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한상희의 쇳소리] 대통령의 법률주의

최근 대통령은 한미FTA에 대한, 신앙고백에 가까운 충정을 다짐한다. 그것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며 “손해가 되는” 것은 결코 않을 것이라는 다짐에, “부당한 양보를 하여 국익을 손상한 바가 없다”는 자찬 또한 뒤따른다. 하지만, 그의 ‘말씀’에는 결코 주어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우리”에는 누가 포함되며 누가 빠지는지, “손해”를 계산함에 누구의 이익이 반영되며 그 “국익”의 판단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마치 지난 시대 개발독재론이 번영과 영광을 내세웠지만, 누구의 개발이며 누구의 영광이며 누구의 권력인지 은폐하였던 것처럼.


이런 눈가림은 법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은 보지 못한 채 법이 부여한 권한에만 매달리는 그의 여전한 법률주의에서 구축된다. 얼마 전 부총리임명은 코드인사라는 비판에 대해 장관인사권은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이라며 일축해 버리더니, ‘4대 선결 조건’이라는 세간의 비난이 일자 “대통령의 결정”으로 그 말은 수용할 테니 더 이상 왈가왈부 말라는 칙령을 내린다. 비판과 비난의 실체를 직시하고 해명하기보다는 ‘나의 법적 권한과 책임’이라는 말 한 마디만으로 더 이상의 논란을 차단하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법대로 한다, 그러니 토 달지 말라’라는 그의 어법은 고위공직자의 인사건, 혹은 4대 선결조건이나 한미FTA건, 또는 전략적 유연성의 문제나 주한미군기지이전의 문제건 관계없이 어디서나 반복된다. 귀찮은 민원이 제기되면 법조문 들이대는 것으로 ‘책임 끝’을 외치는 관료들의 완장 권력이, 정치적 논쟁과 투쟁의 한복판에 있어야 할 대통령의 맥 빠진 목소리에서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 하였느니!”


이 과정에서 국민주권의 이념은 법주권이라는 신화에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국가의 운영은 국민의 참여에 의한 민주적 장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의 명령에 의하여 그리고 그 법의 해석권력을 가진 소수의 관료적 정치가에 의하여 장악된다. 실제 현 정부의 통치가 상당부분 탈정치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음도 이 맥락과 무관하지는 않다.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정치적으로 활성화되고 열린 논의의 공간에서 하나의 정책대안으로 수렴되기보다는, 모든 정보와 과정이 관료적 의사결정의 구조 속에 차폐된 채 일종의 도구합리성의 판단만으로 정책의 결정과 집행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선호되는 것이다.


한미FTA의 정보공개문제에 관한 그의 지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협상정보의 공개는 “협상 전략”이나 “협상 상대방과 상호 신뢰”에 대한 잠재적 장애요인이 될 뿐이다. 정보공개를 통해 FTA에 관한 국민적 합의와 조정을 도모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 협상에 일상을 걸고 목을 매는 무수한 대중들의 생각을 수렴하고 통합하는 참여적·민주적 과정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아예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 그가 추진하는 한미FTA는 양극화를 가속할 가능성에서뿐 아니라, 철저한 배제와 탈정치화의 수순으로만 일관하는 그 추진과정에서조차 위헌의 혐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탈권위를 내세우며 출범하였던 참여정부가 그 수뇌부에서부터 법의 이름으로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내며 법률주의가 파생하는 독선과 독단으로써 공론화와 비판의 과정을 회피하는 오늘의 현실이다. 이 지점에서 1970대를 전후하여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음에도 종국에는 관료적 권위주의의 질곡으로 추락해버리고 만 남미제국의 경험을 기억하게 되는 것은,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라는 법칙에 대한 맹종이 야기하는 또 다른 오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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