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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군사정권의 종언을 선언한지 오래고 국경의 해체까지 거론되는 이 세계 자본의 시대에도, 의연히 국민의례가 진행되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강요하는 시대지체적인 모습이 사법시험에서 다시 반복된다고 하여 새삼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저 국가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기계를 만들 뿐인 사법시험에 맹목적이고도 투철한 국가관이 거론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런 국가주의의 망령이 사회 도처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한미FTA는 그것이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지, 왜 국민들은 배제되어야 하는지의 의문보다는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단언 하나로 이미 정당화되어 버린다. 대중 집회에서 표출되는 민심이 무엇이고 그 속에 내포된 거대갈등이 어떠한지를 알기도 전에 국법 위반의 범죄가 거론되며, ‘국가법질서의 확립’을 위하여 포괄적 집회금지처분이 내려진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건 이라크파병 반대건 혹은 두발자유화건 관계없이 국가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집행하고 처단하고 낙인찍는 ‘묻지 마’식의 법률지상주의 또한 이로부터 연유한다.
이런 반민주적 행태의 밑바닥에는 실체 없는 허상으로서의 국가관이 존재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지 현실속의 권력관계나 이해타산을 은폐하는 도구로서만 나타날 뿐이다. 집권자가 스스로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를 거론하고, 독점재벌이 자신의 자본욕망을 은폐하기 위하여 성장을 말하고, 기득권자가 변화를 거부하기 위하여 안정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것을 “국가관”이라 이름 짓는다.
물론 법률을 업으로 삼는 법률가에 대해서는 더러 일정한 국가관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입헌국가에서의 국가관이란 이런 허상으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국가 즉, 공화국이어야 한다. 국민이 주인이 되고 국민의 의사와 참여를 바탕으로 국민을 위해 운영되는 공화주의의 국가의식이 바로 법률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국가관인 것이다. 법률가는 이런 국가의 실천을 위해 다양한 국민의식들을 수용하고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법률가의 사상이나 사고가 어느 한 틀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번의 사법시험은 역으로 예비법률가들에게 군사정권이 만들어 놓았던 획일적이고 관념화된 국가관을 반복 강요하려는 법무부의 반공화적 의지만을 드러낸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보안법에 맹목적인 법률가, 초강대국의 패권주의 세계전략에 매몰된 법률가, 계급사법에 충실한 법률가, 사회갈등에 무관심한 법률가를 만들고자 애쓰는 법무부의 조직의지가 여기서 대변되는 것이다. 민주적 개혁이 채 완수되지 못한 틈새를 타고 흘러나오는 반동의 현실이 우리의 일상을 누르게 될 미래의 암울함과 함께 말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