비를 받기보단 운영비를 채워야 하는 재정구조 때문이다. 하지만 쉬지 못함은 활동가들의 탓이다. 쉽게 변하지 않을 상황을 넋두리하며 하루가 다르게 지쳐가는 심신을 방기함은, 이제는 바닥을 드러낸 밑천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재충전의 기회를 만들지 못함은 긴 호흡을 잃은 활동가들의 탓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항상 열려있다.’라거나 ‘상황이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는 조직이다. 필요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쉴 권리의 틀을 구조적이고 조직적으로 담보하지 못하는 건, 우리가 늘 하는 말로 책임과 판단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전가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툭 치면 쓰러질 듯한 골병 난 활동가를 만들어 내거나 대단한 ‘뻔뻔이’라 스스로와 타인에게 인식될 활동가를 생산해낼 뿐이다.
활동의 무게와 삶의 고단함을 짊어진 활동가들이기에, 사람과 호흡해야 하는 운동이기에 사람으로부터 해방된 쉼이, 창의적 연대를 꿈꾸기 위한 다른 영역과 공간에서의 사람과의 만남이, 무게를 더하는 집회와 늦은 밤 술자리가 아닌 자연과 낯선 공간과의 조우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는 강박이 또 무엇인가를 열심히 생산해내야 하는 과제로서의 ‘쉼’이 되지 않기를. 부정하려고 해도 어느새 우리 역시 성과와 계산이란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해서 활동가들의 쉼이 현재를 위한 ‘재충전’, ‘자기개발’이란 산수를 떠나 불행히도 우리가 만들고픈 세상은 그리 쉽사리 오진 않을 것이기에 장거리 계주를 위한 쉼이, 인생이 운동이길 바라는 꿈을 계속 꿀 수 있는 쉼으로 고민되기를 바란다. 덤으로 얻어진 시간인 듯 그저 하는 일없는 빈둥거림일지라도, 방바닥에 배를 깔고 만화책을 보는 키득거림일지라도 온전히 ‘쉼’만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적절한 방관과 퇴보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문정현 신부님의 단식이 오늘로 17일을 맞이한다. 대추리를 비롯해 사회 각 부분에서의 전쟁은 오늘도 계속된다. 활동가들은 또 선잠을 자고 묵직한 마음의 무게와 컴퓨터와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하루를 또 살아갈 게다. 이를 모르지 않음에도 난 팔자 좋은 소리를 하련다. 그들을 두고두고, 더 큰 생명력으로 현장에서 보고 싶은 욕심에 좀 쉬라는 말을 아끼지 않을 테다. 떠나지 않기 위해서, 더 단단해지기 위해서, “좀 쉬어.”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