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하비비와 시나를 위하여

‘다름이 아름다운 인권교실’ 강사 박이스라르

'다름이 아름다운 인권교실' 강사 박이스라르

이번에 왔다 가신 박이스라르 선생님과의 수업이 재미있었다.
짧았지만 아주 많은 내용을 배웠기 때문이다.
새로운 옷도 입어보고, 새로운 인사법도 알게 되고
… 우리나라의 카레와 비슷한 요리도 먹어보았고
이렇게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고 차별하는 우리나라 어른들이
왠지 바보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국인노동자라고 평소에 불렀는데
설명을 듣고 나니 얼마나 나쁜 뜻인 줄 알았고
이제는 외국인노동자보다 이주노동자라는 말을 써야겠다.
그리고 박이스라르 선생님이
욕을 친절한 말인 줄 알고 다른 사람한테 했지만
그것은 박이스라르 선생님 잘못이 아니라 한국 사람의 잘못이다.


- 인권배움터 어린이 인권교실 후기 중에서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사이트 자유게시판)


박이스라르 씨에게 생업은 따로 있다. 벌써 5년 넘게 철거지역에서 고철을 수집해서 파는 일을 하는 그는 자영업자다.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서는 본업을 포기하고 일주일에 네댓 번이나 초등학교에 가야 하는 정도로 잘 나가는 인권교육 강사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다문화를 체험하고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알려주는 ‘다름이 아름다운 인권교실’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94년 파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와서 한국 여성을 만나 결혼했고 얼마 전에 한국 국적까지 얻은 두 아이의 아버지이다.



파키스탄에서 온 한국사람


우리 집은 파키스탄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한 시간 쯤 떨어진 농촌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주로 밀농사를 지었죠. 아들 여덟, 딸 셋인 집안에서 저는 열 번째로 태어났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도 잠깐 다니고 호텔에서도 일을 했어요. 그러다 돈을 좀 더 벌고 싶어서 한국에 오게 되었죠. 88올림픽으로 파키스탄에 한국이 알려지기 시작했거든요. 대사관에 전화해서 책도 빌려 읽고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했죠. 한국에 가서 일하면 한 달에 2만 루피아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당시에 그 정도면 파키스탄의 장관 월급 정도 되었거든요. 서른 갓 넘은 나이에 한국으로 왔죠.


한국에 온지 불과 서너 달 만에 그는 지금의 부인인 박영금 씨를 만났고 2년 가까운 연애 끝에 96년 결혼을 했다. 둘은 ‘우정’이란 뜻의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 하비비와 ‘이어준다.’는 뜻의 여섯 살짜리 딸 시나를 키우고 있다.


일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버스정류장에서 처음 와이프를 봤는데 말을 걸어보고 싶었어요. 아마 저녁 8시쯤 되었을 때인데 몇 시냐고 말을 붙였죠. 와이프도 당시에 영어를 좀 했거든요. 한 십분도 넘게 아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고 다음에 또 만나고 그래서 연애를 하게 되었죠.
그때는 국제결혼이 많이 없었죠. 와이프 큰 언니, 지금 처형이 많이 반대했어요. 왜 외국 사람을 만나서 고생을 하려고 그러냐? 그 나라에 대해 네가 뭘 아냐? 파키스탄 말도 모르면서 거기 가면 무슨 일을 할 거냐? 우리 집에서도 큰 형이 반대를 많이 했어요. 여기 파키스탄 여자랑 결혼하라고. 파키스탄은 부모님들끼리 결혼시키기로 약속도 하고, 그래서 얼굴도 모르고 결혼을 하기도 하죠. 저도 파키스탄에 결혼할 여자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저랑 와이프가 우겨서 결국 결혼을 했죠.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다 이해가 되었고 다 좋아졌죠. 결혼식은 파키스탄에 가서 전통 결혼식을 했죠. 한국에서는 가족들과 간단하게 식사만 하는 것으로 대신했어요.
결혼해서도 파키스탄에 돌아갈 생각이어서 바로 귀화 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계속 미뤄왔죠. 집으로 전화가 와서 “박이스라르 씨 귀화 신청하세요.” 그러면 “나 한국말 못해요.”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그러다 재작년에 결국 귀화를 했어요. 와이프가 원했고 아이들도 한국에서 자라서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니 당분간은 한국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2주일 만에 귀화가 되더라구요. 와서 파키스탄 국적 포기하고 주민등록증 받아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날은 기분이 많이 안 좋았죠. 하지만 다시 파키스탄 가면 국적을 또 받을 수 있고, 그게 없어도 파키스탄에 사는 게 아무 문제가 없어요. 언젠가는 가야죠. 와이프가 가서 한국 오고 싶으면 또 오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못내 아쉬움을 갖고 포기해야만 했던 나라. 파키스탄은 어떤 곳일까? 이슬람 문화권, 인도와의 분쟁, 그리고 핵을 가졌다는 것 외에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파키스탄은 멋진 나라에요. 히말라야 산이 시작되는 아름다운 나라죠. 샹그릴라(영국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히말라야에 있다고 하는 낙원)도 파키스탄에 있다고 하잖아요? 여기보다 땅은 네 배 정도 넓고 인구도 세 배나 많죠. 파키스탄이나 이슬람 하면 사람들은 ‘빈 라덴’이나 ‘테러’를 떠올리는데 이슬람은 참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고 사람들도 그래요. 길바닥에 개미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물론 안 좋은 점도 있지요. 파키스탄 사람들은 약속 잘 안 지켜요. 그리고 느긋하죠. 그래서 여기 와서 많이 배웠어요.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무엇을 하든 끝까지 최선을 다해 하더라고요. 술을 마셔도 끝까지 마시잖아요.(웃음)


너는 왜 그렇게 생겼니?
하비비와 시나


파키스탄에 가서 살고 싶었던 것은 거기가 살기 좋아서란 이유도 있지만 사실 한국에서 살기에 너무 힘든 게 많았죠. “너 왜 이렇게 생겼냐?”, “아프리카에서 왔냐?” 이런 말들. “당신 아프리카 사람인가요?”하는 것과 전혀 다르잖아요. 나는 그렇게 차별을 많이 당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참 힘들었죠.
그래서 한 4~5년 고생해서 파키스탄에 가 살자, 그랬죠. 파키스탄에 있는 조카들이 공군도 되고 대학교수도 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더욱 아이들 데려가고 싶었죠. 하지만 결국 “아이들이 여기서 태어났으니 여기서 키우자.” “좀 힘들어도 우리 ‘화이팅’하고 나가자!”는 와이프 설득에 넘어갔죠.
한국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한국이 많이 당한 나라잖아요. 일본에게도 당하고. 그러니까 다른 민족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아마 10년 정도 더 있으면 외국 사람들 더 많아질 거예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달라져야 해요. 그래서 인권교육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내 아이들만 아니라 내 아이들과 같은 아이들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시작하게 되었죠.


그는 인권교육이 아들 하비비가 네 살 무렵부터 생각해오던 일이라고 했다. 네 살이 되니 피부색부터 아빠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일이지만 유치원에 보내고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강해졌지만 부인인 박영금 씨도 많이 울었다고.


하비비 마음고생이 제일 많았죠. 하지만 다행히 아이 성격이 너무 좋아서 지금은 아이들과 잘 어울려요. 모르는 아이들에게도 먼저 다가가고…. 우리 같은 가정에서는 정말 흔한 일이죠. 얼마 전에 하비비 또래 아이가 애들이 하도 놀려서 학교를 안 가고 싶다고 그랬대요. 한 4, 5년만 지나 아이들이 좀 크면 덜 힘들어지겠죠.
오늘도 학교에서 인권교육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물어봐요. 만약 우리 아이가 이 학교에 다닌다면 어떻게 지내겠냐고 말이죠. 다들 친하게 지낼 거라고 대답해요. 교육이 끝나면 달려와 안기고, 손을 잡아보고 “어, 따뜻하네.”하는 아이도 있고, 사인을 해달라고 조르기도 하죠. 아이들은 정말 순수해서 조금의 교육만 있으면 금방 달라저요. 그래서 어른들 잘못이 커요. 사회에서 차별을 하고 있으니 학교에서 아이들이 차별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먹고 살기 힘들고 일하기도 바쁘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돈을 조금 덜 벌어도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죠. 또 하비비가 자랑스러워해요. 아빠가 학교에서 수업을 하니까. 이제는 당당하게 이야기하죠. “하비비는 아빠 아들이니까, 아빠와 닮은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요. “누가 너는 왜 그렇게 생겼니? 하고 물어오면 우리 아빠는 파키스탄 사람이야.”라고 대답하라고 했거든요.


자랑스런 아빠를 만들어 준 인권교실
맨 오른쪽이 박영금 씨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인권교육에 참여했던 이들도 꽤 여럿이 있었지만 지금은 박이스라르 씨 혼자 남았다. 대부분 직장을 다니며 이 일을 병행하기 힘겨운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남들 앞에 서서 서툰 이국말로 교육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저도 쉽지는 않았죠. 그래도 시작하기 전에 센터(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사람들과 같이 열심히 준비한 덕택에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하나하나 상황을 만들어서 반복해서 연습했죠. 내가 이렇게 하자 기획을 해서 한 번 해보고, 보던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면 고치고, 오전에 이렇게 해보자 했다가 오후에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바꾸고 하면서.
40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어서 최대한 잘 보여주기 위해 시청각 자료도 많이 이용하고. 지금은 처음과도 많이 바뀌었고 내용도 더 좋아졌어요. 이제 같이 할 사람이 두 명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나 공장에서도 이런 인권교육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죠. 나는 하비비가 커가는 것에 맞춰서 앞으로도 중학교, 고등학교로 인권교육을 나갈 생각이에요.


용감한 가족을 만나다
박영금 씨 인터뷰
카메라에 그의 가족을 담기 위해 부천에 있는 박이스라르 씨의 집을 방문했고 거기서 시나와 하비비, 그리고 부인 박영금씨를 만났다. 그를 만나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용감해져야만 했던 박영금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사람을 만나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잔잔하게 다가왔죠. 처음 만난 사람 같지 않게 낯설지도 않았고. 그래서 외국사람이다, 이런 건 전혀 문제가 안 됐죠. 한국이 이렇게 힘들게 할 줄 그때는 정말 몰랐던 거죠.
당시에는 국적법이 지금처럼 바뀌지 않아서 결혼을 해도 석달에 한 번 외국을 나갔다가 다시 입국을 해야 했어요. 법무부로 출입국관리소로 전화하고 찾아가기도 하고. 이 사람이 월급을 80만 원인가 받을 때였는데 석 달에 한 번 꼴로 외국을 갔다 와야 하니, 어떨 때는 정말 비행기 표 값에 햄버거 사먹을 돈만 갖고 나간 적도 있어요. 그래서 가까운 나라 공항에서 잠만 자고 들어오는 거죠. 이게 말이나 돼요? 막 따졌죠. 어떻게 국민을 이렇게 괴롭힐 수가 있냐고. 그러면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오고. 왜 외국 사람이랑 결혼했냐? 귀찮으면 그 나라 가서 살란 말까지 들었어요. 오기가 생겼죠. 너무 힘들어서 이 사람은 아이들이랑 파키스탄에 가 있으라고도 했지만 도망치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래야 되나 하고 말이죠.
사실 우리들보다 아이들이 힘들었죠. 우리야 어른이지만. 하비비가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와서는 갑자기 아빠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 그동안 아이 마음에 맺혀있던 분노가 폭발한 거죠. 아빠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생겼고 그래서 놀림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렇게 될 때 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때는 많이 울었죠. 사실 유치원에서의 생활이 어떤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요. 먹고 살기 바빴고 조금만 고생해서 우선 경제적으로 생활의 안정만 시키자고 아등바등 살았던 때였죠. 그 일로 마음을 고쳐먹고 아이들 중심으로 살기로 했죠. 학교 근처로 이사하고 자주 학교에 가보고.
하비비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 학부형 모임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내가 선생님에게 가서 잠깐 말할 시간을 달라고 그랬어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앞에 나가서, 보다시피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와 약간 다르다, 그렇지만 여러분처럼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자식이다, 여러분이 말 한 마디를 어떻게 하고, 하비비 친구들이 하비비 이야기를 할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하비비 인생이 달라질 수가 있다, 뭐 이런 이야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덕분에 하비비도 잘 적응하고 시나도 하비비 키운 경험이 있어서 잘 자라고 있어요.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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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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