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운동 길찾기] 인간의 존엄함을 실현하는 모든 활동?

인권운동 길찾기 2 | 인권운동의 정의와 범주

지난 호에서는 간략하게 한국 인권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본격적인 인권운동 길 찾기에 앞서서 우리 사회에서 인권운동이 걸어온 길을 함께 보자는 취지였다. 이번호부터는 본격적인 길 찾기에 나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권활동가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추적해야 하고, 토론도 해야 할 것이지만, 뜻하지 않은 구속으로 인해 그럴 시간적인 여유를 빼앗긴 채 글을 쓰게 되었다. 이번 호의 주제는 인권운동이란 무엇이고, 인권운동이 감당해야 하는 활동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이다. 우리 사회 인권운동의 현실을 진단하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런 근본적인 질문부터 던져야 하겠기 때문에 주제를 이렇게 잡았다.


인권운동을 하면 할수록 인권운동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밀려온다. 내가 하는 활동이 인권운동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 회의하게 된다. 도대체 인권운동과 다른 운동은 무엇이 다를까? 인권은 보편적이며 다른 운동들도 인권의 실현이란 지향을 갖고 있는데 ‘인권’을 인권운동이 독점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독자적인 영역으로 존립할 수 없는 운동을 인권운동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회의와 고민들이 의미 있는 것은 아직껏 합의되고 정의되지 못한 인권운동의 개념과 그 범주에 대해서 정리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권운동은 무슨 활동을 하는가?


인권운동단체들이 하는 일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경찰들의 폭력에 대응하는 활동을 비롯해 국가권력의 인권침해를 감시하고, 책임을 묻는 활동은 우리 사회 인권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영역일 것이다. 과거청산운동이나 국가보안법 폐지운동과 같은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인권운동만의 전문성을 인정받는다. 나아가 사회권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빈곤과 차별을 심화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에도 인권운동은 나서고 있다. 사회권에 대한 관심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사회적으로 높아졌다. 하지만 인권운동 내에서는 자유권 아래 놓인 사회권, 자유권과의 별개로서의 사회권이 아니라 사회권과 그 밖의 인권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수없이 제기하여 왔다. 그래서 인권운동은 노동권을 비롯한 생존권의 확보와 사회권의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투쟁에도 소홀하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와 같은 소수자의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단위들이 있고, 이를 사회적인 의제로 설정하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된다. 나아가 반전 운동이나 평택 투쟁에도 인권의 언어와 논리로 개입하며 투쟁의 주체가 되고자 노력한다.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제기되는 인권문제에 대한 연대의 노력도 과거에 비해 활발하다. 이런 활동들의 밑바탕을 이루는 인권교육과 캠페인, 조직화 사업 등은 이러한 노력들이 ‘운동’이기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런 운동을 한 묶음으로 인권운동이라고 말할 때는 인권운동은 명료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한 걸음만 더 나가보면, 인권운동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밀려온다. 위에서 열거한 그런 활동들을 다른 운동진영이라 해서 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으며 또 실제로 일정부분 하고 있지 않는가. 민주노총의 경우 구속자가 발생하면 그에 대한 대응을 당연히 하고, ILO의 권고도 이끌어내고, 한미 FTA 투쟁이나 평택투쟁도 함께 한다. 그들이 하는 교육에도 노동권의 내용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존엄성에 대한 것도 있으며, 존엄한 인간과의 연대로 교육한다. 무엇이 다른가? 어쩌면 사회권에서 제기하는 평등을 향한 투쟁은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운동 조직에서 더 활발히,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까?


인권운동을 어떻게 정의할까?


‘운동’은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회변화를 위한 활동이다. 어떤 운동이든지 그 운동이 지향하는 목표가 있으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제반 활동을 가리켜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하기에 사회변화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진보운동이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보수적인 시민단체들이 속속 들어서는 이때에 이런 정의는 공정하지 못하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가령 새마을운동과 같은 것을 운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이른바 반북단체들이 벌이는 ‘북한인권운동’ 같은 것이 인권운동의 범주 안에서 함께 사고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운동’이라고 말할 것이고 논란의 여지는 있을 수 있겠지만, 운동이 진보를 향한다는 전제에서 일단 운동의 범주를 정하기로 하자.


이렇게 운동을 정리하고 나면 인권운동에 대한 정의는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다. 인권운동은 인권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펼치는 제반 활동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운동에 대한 논의들을 대강 정리하면 이럴 것이다. 고전적으로 인권이 갖는 속성에 비추어서 공권력의 폭력과 남용에 대한 감시와 이에 대한 저항, 이를 통한 권리의 보호와 전반적인 옹호 활동, 그리고 시민권 확대를 위한 활동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를 보통 협의의 인권운동으로 부른다.


우리 인권운동사가 말해주듯이 인권운동은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국제 엠네스티가 양심수 문제, 고문 문제를 자신의 수임사항으로 정해서 활동했고, 한국에서도 군사독재정권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저항하는 흐름이 대세를 이루어왔다. 이런 인권운동은 국내외적으로 여전히 유효하지만 대체로 1990년대 이전에 활발했다. 그리고 엠네스티가 자신들의 수임 영역을 사회권으로 확장하였듯이 한국의 인권운동도 그 영역을 급격하게 확장하여 왔고, 그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폭력이라는 것, 국가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것은 결국은 자유권 중심의 인권관이 반영된 현상에 대한 대응인데, 인권운동도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국가의 폭력을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제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국가폭력을 낳는 사회구조, 국제질서를 바꾸지 않고서 일국 내의 국가폭력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용인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고, ‘자유’만이 아니라 ‘평등’의 가치가 강조되게 된다.


때문에 광의의 인권운동은 단지 국가권력의 감시 활동에 자신을 위치지우지 않는다. 인권운동은 민주적 결정과정 자치·결정권(empowerment)까지 도달하는 권리설정과 권리보호, 권리증진까지 도모한다. 국가와 사회, 국제사회의 모든 결정과정에서 인권적 원칙을 존중하도록 압박하고, 모든 인간에 대해 시민권을 비롯한 정치적 권리, 사회권을 보편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럴 때 인권운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한 제반 활동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인권운동만의 지위가 있을까?


인권운동은 현상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불평등의 구체적인 표현인 빈곤의 문제, 차별의 구조에 착목한다. 그렇다면 다시 위에서 제기한 문제로 연결된다. 다른 운동과 인권운동의 차별성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노동운동도 빈곤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차별을 깨기 위해 활동한다. 평등을 지향하는 열망은 어느 운동에나 있기 마련이 아닐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인권운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맞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틀린 답이기도 하다.


인권운동은 인권운동단체만이 할 수 있거나, 인권활동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을 하면 그것도 인권운동의 범주로 포함하여 사고할 수 있고, 여성운동이 여성의 권익 확보를 위해 투쟁하는 것도 인권운동의 범주로 포함할 수 있다. 필자는 그래서 다른 운동들도 부분적으로는 인권운동이라고 판단한다. 모든 운동에는 인권운동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인권운동에 기여하는 면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이들 운동을 인권운동이라고 하지 않을까? 노동운동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확보하기 위한 운동일 것인데, 그렇게 되면 노동운동이 곧 인권운동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게 된다. 이런 등식을 받아들일 사람들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나아가 왜 사회에서는 노동운동진영이 제기하는 노동권 문제와 인권운동이 제기하는 노동권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것일까?


노동운동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노동권의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운동은 여성들이 차별당하는 구조와 현상을 여성의 입장에서 제기한다. 물론 노동계급의 이익이나 여성의 이익이 결코 이들의 이익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익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는 약점이 있다. 즉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이 제기하는 문제를 보편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부분적인 이해관계로 보는 것이 사회에서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권이란 이름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있어서 인권이 갖는 ‘보편성’의 위력은 인권운동을 다른 운동과 다른 지위를 점하게 한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인권운동이 제기한다, 즉 자신들이 이해관계와는 거리가 먼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제기한다는 인식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권운동이 연대를 할 때 바로 그런 효과가 생기게 되므로 여타 운동진영에서도 인권운동의 이런 점들을 활용한다.


하지만 요즘의 상황에서는 이런 보편성의 위력에만 기댈 수는 없는 지형들이 존재한다. 인권이 세속화되면서 ‘이권’을 ‘인권’으로 포장하는 세력들의 준동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인권이 보편화된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필자는 이를 ‘보편성의 위기’ 또는 ‘보편성의 함정’으로 정리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자.


인권운동은 어떻게 연대하나?


인권운동은 서로 다른 지향을 가진 운동들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꿰기에 매우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두루두루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을 기준으로 제기하는 것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정당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에 다른 운동진영에서의 문제들에 인권의 이름으로 개입하고, 연대하기에 유리한 지점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인권운동이 아닌가 싶다.


인권운동은 기본적으로 연대운동이다. 인권피해자는 인권피해자들끼리 연대하게 되고, 그렇게 연대하여 단체를 구성한다. 인권피해자는 이전에는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로 국한되어 인식되었지만, 한국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확인되듯이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인권피해 그룹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자발적으로 내기에 이르렀다. 이런 운동의 자생성은 어떤 힘으로도 막지 못한다. 따라서 이후에도 인권단체들은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단체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런 인권단체들은 자신들만의 운동으로는 사회적인 관심도 힘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세력들을 찾게 된다. 그래서 인권단체들의 연대가 형성된다.


반면에 인권운동이 노동운동과 연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노동운동이 갖지 못하는 인권적 전문성과 정당성이 필요할 때다.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해 노동운동이 발언하는 것은 당사자의 항의 정도로 그치지만 인권운동이 개입하면서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된다. 노동자가 사망하게 되었을 때도, 노동자가 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노동운동이 피해 당사일 때의 연대는 문제가 없다. 그것은 다른 운동과의 연대도 마찬가지다. 여성운동에 인권운동이 연대할 때도 그렇고, 환경운동, 시민운동과 연대를 해도 그렇다.


그렇지만 사회권 운동이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운 지점은 위와 같은 연대와는 다른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노동권에 대해서는 노동단체들이, 사회보장권에 대해서는 사회복지단체들이, 건강권에 대해서는 의료단체들이, 주거권에 대해서는 주거운동단체들이, 문화권에 대해서는 문화운동단체들이 인권운동보다 전문성이 있다. 이렇게 연대할 때 인권운동의 전문성은 사실상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럴 때 인권운동은 독자적인 운동으로 사회권 운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인권운동의 논리를 구축하고, 그 논리를 인권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연대를 풀어갈 수 있다. 한미 FTA 협상 저지 투쟁에서 인권운동은 이 투쟁에 연대하지만, 인권운동이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너무 미약하다. 노동조합 하나가 움직이는 것보다도 적은 인원밖에 모으지 못하는 인권운동은 이럴 때 인권운동만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갖고 연대해야 전체 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 그래서 단순히 전체 사회 구성원과 관계되는 보편적인 사안이라고 해서 인권운동이 연대해야 한다는 논리는 인정받기 어렵다. 여기에 다른 운동과는 다른 인권운동의 고민이 있다.


인권운동은 진보운동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인권운동을 한다는 운동세력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세대 중심의 인권단체들이다. 민가협은 양심수를 석방하고, 국가보안법과 같은 국가의 법제도 개폐를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 천주교인권위원회도 주로 국가의 폭력 문제에 집중한다. 2세대 인권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들은 불안정노동철페연대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를 위한 운동들을 전개한다. 빈곤사회연대는 단체들의 연대체이지만 우리 사회 빈곤의 문제를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3세대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들로는 평화운동이나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단체들을 들 수 있다. 거기에 위의 모든 세대들과 연관되어 있는 장애인 단체들이나 성소수자 단체들은 자신들이 겪는 차별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슈로 삼아서 운동을 전개한다. 이런 인권운동단체 말고 인권운동사랑방과 같은 종합적인 인권단체들도 있다. 이런 인권운동단체들은 1990년대에는 한국인권단체협의회(인권협)로 묶였다가, 2000년대에는 인권단체연석회의(인권회의)로 묶여 공통의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연대한다는 것은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어제의 ‘선진적’ 인권개념이 오늘에는 ‘상식’이 되었다가 내일이면 ‘반동적’ 개념으로 전락할 수도 있으며, 그에 따라 새로운 급진적 인권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인권’에 대한 모든 비판은 더 넓은 ‘보편인권’ 개념으로 재구성되고 확장된다.”


위의 지적처럼 우리의 인권운동은 지금은 진보의 방향에 서 있지만, 언제고 진보일 수는 없다. 진보성을 상실한 운동은 운동으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할 때, 우리 인권운동은 진정 진보운동일 수 있을까? 다음 호의 주제는 왜 인권운동은 진보운동이어야 하고, ‘진보적 인권운동’은 가능할까를 고민하도록 하자. 다음 호부터는 필자의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제시한다기보다 많은 활동가들의 고민을 같이 나눌 수 있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을 새기면서 이번 연재를 맺는다.


“인권운동은 항상 ‘평등’의 땅을 굳건히 딛고 ‘자유’를 위해 싸움으로써 ‘이권운동’으로의 타락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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