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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협정과 민주주의의 복원
통상협상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잘못된 통상협정은 수백수천만의 국민들을 거리로 내몰 수 있으며 가난을 대물림 시킬 수도 있다. 급기야 국가부도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의 경제통합에 버금가는 자유무역협정 추진은 이러한 위기의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이라는 최강대국으로부터의 외부충격을 통한 국내 산업경쟁력 강화론에 기반을 둔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FTA 추진은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중소기업·영세상인·농어민들을 보호할 아무런 대책도 가지고 있지 않아 위기에 대한 우려를 더욱 더 감출 수가 없다. 이미 유통시장의 개방으로 인해 도시 어느 곳에 가도 예전같이 활기찬 재래시장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건전지 하나를 사도 대형 유통업체를 찾아가야 하는 현실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경쟁에서 승리한 이마트의 예를 앞세우면서 시장을 개방하면 더욱 부강해 질 수 있다고 한다. 한미FTA를 통해 몇 개의 이마트가 더 나타날지 모르나 가게 문을 닫고 높아진 약값으로 시름이 더해진 서민들의 고통은 지금의 양극화에 비할 바 안될 만큼 커질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위기에 대한 대책으로서, 한미FTA를 포함한 모든 통상협상은 대통령 책임 하에서 ‘사전영향평가 및 대책수립’, ‘국회의 검증’, 그리고 ‘이해 당사자로부터의 의사수렴을 통한 국민적 합의도출’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한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 이를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부와 국민의 대표기구인 국회의 역할이자 몫이다. 예상되는 피해에 대한 대책을 국민적 합의를 통해 수립하고 FTA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과 피해수준을 조절하여 국민적 갈등을 최소화하고 상생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은 통상협상, 아니 통상전쟁을 준비하는 정부의 당연하고 기본적인 임무이다. 정부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그 임무를 다할 때 국회와 국민들은 그 결과에 승복할 것이며 ‘지지와 성원’을 모을 수 있다. 그것이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지키는 일이며 상생과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 반대, 즉 한미FTA추진의 부정적 측면이 더 많을 경우 국민적 합의를 따라 추진중단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 또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다.
최소한 법적 제도 마련해야
헌법이 명시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은 국민이 최고 권력의 주인이라는 ‘주권재민’이다. 그런데 국민을 대신해 ‘정치’를 수행하는 정부의 정책 수행과정에서 국민이 배제된다는 것은 분명 민주주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법은 현존하는 권력에 정당성을 불어넣어준다는 한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작동을 제도적 합의장치 속에 제한시키고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최소한의 시민권을 보호한다는 일정한 긍정성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법은 현존하는 법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진 존재들의 사회적 드러남으로 인해 그 자체의 한계가 들어날 때마다 수정되고 혁신되어야 한다. 이 변화의 과정이 부정되고 시대의 법이 절대성을 추구한다면 그 법질서는 부활한 절대왕정이요, 독재 권력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낡은 법질서가 수정되어지고 새로운 법의 제정과정이 요구되는 것은 ‘주권재민’이라는 헌법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필요조건인 것이다. 국회가 다수의 왕의 집합이 아니라, 왕의 권력을 부정하는 국민의 대표체라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난 2월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한미FTA 협상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독단적인 졸속 추진 문제와 사회적 갈등에 대한 대처방식을 보면 대한민국에 통상협정 추진과 관련하여 국내 절차를 명시한 국내법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대통령 훈령에 따른 절차규정이 존재하나, 누구의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최소의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관련법이 없다는 것은 협정의 체결결과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의 독단적이고 졸속적인 추진을 법적으로 제어할 방법도 없는 것도 큰 문제이다. 민의를 듣기 위한 민주적 절차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와의 협의도, 국가의 미래를 준비할 만큼의 어떠한 계획도 찾아보기 힘든 대통령의 한미FTA 추진을 막을 수 있는 합리적인 법적 장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와 FTA를 추진하는 미국과 법적 제도의 준비상태를 비교해보면 우리의 경우는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경우 협상 추진 전 제도적으로 대통령의 책임 하에 사전 영향평가 및 대책수립을 마련하고 이를 국회에서 심의한다. 협상개시 선언 2월 3일과 본격협상 개시 6월 5일 사이의 기간이 바로 미국 의회에서 협상에 대한 사전 검토기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협상만료를 내년 3월 말로 합의한 것 또한 미 의회의 사후검토 90일을 충족시키기 위해 정해진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국내 준비절차가 진행되는 가운데 민간차원의 700여 자문위원과 26개의 자문회의가 결합하여 협상전략을 조정해 나간다.
협상에 대비한 사전준비와 민주적 절차는 책임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이 과정이 민주적으로 보장될 때, 협상결과에 대한 책임은 국민이 질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한미FTA 추진과정은 민주적이지 못하다. 성공하면 참여정부의 치적이 될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향후 한미FTA가 또 다시 가장들을 거리로 내몰고, 가정을 파탄내고,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만큼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드물 것이다. 결국 통상협정과 관련하여,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법체계상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은 정부이고, 배제되고 방치되는 것은 국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한미FTA가 정말로 국민들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지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그 진정성이란 세심하고 엄격한 과정의 민주적 보장, 법적 개선이며, 무너져 내리는 현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태도인 것이다. 무책임한 정책 결정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쌀 협상 국회 비준 처리 과정, 과거 한칠레 FTA 등을 통해 익히 경험해 왔다.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갈등비용과 경제조정비용이 천문학적 수준임을 고려한다면, 정부는 이러한 갈등을 사전에 조율하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조속한 통상절차법 제정 필요
한미FTA 추진으로 훼손된 민주주의의 복원을 위해 하나의 주어진 해법이 있다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통상협정의 체결절차에 관한 법(약칭, 통상절차법)’의 조속한 제정이다. 통상협정에 대한 국민적 합의과정과 국가적 사전대책수립, 국회의 역할을 제도화를 위해 만들어진 통상절차법은 현재 지난 2월 2일 40인의 여야 국회의원들의 공동발의(대표발의 권영길)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발의되어 있다.
통상절차법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민주노동당 소속 권영길 의원이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과거 한칠레FTA, 한중마늘협상을 포함 당시 현안이었던 한일FTA와 DDA 다자협상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해소 및 정부통상정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과 함께 고민이 시작되었다. 특히 정부가 2005년 ‘선진통상국가’론의 기치아래 싱가포르, EFTA(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쉬타인)등 26개국과의 FTA 추진계획을 세우고, 2006년에는 미국, 중국, 한중일, EAFTA(동아시아자유무역지대), 유럽연합, ASEAN, 인도, 캐나다, 멕시코 등 30~50여 개국과의 동시다발적 FTA 협상 추진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법의 필요성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통상절차법은 2004년 겨울부터 양대 노총, 전농, 민중연대,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등 ‘통상협정체결절차법 제정을 위한 시민단체연석회의’와 함께 민주노동당이 공동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2005년 12월 법안완성을 끝으로 2006년 2월 2일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공식선언을 기점으로 국회에서 발의된 것이다. 총 본문 46개 조항과 부칙 2개 조항으로 구성된 ‘통상절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1) 통상협정을 둘러싼 국내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고 2) 이해집단 피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 있는 대책수립을 명시하며 3) 국내 절차 문제점의 해결을 위한 민주적 제도를 수립하고 4) 정부의 중장기적인 통상정책 수립 및 책임 있는 집행을 실현하며 5) 국회의 바람직한 대정부 조정·감독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실행하기 위하여, ‘통상절차법’은 1) 통상정책의 목표·기본원칙·정보공개원칙·통상정책 수립 등을 실행하는 국무총리산하 ‘통상위원회’의 구성 2) ‘통상위원회’ 중심의 행정부 내 심의·의결 기구와 방식의 규정 3) 사회적 합의를 위한 민간자문기구의 구성과 참여 제도화 4) 통상협정의 협상 전·중·후의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규정 5) 대정부 조정·감독 기능 강화를 위한 ‘국회통상특별위원회’의 구성에 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정부의 협상에 제동을 걸자
통상절차법이 이미 제정되어 있었더라면, 국회가 조금이라도 선견지명을 가지고 노력했더라면, 적어도 정부가 군사작전 식으로 한미FTA를 추진하여 국민을 불안하기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국회가 무엇을 할지 몰라 2차 협상이 끝나도록 특위활동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우매함을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국민들이 생존의 불안으로 인해 행정부와 국회에 대한 불신을 등에 업고 거리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 해 겨울 쌀 수입개방과 관련한 농민들의 처절한 절규와 죽음을 바라보면서 정부와 국회가 얼마나 책임을 방기했는지, 그리고 그 대가가 얼마나 국민들에게 크게 다가왔는지 통감할 따름이다.
동 법안이 제정될 경우, 한미FTA는 물론 정부가 추진하는 모든 통상협정에 관한 민주적 절차와 국민적 합의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통상협정으로 인한 국내 수혜자와 피해자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국가정책결정으로 인한 국민의 경제적 피해구제, 즉 시장개방 대비 국민적 사회안정망 마련을 위한 국가의 책임이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한미FTA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통상절차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문가, 이해집단, 그리고 국회의원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다. 당리당략과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동 법안의 제정이 늦춰지고 있는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한편 현재의 과도한 정부의 독단적 권력에 대한 일정한 제동과 이를 통한 삼권분립의 균형화를 위해 필요한 ‘통상절차법’을 정부 일각에서 오히려 “삼권분립에 위반되는 위헌적 소지가 있”다는 우려를 나타나고 있는 현실은 행정부의 낮은 민주적 의식수준을 반증하고 있다. 우려되는 것은 통상절차법의 조속한 제정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동 법안이 오히려 정부의 현행 통상협정 추진과정을 합법화하는 내용을 담고서 누더기식으로 처리될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법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감독이 절실히 필요하다.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법적 제도의 개선과 혁신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책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현재 대통령 훈령 하나만이 유일한 법적 틀인 우리의 현실에서 ‘무역법’, ‘무역조정지원법’ 등 제도적 보완책이 철저히 구비된 미국과의 협상이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가 주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기대보다 우려가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적으로 ‘통상절차법’이 조속히 국회를 통과해서 한미FTA를 포함한 시장개방에 일차적인 대응준비가 시작되어야 한다. 한미FTA는 바로 민주주의의 훼손이 아니라, 이러한 민주적 절차에 따라 그 추진여부와 준비가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약간의 경제적 이익 이전에 민주적 존엄성이 침해받지 않고 지켜지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국익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이 지켜지는 것이 바로 국민의 희망인 것이다. 또한 국익론을 앞세워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것도 국민들의 바람이 아니다. 국익은 상생과 공존 속에서만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미FTA를 서둘러 추진하려는 정부는 이 점을 명시하고 심사숙고의 판단을 다시 해야 한다. 국민의 대변인임을 자처하는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할 때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