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그는목숨 걸고자립 중

탈시설 장애인 허광훈 씨의 끝나지 않은 사투(死鬪)




굶어본 적 있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생활비 떨어져서 몇 끼니, 단식투쟁 하느라 며칠이란 말이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돈을 손에 쥐고도 굶어봤냐는 말에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툭하고 밀면 자빠질 것 같은 뇌성마비 중증장애인이지만 그는 강한 사람이다. 시설에서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살아남아 여기에 와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그렇다. 열세 살에 장애인수용시설에 들어가 12년을 시설에서 보내고 마침내 사회로 나와 이제는 장애인지역공동체 활동을 하며 다른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거들고 있는 허광훈(39세) 씨를 전국 장애인운동 활동가대회에서 만나 저녁식사 시간을 짬 내 인터뷰를 시작했다.


여섯 살 아이에게 닥친 불행


집에서 하다하다 안 되니까, 워낙 개성이 강하고 고집이 세어서, 두 손발 다 들고 결국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자기를 재활원에 보낸 것 같다던 그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접어들자 자기 밑에 동생이 여섯이라고, 그게 모두 자기와는 배다른 동생들이라고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대구시 장학사였다. 어머니는 나를 가진 줄도 모르고 감기약을 드셔서 내가 장애를 갖게 된 것 같다고 하셨다. 당시 우리 집은 앞마당에 널찍한 잔디가 깔린 이층집이었다. 아직도 그 잔디밭에서 비록 마음만은 자유롭게 뛰어 놀던 기억이 난다. 전동휠체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도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게 이름이 뭔지도 모르면서 영화에서 보고는 막무가내로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던 철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여섯 살이 되자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새어머니가 동생 여섯을 데리고 들어왔다. 숨겨놓은 아버지 자식들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머니와 새어머니 사이에도 여자가 둘이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술과 친구를 좋아하던 아버지였다.
내가 좀 컸을 때였는데 동생들이 하도 까불기에 본때를 보이려고 막내를 딱 잡고 한 대 후려쳤는데 앞니가 다 부러졌다. 아마 그 때 아버지가 나를 시설에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을까. 자기들은 두발로 걷고 뛰고 하는데 형이라는 게 네발로 기어 다니니까 얼마나 신기했겠으며 체구도 훨씬 작은데 형, 오빠 같았겠는가. 사실 그때만 해도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아버지나 새어머니도 말로 그냥 내가 형, 오빠고 아프니까 잘 보살펴줘라 하는 정도였다.


새어머니와의 관계는 물어보나마나. 그는 지금도 새어머니와 동생들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다. 결국 그는 열세 살에 집에서 불과 버스로 두어 정거장 떨어진 대구의 한 재활원으로 보내진다.


79년 12월 20일. 그 날짜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다. 아버지가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했는데 가보니 시설이었다. 처음에 사무실로 딱 들어서니까 원장과 총무가 있었다. “얘, 몇 호실 방으로 보내!”라는 말에 끌려가다시피 갔다. 갔더니 10평 남짓 될까 하는 방에 열세명이 빼곡히 바닥에 누워 있는데 숨이 콱 막혔다.
딱 드는 생각이 아버지가 왜 나를 이런 데 데려왔을까, 어떻게 이런 곳에 나를 보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기서 살아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2년 동안 시설에 있으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간 사람만 억수로 많이 봤다. 나도 나무로 된 빨래방망이로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아봤다.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살아남았다.


목숨 걸고 3년간 탈출을 준비했다


다행히 재활원 옆에는 특수학교가 있어 그는 그곳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특수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유로 ‘보치아’를 배우게 된다. 보치아는 중증장애인이 하는 볼링과 유사한 스포츠로 보치아 선수가 되면 감시는 받지만 잠시라도 재활원 밖을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죽기 살기로” 보치아를 했고 누구도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86, 87년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국가대표로 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에도 나갔다. 자만에 빠져서 서울올림픽 준결승에서 지고 4위를 한 것이 일생일대에 아쉬움이라고 한다. 한창 보치아 선수로 날릴 무렵이었을 86년, 그에게는 유일한 세상과의 끈이었을 아버지의 부음을 듣게 된다.


그것도 일주일이 지나서야 원장에게 들었다. 만감이 교차하는데 눈물은 안 나오고 눈앞이 캄캄해지더라. 원망스러웠고 미워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서 용돈을 주던 사람이었다. 재활원을 나와서 새어머니를 한 번 만났지만 그쪽에서도 산소를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아직도 내 안에 응어리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재활원에 있을 때 친어머니를 봉사오던 사람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찾아가지는 않았다. 지금도 만날 생각은 없다. 막상 찾아보니 이미 재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도 있는데 내가 나타나면 가정이 파탄나지 않겠나. 이제 예순 일곱이신데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인 86년, 그는 친구들과 재활원 비리를 캐려다 들통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생 가족들에게도 돈을 받고 정부에서도 돈이 나오는데 밥이며 반찬이며 모든 것이 너무 형편없어서였다고 한다. 몰래 쓰레기더미를 뒤져 서류들을 모으던 중 한 명이 배신을 하고 고자질을 했다. 그와 친구들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어지게 두드려 맞았다. 그리고 두 달 동안 햇빛도 못 보고 독방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는 고자질 한 놈이 아직도 재활원에 있다며 환한 미소를 보인다. 그리고 몇 년 뒤인 89년, 그는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다.


도망쳤다가 5분 만에 잡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데, 재활원으로 택시를 불러서 타고 나갔다. 정문에서 조금만 가면 고개가 하나 있는데 재활원을 나와 그 고개를 못 넘고 바로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다시 재활원으로 들어와 딱 안 죽을 만큼 맞았다.
그때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고 몰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3년 동안 준비해서 탈출에 성공한 거다. 우선 총무나 보육사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는 게 중요했다. 신임을 받으려면 100% 말 잘 듣고 아무리 비굴해도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했다. 방장을 맡아 우리 방에는 3년 동안 사고 한 번 안 나도록 독하게 굴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정말 못 되게 했다. 미안한 마음에 나중에 재활원을 찾아가 두 명을 데리고 나오기도 했지만. 오죽하면 아이들이 그때는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을까. 나에게는 인생이 걸린 일이었기에 정말 죽도록 노력했고 결국 용돈까지 받으면서 직원처럼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봉사 오는 사람 한 명을 사귈 수 있었다. 좀 친해지고 나서 오늘처럼 붙잡고 한 세 시간을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더니 막 울더라. 내 앞에서 그렇게 많이 우는 사람은 그 뒤로도 못 봤다. 그 사람 도움으로 결국 도망칠 수 있었다.
92년 5월 5일이었다. 어린이날을 택한 것은 직원들이 들떠있고 아이들과 공원으로 놀러가 경계가 허술해지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가서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했더니 두 말 않고 보내주더라. 그 봉사자에게 터미널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때 서울까지 차비가 6천 5백 원. 나한테는 딱 7천 원이 있었다.


탈출은 했지만 아직은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자유란 본디 누구에게나 똑같이 소중하면서도 모두에게 조금씩 다른 무게와 질감을 갖는 것인지 모른다. 보호자인 그의 아버지가 재활원에 그를 맡기며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썼고, 그의 주민등록증을 비롯한 모든 서류가 재활원에 남아 있는 탓에 그는 한참을 지나 관련 서류를 돌려받고서야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다.
나와 같은 장애인들이 스스로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구나 싶었다. 그것이 장애인지역공동체 활동의 시작이었다.



혹독한 탈시설의 대가


지역의 활동가들이 거의 도착을 했는지, 인터뷰 도중 활동가대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공지가 들려왔다. 인원을 체크해서 단체별로 벌금도 매긴다고 한다. 그가 속한 장애인지역공동체 박명애 대표를 직접 찾아가 양해를 구했지만 단호하다. “한 해에 한 번 있는 교육인데 빠질 수 없다.”며 일정을 마치고 하라는 것이다. 지당한 말이었다. 강당에는 벌써 100여 명에 가까운 전국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 모여 보기 드문 진지함으로 토론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가 찾은 자유의 혹독한 대가는 다행히 공식 일정을 마치기 한 시간 전쯤인 밤 10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왔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가고 싶었다. 서울에 빈털터리로 올라와 중증장애인이 뭘 할 수 있었겠나. 사실 탈출 준비를 하면서도 잠들 때면 몇 번이나 그냥 포기하고 재활원에 있을까를 망설였다. 시설에서 10년 넘게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몸이 길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막막한 일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와 청량리역 지하에 있는 은행창구 주변에서 엎드려 구걸을 했다. 7개월 동안 빵과 우유만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1년 반 동안 그렇게 청량리 여관에서 지내면서 돈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IMF 전이어서 벌이가 괜찮았다. 혼자였으면 정말 목돈을 만들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앵벌이여서 구걸로 모은 돈을 다 빼앗기고 월급으로 40만 원을 받았다. 잘 벌면 하루에 백만 원도 벌고 그랬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몰래 통장을 만들어서 빼돌린 돈을 바로 적금했다. 은행 옆에서 구걸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돌아오면 몸을 뒤지니까 통장, 도장 다 은행에 맡겨놓고.
바닥을 기면 온갖 매연을 다 마시고 여름이면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 몸이 버틸 재간이 없었다. 94년 봄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내려가겠다고, 대구 갈 차비만 달라고 했더니 앵벌이를 시킨 사람이 안 돼 보였는지 50만 원을 주더라. 곧장 은행으로 가서 그동안 모은 돈을 찾아 다시 대구로 왔다. 병원에 가니 폐결핵 말기더라. 몸무게가 30킬로그램 안팎이었다. 결국 그 돈은 치료하느라 다 써야 했다.


퇴원을 한 후 그는 다시 여관을 전전하며 동대구역 택시 승강장에서 껌을 팔기 시작했다. 이 일은 지금은 경기가 안 좋아 담뱃값 정도 밖에 수입이 안 되지만 한 때는 둘도 없는 생계수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택시 승강장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고 한다.


재활원에 봉사를 오던 아가씨였다. 재활원에서 처음 본 것이 스물두 살 때였는데 나중에서야 들은 말이지만 봉사를 많이 다녀도 나 같은 눈빛을 한 사람은 못 봤다더라. 그날은 반갑게 식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연락이 돼서 다시 만나게 되고, 사귀게 됐고 동거까지 하게 됐다. 하지만 결국 3년만인 99년에 헤어졌다. 그 동안 여관을 열 몇 번이나 옮겨야 했다. 그 여자 식구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때 들을 수 있는 온갖 욕을 다 들어봤다.
대구은행을 다니던 아가씨였는데, 번듯한 직장 아닌가. 어떤 부모가 가만히 있었겠나. 결국은 헤어졌고 술로 지새우다 위에 구멍이 세 번이나 났다. 하루는 죽을 결심을 하고 물 속으로 무작정 들어갔는데 턱밑까지 물이 차니 더는 못 가겠더라. 그 때 배운 것이 죽을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살자는 거였다. 인생은 모르는 거라지만 앞으로도 여자를 만나거나 가정을 가질 생각은 없다.


나는 보치아 감독이다!
죽기살기로 보치아를 했다. 그래서 88년 서울장애인 올림픽 대회 보치아 종목 국가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보치아 공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그는 3년 전 장애인지역공동체 활동을 시작하며 비로소 여관 생활을 청산하고 임대아파트에도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2002년 수능시험도 보게 된다.


아는 소장님이 소개를 시켜줘서 야학을 갔는데 거기에는 나와 같은 장애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구나 싶었다. 그게 장애인지역공동체 활동의 시작이었다.
내 꿈이 용인대학교에 입학하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거기에 보치아 지도자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장애인지역공동체에서 한 달에 한 번 보치아를 하는데 나는 감독을 맡고 있다.
용인대를 가려고 2003년 대구 한 고등학교에서 수능시험을 봤는데 2교시까지 보다가 도저히 못 견디고 포기했다. 장애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의자와 책상 탓에 허리가 아파 도저히 앉아 1있을 수 없었다. 단 한 곳뿐인 장애인 화장실은 시험장에서 150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10년 동안 이런 곳에서 장애인들이 시험을 쳤다고 한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바로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냈고 그 다음 해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마련된 곳에서 시험을 보게 하라는 권고가 나왔다.


그는 당장 대학에 합격해도 걱정이다. 생활에 쪼들려 임대아파트 관리비가 몇 달째 밀린 상태인데 등록금이며 이사비용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 그는 인터뷰 말미에 솔직히 지금이 제일 힘들다고, 이건 같이 활동하는 사람도 잘 모르는 사실이라며 어렵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떳떳하게 어머니를 만날 꿈을 결코 버리지는 않고 있다. 길거리를 기어 다니며 자신도 자신과 같은 자식이 있다면 아마 아버지처럼 시설에 보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그는 과연 탈시설이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그렇다고 답한다. 그런 그가 지금 또 다시 장애인에게는 더욱 비정한 사회, 그 가시밭길을 온몸으로 헤쳐 나가고 있다.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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