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열린칼럼] 축구와의 휴전

지난달 독일 출장이 화근이었다. 당최 잠이 오지 않는다. 10년 만에 다시 방문한 독일은 내게 너무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졌다. 육체적 시차보다 인식의 시차는 가혹했다. 자다 말고 책상을 오가길 몇 회. 아예 머리맡에 노트를 펼쳐놓고 잠자리에 든다. 뒤척이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때그때 노트에 옮겨 적다 보면 잠을 자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풀리지 않은 피로만큼이나 많은 고민거리가 노트에 수북하다.


‘개발과 삶의 질은 비례할까? 아님 반비례하나? 왜 라이프치히의 젊은이들은 그 고즈넉한 고도에 빌딩을 못 올려 안절부절 일까? 국익은 개인 이익의 합보다 큰가? 개인들의 행복이 담보되지 않는 국익은 어디까지 정당한 것일까? 벗는 만큼 자유로워지는가? 자유로운 만큼 벗는 것일까? 남녀혼욕 사우나에서 저토록 당당한 독일인의 누드는 서울에서 온 덜 떨어진 자유주의자를 주눅 들게 한다.’


도무지 쉬 풀리지 않는 고민들. 그러나 나의 노트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축구 이야기.


‘월드컵은 환상 아닌가? 그럼 올림픽은 뭐지? 환상 아닌 게 어디 있나. 전쟁도 동맹도 이미지 장난 아닌가? 실재하는 건 그럼 뭐야? 아님, 이미지가 실재인가? 가만있어봐, 사람만이 진정한 실재 아냐? 사람들이 월드컵을 즐긴다면 그 자체로 ‘선’한 거 아냐? 그럼 월드컵은 무죄 아닐까? 붉은 악마는? 민족주의 탈을 쓴 이미지 소비자? 축구상업주의 바람몰이? 아니면 애국적 자유인?’


사실 나는 축구를 싫어한다. 운동을 싫어하는 탓도 있지만 국민동원에 축구를 활용해 온 정부 탓도 있다. 독일 출장 초반 하기 싫은 일을 하느라 유럽의 날씨만큼 우울했다. 하지만 축구가 만드는 환상은 이미 현실이었다. 분명 축구만의 언어로 구축된 커다란 세상이 있었다. 전 세계 600개 방송사가 200여 개국에 연인원 50억 명을 상대로 축구를 이야기하고 축구를 통해 해당 국가를 소개하고 있었다. 축구는 현실이기도 했다. 되돌릴 수 없는 현실까지 외면해야 할 정당성을 나는 달리 가지지 못한다. 월드컵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을 힘겹게 풀어내고 있는 <문화연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안쓰럽긴 하지만 말이다.


개인이 자기 취향을 추구할 자유. 과연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축구를 즐길 자유를 막아서기 전에 그들의 자유가 누군가에 의해 오용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공동체 가치를 수호한다며 나는 지금 누군가의 자유를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념과 독선에 사로잡혀 개인을 희생시켜온 현대사의 비극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굴레’를 벗기고 온전히 사람만 보자는 게 인권을 숭상하는 우리의 신념이라면 한시도 타인에 대한 관용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리주의란 얼마나 편의적 합의인가. 다수의 행복을 이야기하며 다른 한편으로 소수의 인권에 집착하는 나와 우리의 불가피한 이중성과 조우할 때마다, 더불어 자유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상인지 절감하게 된다.


나는 축구와 휴전하기로 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축구를 존중하기로 한다. 자신의 팀을 응원하고 싶은 자 소리 내어 외쳐라. 당신의 자유는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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