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오랜만에 둘이 마주 앉아 쌓여가는 소주병만큼이나 많은 대화를 나눈 자리에서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하긴 김대중은 이십 몇 년 전에 하마(이미) 대통령 해무쓰야 할 사람이다 아이가.” 말씀인즉슨, 1971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혜성처럼 떠오른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불과 95만 표 차로 고배를 마실 때, 당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도 개표에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표 진행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선거부정이 저질러졌고, 아버지도 김대중 후보의 표를 열심히 ‘피아노표’(개표요원이 손에 인주를 묻혀서 무효로 만드는 것으로 마치 열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은어)로 만드는데 일조하셨다는 겁니다. 그 날 아버지는 제게 일종의 양심선언을 하신 셈이지요.
제가 갑자기 그 때의 일을 떠올린 이유는 최근 멕시코 대통령 선거 이 후 선거 결과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첨예한 대립과 갈등 소식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땐 그랬었지’하는 역사 속 과거의 일들이 멕시코에서는 현재 가장 첨예한 사회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긴 혹시 모르죠, 우리에게도 언제 다시 오늘의 일로 되살아 날 지. ‘민주주의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에서도 2000년 대선에서 선거 정당성 논란이 빚어졌던 사실을 다들 기억하고 계시죠? 그래서, 이번 호 국제인권이슈에서는 지금 멕시코에서 일어나고 있는 당선자 논란과 전면재검표를 요구하는 대규모 천막농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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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한복판에서 한 달째 계속되는 천막농성
멕시코 수도 중심부의 레포르마(개혁) 거리 소깔로 광장과 독립기념탑을 잇는 약 10km 거리의 도로. 그 양쪽 차선에는 열여섯 개의 대형천막이 쳐져 있고, 과달루뻬의 성모마리아 상이 놓인 제단도 눈에 띕니다. 그 앞에서 허리가 구부러진 노파, 남루한 차림의 농부, 젊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수시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모여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신은 국민행동당의 편이 아니다!” 일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광장 옆에 자리 잡은 대성당으로 몰려가서 추기경의 출입을 막으려고 시도하다가 경비원들에게 거칠게 떠밀려 쫓겨나기도 합니다. 수천 명이 운집하는 집회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데, 장대비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치는 가운데 열린 어느 월요일 집회에 모인 군중들은 자리를 뜨기는커녕 흥에 겨워 춤을 추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비가 오네, 비가 오네, 그리고 사람들은 꿈쩍도 않네.”
위에서 묘사한 장면은 미국의 진보주간지 <카운터펀치(the Counterpunch)>의 현장취재 기사 중 일부를 재구성 한 것입니다. 기사에 나온 바와 같이, 지난 7월 31일부터 중도좌파인 민주혁명당(PRD)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의 지지자 수천 명은 멕시코시티 중앙 광장과 주요 도로를 점거한 채 한 달 째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브라도르 자신도 매일 천막에서 잠을 자며 직접 농성과 시위를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시민들이 꽉 막힌 도로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지만,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불편을 참아달라고 호소할 뿐 농성을 중단할 기색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농성을 하게 된 계기는 대통령 선거 후 발표된 개표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이유는 뭘까요. 자신들이 지지한 후보가 아슬아슬하게 지니까 분하고 억울해서? 먼저 지금까지의 과정을 잠깐 되짚어 보는 게 필요하겠네요.
‘깻잎 한 장 차이’의 승리?
멕시코는 지난 7월 2일에 대통령 선거를 치렀습니다. 선거 전까지 공개된 여론조사에는 오브라도르 후보가 집권당인 우파 국민행동당(PAN)의 펠리페 칼데론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줄곧 앞서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정작 개표를 하고 보니 칼레론 후보가 전체 4천 2백만 표 중에서 불과 0.57%에 해당하는 24만 4천여 표라는,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깻잎 한 장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개표가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2% 포인트 뒤지던 칼레론이 막판에 지지표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면서 기적적인 뒤집기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연방선거관리위원회(IFE)가 예비개표 결과를 발표한 4일부터 개표결과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애초 선관위는 표 차가 1% 포인트라고 발표했는데, 오브라도르 후보 측이 3백만 표가 아예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고 강력히 항의하자 1차 재검표를 통해 0.6%로 수정했고, 다시 진행된 2차 전산집계에서 0.57%가 최종 결과라고 발표했습니다. 재검표를 하면 할수록 표 차가 줄어든 거죠. 게다가 3백만 표 중에서 70만 여 표는 끝내 최종 집계에 포함되지 않은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오브라도르 지지세가 강한 선거구에서는 수천 명의 유권자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선거권을 박탈당해 투표 자체를 못했다는 의혹도 불거졌고, 3분의 1 가량의 투표소에는 아예 국민행동당쪽 참관인들만 있었고 그들이 직접 투표 절차를 관장하기까지 했다는 증언도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거기에 덧붙여, 칼데론이 연방선관위원장 루이스 까를로스 우갈데의 절친한 친구로 그의 결혼식 때 들러리까지 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관위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선거과정을 여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조작했다는 오브라도르 지지자들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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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발표 나흘 뒤, 민주혁명당은 이렇게 전국에서 불거진 의혹들을 정리해 무려 9백 쪽에 달하는 소장을 연방선거재판소에 정식으로 제출합니다. 그를 통해 민주혁명당과 그 지지자들이 요구한 핵심은 바로 ‘뽀토 뽀르 뽀토, 까시야스 뽀르 까시야스(voto por voto, casillas por casillas)’ 즉, 모든 투표소에서 나온 모든 표들에 대해 전부 다 재검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브라도르 측은 선거재판소의 결과가 나오기를 집에서 편안히 TV뉴스를 보며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우파인 제도혁명당(PRI)의 71년간의 장기집권과 최근 6년 동안의 국민행동당 집권기를 거치면서 선거재판소를 비롯한 사법기관과 법조인들은 보수우파 일색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주혁명당에 유리한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중적인 힘과 결집력을 보여줌으로써 전면 재검표 요구가 결코 패배자들의 생떼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정의를 원하는 민중들의 목소리임을 천명하는 대규모 천막농성과 사실상의 수도봉쇄라는 강력한 투쟁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죠.
패배한 자의 생떼가 아니다
이제 7월 31일 약 2백만 명이 모인 가운데 천막농성 ‘출정식’이 열리고 난 뒤의 전개과정으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일주일 뒤인 8월 7일 연방선거재판소는 전면 재검표를 주장한 오브라도르 측의 요구를 재판관 7명의 만장일치로 기각하고, 전체 300개 선거구 13만 여개의 투표소 가운데 9%에 해당하는 1만 1천 8백 39개의 투표소에 대해서만 부분 재검표를 명령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부분재검표가 이뤄졌고, 그에 대한 결과는 8월 말 현재까지 아직 발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8월 31일 재검표 결과를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나올 예정인데요, 만약 그 때 전면 재검표나 대선 무효라는 기적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9월 6일에는 칼데론이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로 공식 선언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적, 행정적으로 예정된 수순일 뿐입니다. 과연 수천 명의 천막농성자들이, 수백 만 명의 오브라도르 지지자들이, 아니 지금까지의 과정을 쭉 지켜봐 온 멕시코 국민들이 재판소와 정부가 발표한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지는 미지수입니다. 벌써부터 오브라도르 후보는 의혹이 풀리지 않는다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천막농성을 계속하겠다며 저항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멕시코 독립기념일인 9월 16일을 맞아 다시 한 번 멕시코 전국에서 백만이 넘는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결집하는 범국민대회(National Democratic Convention)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의 멕시코 혁명 과정에서 판초 비야의 북부군과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남부혁명해방군이 멕시코시티를 점령할 때 이후 약 구십 여 년 만의 일이 되겠지요.
오브라도르와 민주혁명당 입장에서 쉽사리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는 까닭은 거의 손에 쥔 듯 했던 승리를 선거부정으로 강탈당한 경험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난 1988년에도 표 누락, 투표함 강탈, 전산시스템 조작 등의 방법으로 당시 집권당 제도혁명당의 후보였던 까를로스 살리나스가 제도혁명당의 부패와 실정을 비판하며 갈라져 나온 민족민주전선(FDN)의 꾸아띠목 까르디나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적이 있었습니다. 까르디나스는 그 뒤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자, 학생, 멕시코사회당을 연합해 범좌파 연합격인 지금의 민주혁명당을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몇 년간 이어졌던 항의시위 과정에서 수백여 명이 살해됐고, 오브라도르도 원래 제도혁명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가 그 때 당을 떠나 중도좌파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수도 멕시코시티의 풍경은 폭풍 전야의 고요 같은 긴장과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심가에는 곳곳에 폭동진압 경찰들이 깔려있고, 의회 건물은 차량폭탄공격을 막기 위한 2미터 높이의 장벽이 설치되었으며, ‘7월 2일 여단’이라 불리는 정예부대가 장갑차와 물대포를 앞세우고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재판소 발표 이후 행여나 발생할지 모르는 대규모 대중폭동을 막기 위한 조치들입니다. 일각에서는 9월 1일 비센테 폭스 현 대통령의 마지막 의회 연설에 맞춰서 계엄령이 선포될지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독자 여러분들께서 이 글을 읽게 될 때쯤이면 어떻게 전개될 지 판가름 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저도 멕시코 대선 사태가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멕시코 올림픽을 12일 앞두고 지금의 천막농성장에서 멀지 않은 문화광장에서 취임을 앞둔 구스타보 디아즈 오르다즈 대통령이 동원한 군대가 항의시위를 벌이던 학생들 약 300여 명을 학살했던 1968년과 같은 비극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말이죠.
폭풍 전야의 멕시코는 민주주의의 기로에
그런 우려와 함께 제가 현재의 멕시코 대선 사태를 주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부정한 방법으로 이뤄진 권력의 강탈은 곧 민중들의 고통과 희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현대민주주의의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면적인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불가피한 한계에서 나온 차선책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극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대의제 민주주의 마저도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면 민주주의와 역사의 퇴보를 의미합니다. 정당한 방법을 통해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출현하지 않은 권력은 민중들의 더 나은 삶과 권리 보장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까닭이 없습니다. 오로지 권력과 그 주변부의 기득권 세력들에 속한 사람들끼리 부와 권력을 어떻게 나눠가질 것인가, 또 어떻게 영속할 것인가에만 혈안이 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세계 12위의 경제규모에 6위의 산유국인 멕시코가 빈곤층이 절반이 넘고, 해마다 수십만 명이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 미국 내 수백만 명의 멕시코 불법체류자 대열에 합류하는 이민자의 나라가 된 데는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과 낙후된 민주주의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의와 자유의 사상은 투표함보다 크다.”며 일찌감치 선거를 통한 변화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공언하고, 오브라도르를 “수치심을 모르는 악당”이라 비난했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까지도 자체적으로 수집한 증거를 공개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열에 나선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중남미 좌파운동의 흐름이 그러한 흐름을 차단하고 과거 자신의 뒷마당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미국과 부딪치는 지점에 바로 멕시코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미국 정보기관의 개입설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는데, 향후 그와 같은 설이 공식적으로 밝혀지든 아니든 간에 미국 정부가 집권여당을 어떤 식으로든 지원했을 거라는 사실은 뻔한 이치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한꺼번에 중남미 좌파라고 부르는 사람들 내에서도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멕시코의 민주혁명당과 오브라도르 후보가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성장을 통한 분배’가 아니라 ‘분배를 통한 정의’라는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신자유주의가 민중들의 삶에 부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현실인식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부족하나마 조금씩 대안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밟아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막 첫 발을 떼기 시작한 그 여정이 미국이라는 강력하고 지극히 편파적이며 일방적인 외부요인에 의해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게 제 짧은 생각입니다.
이제 원고를 넘기고나서 며칠 뒤면 9월로 접어듭니다.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백성들을 돌보아주었다는 과달루뻬의 성모마리아는 과연 누구를 위해 비를 내려줄까요? 이번 주는 아무래도 멕시코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쫑긋하고 있어야겠습니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