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이에요, 당연하지] 정치공간에서사라진 여성

“지금부터 **** 규탄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활동가의 규탄 발언을 듣겠습니다.”
“***대표님의 기자회견문 낭독이 있겠습니다.”



한 기자회견장. 플래카드를 들고 발언자와 회견문 낭독자, 사회자가 죽 늘어서 있다. 어? 근데 뭔가 이상하다. 뭐지? 뭐지? 그런데 한 편에서 기자들에게 열심히 회견문과 보도자료를 나눠주는 사람이 있다. 여전히 뭔가 이상하다. 뭘까?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내가 뭘 불편하게 느꼈는지 알았다. 발언자, 사회자, 낭독자들은 모두 남성이고, 보도자료를 나눠주는 사람만 여성이었다.


우리도 잘 한건 없더라


월간 <사람>의 창간호 표지는 경남 함양의 권수달 할머니였다. 여태까지 총 14권의 잡지가 만들어졌고 그 중에 인물사진으로 표지가 들어간 것이 10번. 창간호를 제외하고 표지 인물은 모두 남성이었다. 그간 <사람>의 표지가 항상 사회적 이슈와 관련한 인물들만을 찍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태생적/사회적 권리로서의 인권을 주장하는 잡지에서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이 자신의 얼굴로 인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해 <사람>편집진은 무척 야박했던 것이다.


단순히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인 편집/기획위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 편집회의 때 모이는 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반 수 정도가 여성이고, 재단 이사들의 여성비율도 꽤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잡지 내부에 쓰이는 사진 자료들을 보면 여성을 찾기가 상당히 어렵다. 거리에서의 활동들을 담은 사진이나, 투쟁현장, 심지어 쉴 권리를 표현하고자 했던 사진에서조차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을 찾아볼 수 있는 사진은 여성 투쟁사업장이거나, 여성을 인터뷰했을 때 뿐이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그들은 다 어디에 있나?


한 여성 선배활동가와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온 이야기 중 하나는 여성들의 정치적 공간에서의 입장을 잘 설명해준다. ‘누구도 힘들고 책임이 무거운 일을 선뜻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남성들에게는 해야 할 책임이 더 우선적으로 주어지는 반면, 여성들에게는 거절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다.’고. 이것을 여성들이 단순히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없어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단 활동가 여성들뿐만 아니라 ‘여성’은 사회적 공간에서 자신의 책임을 내세울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활동가’, ‘의사’, ‘교수’, ‘교사’라는 직업을 들었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대부분 남성이며, ‘여-’라는 접두사를 붙이기 전까지는 개별 직종에서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 ‘남-’의 접두사를 붙이는 직종들은 그리 흔치 않다. ‘간호사’나 ‘유치원 교사’정도일까?


최근 TV 광고 중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어느 회사의 섬유탈취제 광고다. 섬유에 밴 냄새를 효과적으로 없애주어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광고는 ‘깔끔하고 부지런한 주부’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아버지는 쾌적한 집안 환경을 만들어내는 부인을 보며 딸에게 한마디 한다. ‘너도 커서 엄마처럼만 해’. 이 말을 들은 주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대체 자기 딸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고작해야 남편에게 ‘하우스키퍼’의 역할로서 인정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여성의 가사노동 자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가사노동이 폄하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평가절하되는 노동의 구조가 재생산될 미래가 그렇게 상큼한 미소 한번으로 날려질 수 있다는 것이 의아할 뿐이다.


모든 것의 기본값이 왜 생물학적 성별로 결정되어야 하는가?


몇 년 전, 박근혜를 둘러싼 여성 대통령의 출현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여성들이 연대하여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응은 참 싸늘했다. 개인적으로 그 논쟁이 보여준 것은 현재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실질적으로 그 논쟁에서 중요했던 것은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를 뽑아야 한다는 저열한 정치적 수준에 대한 비난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주장이 등장한 배경에 대해 한 번의 해프닝으로 넘어가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간 여성운동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현재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써왔던 것을 상기해봤을 때, 예의 ‘박근혜 논쟁’이 있지 않았다면 진보진영에서 여성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현재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에서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당내 여성할당제를 적용하여 비례대표의 순위에서 양성 비율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당 대표가 여성이었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대권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진보진영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박정희의 후광을 업고서야 겨우 여성 아닌 여성 정치인으로 살아남은 박근혜조차 겨우 ‘여성’이라는 접두사를 간신히 붙인 당대표로 살아남는 판국에 말이다.


모든 사람이 다 정치적 공간에서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공간에서 밀려나는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앞에서 말했던 어느 선배 활동가의 이야기처럼,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이 밀려나는 쪽에 더욱 가까운 것은 여성들이 사회적, 정치적 공간에서 배제되는 것이 익숙한 방식으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현재 있는 여성활동가, 혹은 여성에게 산술적으로 정치적 책임을 부과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공간에서의 여성배제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성에게 정치적 책임을 부과하는 식으로 떠넘겨 놓고 못한다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여성에게 그 공간에서의 자기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아직 <사람>의 표지인물이 결정되지 않았다. 당연히 여성 사진이 게재될 것이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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