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인권을 수호하는 기관이며, 근대법이 발전해온 과정은 곧 인권이 확장되고 또 그것이 법률적으로 보장받아온 과정이었다는 점이라는 것 등은 너무 당연해서 이제는 상투적이기까지 한 내용인데, 너무나 당연한 점을 어떻게 글로 풀어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비다수파 기관과 인권‘문제’
사법부는 ‘비다수파(非多數派) 기관’이라 불린다. 행정부, 그리고 국회 같은 입법부를 ‘다수파 기관’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조되는 말인데, 말 그대로 행정부와 입법부는 주권자인 국민 중 다수가 지지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기관이라는 뜻이고, 사법부는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물론 행정부와 입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서도 다수결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 것이 있지 않냐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그 본질적 속성상 기관이 구성되고 또 정책이 결정되는데 있어 다수결이 가장 근본이 된다는 점에서 입법부와 행정부는 ‘다수파 기관’이다.
이에 반해 사법부는 실제 국민 다수 여론이나 국민 일반의 가치관과 ‘상식’, ‘사회통념’에 따르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존재하지만, 다수 의견에 따라 움직이지만은 않는데 있다는 점에 사법부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권이 그냥 ‘인권’이 아니라 인권‘문제’가 될 때는 언제일까? 통상 인권의 문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상대로 일어나며 기왕의 사회질서나 사회통념에서 벗어나는 경우에 발생한다. 다수의 의사, 관습과 반하는 상황 또는 전체 질서의 유지와 반하는 상황에 이르면 인권은 ‘문제’가 되어 나타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주택가와 작업장에서의 CCTV촬영, 열손가락 지문날인 거부 등등. 사회적 다수가 용인해주지 않는 소수자의 권리, 사회적 약자의 이익이 사회적 다수자와 강자들의 이익과 충돌하기 시작할 때 인권은 이제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이 때 사법부는 이 ‘문제’상황에 처한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법의 이름으로 보호해줄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여론과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가치관, 사회통념을 근거로 사법적 결정을 내린다면, 실체적 정의와 인권을 오히려 사법부가 침해하게 된다. 그래서 사법부는 대중여론에 따르지 않는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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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여론으로부터의 독립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
사법부가 여론으로부터 독립적인 재판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참여연대도 그렇지만 인권운동단체나 노동운동단체 등도 판결을 하는 사법부에 영향을 주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좋은 판결이 나오면 환영 성명을 내고, 좋지 않은 판결이 나오면 비난 성명을 넘어, 여론을 형성하려 하고 법원을 향해 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의 항의를 생각해본다.
법원이, 정확하게 하자면 ‘법관’이 여론으로부터 독립하여 재판해야 함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양심과 법정신, 정의에 부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에 영향을 받아 다른 결론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보면 될 법하다.
그러나 그 뜻은 다수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그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으로 다수 여론에 가려져 있는 소수의 의견과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명제가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법관은 다수 여론에 가려지기 쉬운 소수의 주장과 권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귀 기울여 듣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지 않는 한 쉽게 들을 수 없다. 그들의 처지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체험해 본 경험이 없는 한, 그들의 목소리를 이해하는 것은 의식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에 비해 다수의 목소리와 사회적 강자들의 주장은 쉽게 들을 수 있다. 여론을 전달한다는 언론매체를 비롯해 사회적 강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전파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과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법관들도 사회적 지위에서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그들의 경제적 지위는 물론이거니와 권력 지위에서도 법관들은 사회적 강자이거나 강자들의 네트워크 속에 들어가 있다.
그런 법관들이 소수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며, 또한 비다수파 기관으로서 다수 의견에 반할지라도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게끔 하기위해서는 외부적으로 부단히 자극해 주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사법부의 구성원이 되도록 해야 한다. 법관을 대중선거로 뽑는 방법이 아니라 일정한 자격시험을 거쳐 하급심 법원의 법관을 뽑는 우리나라 실정에서 하급심 법원 구성에 시민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지만 대법관 구성에 시민사회의 의견을 제시할 길이 열려졌다. 추천절차가 없기는 하지만 헌법재판관도 그럴 수 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비다수파 기관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끔 대법원과 헌법재판관을 구성하도록 자극해야 한다.
폐쇄적 집단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
얼마 전 퇴임한 대법관 5명을 대표하여 퇴임사를 읽은 강신욱 전 대법관의 이야기는 사법부가 폐쇄적으로 갈 것인지 개방적으로 갈 것인지를 두고 걱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강 전 대법관은 시민사회단체가 판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법관을 진보니, 보수니 어쩌고 하면서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편해하고, 특정 판결을 디딤돌이니 걸림돌이니 이름 붙이는 것에 대해 불쾌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법원 밖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지 않을지 걱정된다는 우회적인 어법을 썼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불편해 했을까 싶다.
겉으로는 사법권 독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과연 판결에 대한 외부의 비판이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는 것인지 심사숙고했을지 의문이다. ‘사법권 독립’이라는 명제와 사법부는 비판의 ‘성역’이라는 생각을 혼동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사법권의 독립은 쉽게 말해 법관의 독립을 말한다.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법관이 양심과 법률에 따라서 재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법권의 독립이다. 이를 위해 법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재판사무에 대한 부당한 외압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한다.
새로운 판례는 앞선 판결이 가지고 있던 논리와 이유에 대한 비판과 극복을 통해 창조된다. 그리고 법학교육의 한 가지가 바로 비판적 정신을 기르는 것이다. 기존 판례에 그저 충실하기만해서는 훌륭한 판결과 법조인이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사법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법원이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전락하는 길이다. 법원의 판결이 진보적이니 보수적이니 하는 것은 학계에서조차 하나의 분파를 이루는 것이다. 행태주의 법학이 바로 그러한 한 흐름이다. 굳이 학문적으로 갈 필요도 없이 기존의 판례에 충실한 보수적 판결태도와 또 보수적 법해석, 그에 반해 기존의 판례를 극복하고자하는 진보적 태도와 진보적 법해석과 적용으로 법관과 판결을 그리고 사법부를 평가하는 것은 상식적인 방법이다.
이런 점을 강 전 대법관 같은 사람이 모를 리 없다. 혹시 법조계 내부, 좀 더 인심을 써서 법학계까지 포함한 유사업계에서의 비판과 토론은 인정하겠지만, 그 집단의 바깥에 존재하는 시민들의 비판과 토론은 듣기 싫다는 것일까?
강 전 대법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은 법원이 폐쇄적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들의 권위와 기득권, 관행을 유지하는 한 방편이라 믿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개방이 된다면, 기존의 법원의 시각과 다른 견해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폐쇄적 집단에는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새로운 주장이, 그동안 귀 기울이지 않았던 목소리가 울릴 공간이 없는 것이다. 기존의 가치관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므로 새로운 시각과 환경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외면당하게 된다. 개방적인 집단은, 비록 그들 자신이 사회적 약자 출신이 아니고 또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을 굳건히 지켜주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새로운 목소리와 주장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인권의 범위는 멈추지 않고 확장되어 간다. 그게 인권문제라면 사법부는 개방적인 집단이어야 한다.
세 가지 단상을 가지고 사법부와 인권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사법부가 비다수파 기관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은 곧 인권을 지키는 것이다. 인권운동과 사법감시는 이렇게 만날 수 있다. 처음 글을 쓸 때처럼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