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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열린 집회는 수단 다르푸르 사태의 해결과 유엔 평화유지군의 즉각적인 파병을 촉구하는 집회였습니다. 알고 보니 밴쿠버에서만 열린 집회가 아니라 ‘다르푸르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이란 제목 하에 뉴욕, 런던 등 세계 30여 개국에서 동시에 열린 집회더군요. 참가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단체 활동가들보다는 저처럼 신문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찾아온 일반 시민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르푸르를 위한 캐나다 학생들’, 국제 엠네스티 캐나다 지부, 노동조합,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 등이 차례로 나와 각자만의 방식으로 주장을 펼치는 것도 흥미로웠는데요, 이를테면 여기서도 학생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다르푸르 문제를 외면해왔던 캐나다와 국제사회를 성토하는데 유대인공동체 지도자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차분히 준비한 원고를 읽어나가며 “무슬림정부가 기독교 주민들을 그렇게 탄압해서는 안 된다.” 뭐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역시나 20여 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수만 명이 숨지고 15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한 우간다에서 힙합 음악으로 청소년들에게 상처의 치유와 화합을 가르치는 활동을 했던 한 청년이었습니다. 흑인 특유의 억양이 강해서 그가 하는 얘기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우리 아프리카가 원래부터 야만과 폭력의 땅은 아니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인해 그렇게 내몰린 것이다. 아이들에게 평화가 무엇인지, 아프리카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 나는 오늘도 힙합을 한다.”며 부인과 함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랩으로 토해내는데, 그 진정성이 그대로 전달돼 온 몸에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두 개의 내전, 그리고 불안한 평화
집회를 마친 후, 10월호 국제인권이슈 주제를 다르푸르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날 참가했던 다르푸르 난민들과의 인터뷰는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주최 단체들에게 인터뷰 섭외를 위해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거나 자신들도 연락처를 알지 못한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수단 다르푸르 사태의 원인과 전개 과정,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에 대해 정리해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냥 수단 내전이라고 하는데, 최근까지 진행됐거나 진행되어온 내전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남북내전이고, 또 하나는 위에서 이야기 한 다르푸르 내전, 아니 학살입니다.
먼저 남북내전은 아랍계 무슬림들이 주로 거주하는 북부 지역을 근간으로 한 중앙정부군과 토착종교와 기독교를 믿는 아프리카계 흑인 반군 간에 벌어진 내전이지요. 1983년부터 시작된 이 내전은 2005년 1월, 알리 오스만 타하 수단 부통령과 존 가랑 수단인민해방군(SPLA) 의장이 남부 지역의 자치권 보장과 6년 뒤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 그리고 복수의 부통령직 중 한 자리를 수단인민해방군 측에 할당한다는 내용의 평화협정을 맺은 뒤 일단락됐습니다. 2005년 7월, 부통령이자 남부 대통령이었던 존 가랑이 의문의 헬리콥터 사건으로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때 폭동이 일어나고 긴장이 조성됐으나, 21년간 약 2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북내전은 지금은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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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과 250만이란 숫자의 무게
그 다음이 최근 몇 년간 국제사회와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다르푸르 학살입니다. 뚜렷한 대책은 없고 말만 무성한 채 말이지요. 다르푸르는 ‘푸르족의 땅’이란 뜻으로, 전체 인구 670만여 명 중에서 아프리카계 토착민들인 푸르족과 자가와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수단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다르푸르 사태는 수단해방군(SLA)과 정의평화운동(JEM)이라는 두 흑인 반군들이 토지 사용권과 농업용수 확보 등을 내걸고 2003년 2월, 관공서와 정부시설을 무장 공격함으로써 촉발되었는데,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는 아랍계 잔자위드(Janjaweed) 민병대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면서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말이 반격이지 잔자위드 민병대는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무차별적인 인종청소와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학살의 양상은 1990년대 르완다와 발칸 반도에서 저질러졌던 것과 거의 흡사한데,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흑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수단 정부군 전투기가 비 오듯 폭탄을 쏟아 붓습니다. 주민들이 폭탄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려는 사이 갑자기 낙타와 말을 탄 민병대원들이 몽고 기병처럼 들이닥칩니다. 그리고는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여성들은 끌고 가 집단으로 강간을 한 뒤 죽이거나 피투성이인 채로 외딴 곳에 버립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웃 마을에서는 살림살이를 챙길 틈도 없이 아이들 손만 잡고 허둥지둥 피난길에 오릅니다. 물론 딱히 갈 곳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아래서 마실 물과 변변한 식량도 없이 몸만 빠져나왔으니 얼마 못 가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합니다. 다행히 난민촌까지 살아서 도착하더라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호의 손길보다는 설사, 이질,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과 영양실조입니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지난 3년간 유엔의 공식 통계로만 7만 명, 국제구호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의 통계로는 최소한 30만 명입니다. 그리고 살인과 약탈을 피해 이웃나라인 차드, 이집트, 우간다의 난민촌 등을 떠돌고 있는 사람들이 어림잡아 약 25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도무지 그 숫자만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한국의 익산시 전체에 해당하는 생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구 광역시민 전체만큼의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면 그 참상이 어느 정도인지 좀 가늠이 될까요?
폭력의 정당화에 동원되는 종교와 인종주의
자, 그럼 이제 그런 참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짚어보도록 하죠. 위에서 수단 내전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사실 그 두 내전의 원인과 분쟁 당사자는 다르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땅덩이를 가진 수단의 인구는 크게 둘로 구분됩니다. 전체의 약 75%가 검은 빛이 도는 피부를 가진 아랍계 무슬림, 그리고 나머지 25%가 완전히 검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계 기독교인들과 토착 종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중앙정부를 차지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다수 아랍계들입니다. 정부군도, 잔혹하고 야만적인 학살행위로 악명 높은 잔자위드 민병대원들도 모두 아랍계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단 내전을 기독교도들에 대한 무슬림들의 공격이라는 종교 전쟁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또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흑인에 대한 집단적인 인종청소라는 분석도 전혀 부인하기 어려운 실상이긴 하지만, 사태의 애초 원인까지 설명해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해 내전을 조장하고 확대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정치세력들이 대다수 주민들에게 증오를 심어주고 폭력과 살인을 스스로 내면화, 정당화시키도록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 인종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활용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 단적인 근거로 1956년 독립 이전까지는 아랍계 무슬림들과 흑인계 기독교도들이 별다른 충돌을 빚지 않고 서로 공존하면서 살아왔었다는 걸 들 수 있겠습니다. 마치, 보스니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리스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들과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들이 서로 사이좋은 이웃으로 정겹게 잘 지냈듯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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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근본적인 원인은? 저는 식민지에 대한 서구제국주의의 분할통치 전략과 석유를 비롯한 자원 때문이라고 봅니다. “찢어서 통치하라.” 이것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직접 통치할 때 거의 성공전략 교과서 첫 페이지, 첫 줄에 나오는 절대 진리와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배경인 1994년 르완다 내전도 르완다를 식민통치하던 벨기에가 소수파 투치족에게 모든 정치, 경제적인 권력을 몰아주어 다수파 후투족을 대리통치하게 함으로써 내전으로까지 비화됐던 것처럼 수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99년부터 1956년까지 수단을 식민통치한 영국은 북부의 아랍계들에게 대부분의 권력을 집중시켰고, 사회간접시설과 경제 개발도 북부지역에만 편중시켰습니다. 반면, 남부 지역 주민들은 부의 분배와 개발에서 철저히 소외되었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선교사들이 대거 파견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손에 쥐어준 십자가와 성경책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56년 영국이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시절의 불평등한 지역차별 구조는 전혀 바뀌지 않고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당연히 남부 흑인들의 불만이 쌓여가게 되었고, 결국은 반군을 조직해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반면 기득권을 나눠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아랍계 통치자들은 인종주의와 종교를 이용해 주민들을 선동함으로써(“흑인들이 몰려온다. 기독교도들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민병대를 조직하게 하고 학살의 공범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지금에까지 이어진 것이지요.
영국이 씨앗을 뿌리고 석유가 키우는 추악한 전쟁
그 다음, 석유를 비롯한 자원의 소유권과 개발 이익 배분의 문제입니다. 수단의 석유 매장량은 확인된 것만 약 6억 배럴, 추정 매장량은 약 30억 배럴에 이르고 현재 하루 약 30만 배럴에서 50만 배럴까지 생산하는 사하라 사막 이남에서 3위의 석유 수출국입니다. 석유 이외에도 우라늄, 구리, 금 등의 광물자원도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원들 중 상당수가 남부와 서부에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전의 피해지역인 바로 그 남부와 서부(다르푸르) 말입니다. 아프리카계 흑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땅에 묻혀있는 자원을 퍼가서 북부 사람들 배만 불리고 자신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고, 북부 아랍계들은 흑인 반군의 무장투쟁으로 자신들의 부가 줄어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물론 그것도 소수 기득권 세력의 얘기겠지만) 대량학살이라는 최악의 방법을 동원해 반란의 나무를 그루터기 째 완전히 뽑아내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석유 자원을 둘러싼 다툼은 단지 국내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죠? 제가 지난 13호(월간 <사람> 2006년 7월호) 나이지리아의 니제르 델타 지역 이야기에서도 언급했었는데, 미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중동과 중남미를 대신해 아프리카로부터의 원유 수입 비중을 현재 18%에서 향후 10년 내 25%까지 끌어올릴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즉, 수단으로부터의 안정적인 석유확보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진 것이지요. 비단 미국뿐만이 아닙니다. 프랑스, 영국 등 서구 선진국들도 아프리카의 자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아프리카에 대한 대외원조 금액을 대폭 늘리는 등 활발한 구애를 펼치고 있는 중국은 수단에만 이미 40억 달러를 투자해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해주고 있습니다. 그 대가로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수단 내 1,506㎞에 달하는 송유관 건설을 따냈고, 수도 하르툼의 정유공장을 비롯해 유정 6곳을 보유하는 등 중국은 이미 상당한 석유 지분을 수단에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작년 9월 유엔 안보리가 수단 제재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산시킨 나라가 중국이었고, 지난 8월 31일 역시 유엔 안보리가 2만 명 규모의 유엔평화유지군을 파병하기로 한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도 러시아, 카타르와 함께 기권표를 던진 나라도 중국이었습니다.
‘인도적 개입’을 믿을 수 없지만
이걸 토대로 제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구성해보면 이렇습니다. 다르푸르 내전과 대규모 학살이 시작된 시기는 2003년 2월입니다. 그 시기는 미국과 영국 등이 이라크 전쟁의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을 때죠. 그러고 나서 지난 3년여 간은 그렇게 많은 목숨이 스러져갔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침묵, 방관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만 해도 버거운 판에 아프리카에까지 개입할 여력이 없었던 거죠. 그 틈새를 중국이 비집고 들어가 이익을 챙겼고요. 그러다가 ‘이거 이러다 중국에게 아프리카를 다 내주겠는 걸’ 하고는 정신이 퍼뜩 든 겁니다. 그래서 뒤늦게 인도주의 운운하면서 안보리를 활용해 평화유지군을 파병합네 하고 나서게 된 것이지요.
저의 고민과 딜레마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다르푸르에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한다는 결의안을 주도하고 자국군대를 보내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미국, 나토의 유럽 국가들, 일본, 러시아의 주된 관심사는 다르푸르인들의 생명보다는 석유와 광물자원이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교적 발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엔 평화유지군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도 당장 학살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 전염병과 기아, 물 부족 속에 기약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수백만 명의 난민들의 생명을 보호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조차 없는 상황에서 유엔평화유지군은 그거라도 잡아야할 지푸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발 국제사회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며 갓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유엔 사무총장의 이름을 따서 ‘코피 아난’이라고 지었다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에서는 그러한 절박함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걸 믿지 않습니다. 소말리아에서도, 코소보에서도, 그리고 북한과 이란에 대한 정치공세를 벌일 때도 항상 인권과 인도주의적 개입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소재에 불과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이번 다르푸르 사태와 같은 긴박한 분쟁과 인도주의적 재앙을 막기 위한 수단이 촌티가 좔좔 흐르는 파란 모자를 쓴 군대 밖에 없는 것일까요?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