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서늘한 곳에서 유통되는 마지막 운동

인권운동에 대한 기대와 바람

얼마 전의 일들이 당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는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문화연대가 언제 인권단체연석회의에 가입했더라… 아마도 올해 여름쯤인 것 같다. ‘추천서’와 전체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알면서도 괜스레 심퉁 거렸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인권단체연석회의의 까다로운(?) 조건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인권’이라는 낱말과 개념이 심각한 불일치 상태에 놓여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누구나 ‘인권’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건만 어디에도 ‘인권’의 개념은 부족한 사회에서 인권운동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특별한 자격과 지위 그리고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방부의 평택 대추리 도두리 빈집철거에 맞서 인권활동가들이 평화망루 위에 올라 농성시위를 하고 있다.


이렇듯 특별한 자격과 지위 그리고 용기를 공인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상호간에 대한 끈끈한 애정과 활동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만 지속할 수 있는 절박함 때문일까, 인권단체연석회의의 분위기는 매우 독특하고, 이 독특함은 다시 사회운동 전반에 적잖은 활력과 선명한 성과들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올 한해 평택 투쟁에서 보여 준 인권운동의 연대는 어느 언론의 지적처럼 운동의 의미 자체를 새롭게 구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권운동이 국가 폭력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사회권 그리고 소수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관심과 개입의 영역을 확장해오는 동안 인권에 대한 지향은 이제 보편적 상식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를 ‘입심좋은 좌파 평론가들의 놀이터’로 이해하며 ‘그때 그 시절’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인권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은 끝없이 계몽되고 있다. 인권의 평균적 질은 괄목할 정도로 진전됐으며, 이 과정에서 인권운동이 했던 역할은 분명 지금보다 더 큰 목소리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과장된 ‘선전’이 인권의 신장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선전이 인권의 부재를 은폐하고 인권을 이미 보편화된 것으로 인식케 하여 역설적이게는 인권의 영역을 축소하는 과정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직시해야 할 것이다. 점진적으로 인권이 개선되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중요한 인권의 문제들이 개별화되고, 언젠가부터 국가/제도는 자신들은 더 이상 인권 침해에 가담하지 않으며, 인권 침해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우발적인 사건이거나 가치 지향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권’ 개념이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 정책에 포괄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인권 운동들이 인권 의제를 영역화하며 보편을 가로지르는 연대운동으로서의 인권운동이 아닌 전문가 운동, 정책 개입 운동으로서의 정체를 선택한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매우 중요한 인권의 영역으로 등장한 사회적 권리에 있어 인권운동이 보다 급진적 인권을 제기하지 못한 채 협의적 수준의 인권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단순히 한미FTA 협상을 저지하는 투쟁을 넘어 그 자체로 완전히 반인권적이라 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질주를 막아세우기 위한 인권운동의 전략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짧은 지면이었지만, 한 숨에 달려오지는 못했다. 마무리는 어쩔 수 없이 다소 진부하게 해야겠다. 많은 운동과 사람이 흘러갔다지만, 내가 아는 많은 인권 운동가들은 여전히 현실의 복잡한 모순과 질감에서 ‘때려박고’ 싸우는 진짜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내일도 오늘처럼 낮은 곳을 향하는 실천적 행동 그 자체로 힘이 되는 인권 운동이길, 소중한 선배들이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끝내 인권운동이 사회의 서늘한 곳에서 유통되는 마지막 운동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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