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의 법, 집시법
이 점은 집시법이라는 하나의 단행법이 어떻게 군사정권의 폭압적 권력행사를 가능케 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바탕으로 민주적인 의사형성을 가능케 하는 기본권이라는 점에서 그 토대는 동일하다. 하지만 정신적 자유에 방점을 두는 언론·출판의 경우와는 달리 집회·결사의 자유는 근대국가의 성립 이후,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적 지배체제에 대한 무산대중의 항변이라고 하는 정치적 의미가 더욱 강하다. 유럽의 경우 노동자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의 합법화 과정 또는 미국의 경우 이에 더하여 흑인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조직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대중집회의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기본권의 실질적인 내용이 충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집회·시위의 자유는 “헌법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관용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다원적인 열린사회에 대한 헌법적 결단”이라고 하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대의제민주주의의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간과되는 소수자-민중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표출하며, 이를 정치화시킴으로서 사회경제적 소수자들이 정치적으로 세력화할 수 있는 물리적·공간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독재정권들이 그 억압과 탄압의 타켓을 집회와 시위에 맞추어 두었던 것도 바로 이 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는 행위가 정치세력화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하위사회와 정치의 중간에 집시법이라고 하는 형식적 법영역을 설정하고 이를 법률관료를 통해 유효하게 통제해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집시법은 명백한 위헌 법률
여기서 1962년 집시법 제정 이래 집회·시위를 민주적 기본질서의 기초로서의 정치적 권리라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회질서와 안전이라는 목적에 종속되는 하위개념으로 설정함으로써 시민사회의 탈정치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음모가 드러난다. “집회 및 시위를 보호하고”라는 문구와 더불어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함”이라는 대항적 이익을 명시함으로써 실질적인 집회·시위 금지법으로 변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집시법이 신고제라는 형식으로 채용하고 있는 허가제이다. 실제 집회의 개최·진행의 자유, 집회에의 참가의 자유에는 허가제는 허용되지 않는다(헌법 제21조). 단지 질서유지를 위하여 집회 개최 전에 신고를 받는 것은 허가제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 경우에 따라 경찰행정청은 공중의 안녕이나 타인의 권리보호를 위하여 집회를 금지하거나 통제할 수도 있다. 이에 우리 집시법은 옥외집회의 신고제(제6조)와 경찰서장의 집회·시위 금지통고권(제8조)을 규정한다.
하지만 이런 원론적인 판단은 처벌부분에서 급선회한다. 집시법은 미신고집회·시위의 경우나 금지통고된 집회·시위를 강행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등으로 형사처벌하도록 한다(제19조). 통상적으로 신고제도는 행정질서의 확립을 위하여 운용되는, 부수적인 의무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출생신고나 사망신고의 경우에서 보듯 신고를 지체하거나 해태한 경우에는 과태료로 제재한다.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태어난 아기나 죽은 시체가 불법아기, 불법시체로서 무가치판단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집시법은 신고해태의 경우를 형벌로써 다스린다. 집회·시위의 과정에서 별다른 위법행위가 없다 하더라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처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더구나 미신고 집회·시위에 대하여는 경찰서장이 즉각 해산을 명할 수 있다(제18조). 요컨대, 신고제를 채용하되, 그 신고의 성격을 경찰서장의 재량에 달린 허가제의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인 집회·시위금지법으로 전용되게끔 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집시법은 이른바 ‘폭력집회’에 대하여 잔여 집회·시위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제8조). 이는 한미FTA 반대시위의 경우에서 보듯, 최악의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즉 ①이런 폭력이 경찰력과의 충돌 등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촉발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②집회·시위 중의 폭력은 일시적·부분적인 충동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③이러한 폭력이 발생하였더라도 그것을 주최자 등의 통제능력이라는 문제로 접근되어야 할 것을 집회 자체의 허·불허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과잉결부 내지는 과잉규제에 해당하여 그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규율방식은 명백히 위헌이다. 집회·시위 그 자체를 어떠한 위험인자로 추정하고 경찰청장의 재량만으로 얼마든지 이를 범죄로 선언할 수 있도록 한, 전형적인 허가제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집회는 헌법에 의하여 보장되는 민주적 의사표현의 한 방법이라는 인식보다는, 집회는 ‘사회적 필요악’이라는 관념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도된 담론정치
최근 집시법에 대한 가열 찬 공격이 계속되자 ‘평화시위를 위한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논의들이 고개를 든다.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두르며 뿌연 먼지 속에서 경찰과 힘을 겨루는 현장을 비추면서 교통체증을 불평하는 인터뷰가 중첩되는 TV화면을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시위문화’를 한탄하는 새로운 방식의 담론정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예의 시위문화론은 이렇게 강요된 연상작용 속에서 이제 집회·시위에 대한 사회심리적 거부감을 조성해 낸다. 최근 집시법을 보다 강화하고 시위진압을 위한 경찰병력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가시화되고 있음은 바로 이런 담론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위문화론은 집회·시위에 대한 본질적 왜곡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집회·시위를 민주시민의 인권이 아니라 사회질서와 경제적 효율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필요악 정도로 규정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회·시위는 인정하겠지만, 그것은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담론을 만들어내고 이 범위를 ‘초과한’ 집회·시위에 대하여는 단호한 조처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집회·시위는 필요악이 아니라 국가가 최대한 보장하여야 할 의무를 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이다(헌법 제10조). 그것은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희생을 치르더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존중해야 할 국민의 기본권인 것이다. 그래서 경찰병력으로 겹겹이 에워싼 벽을 뚫고 나가는 시위대의 물리력이 폭력이 아니라, 그 시위대를 가로막는 경찰병력 자체가 폭력이다. 주위의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확성기 볼륨을 높이는 것이 폭력이 아니라, 시위대를 고립시키는 차벽, 인벽이 바로 반인권적 폭력이 된다. 혹은 시위로 인한 교통체증이나 상인의 불편은 시위대가 배상하여야 할 고통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적 비용이다.
이에 평화시위는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다. 평화의 개념이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라는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집회·시위는 자신의 인권을 스스로 실천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여기에 폭력이나 불법이나 ‘문화’라고 하는 가치판단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정작 ‘평화’라는 수식어가 필요한 경우는 이 집회·시위를 바라보는 정부와 주위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이다. 그것을 금기시하고 필요악으로 폄하하고 ‘폭력적’이라는 수사로서 통제하고자 하는 바로 그 억압적 행위 그 자체가 반평화적이며 반민주적인 것이다.
출발은 집시법을 없애는 것에서부터
최근 20년간 우리 사회는 숨 가쁘게 민주화의 역정을 달려 왔다. 하지만 더러 인권의 침해와 사회질서를 혼동하기도 하며, 혹은 시장적 자유주의를 정치적 자유와 혼동하면서 정작 보호하여야 할 인권이 재산권에 종속되는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집시법의 태도는 이러한 오류의 전형을 이룬다. 그것은 집회·시위가 필요악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탕으로 경찰청 등의 행정편의주의를 결합시킴으로써 전체적인 위헌상태를 구성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경제중심적 사고틀은 물질적 생산성을 위하여 집회·시위로 표출되는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변태적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집시법 또한 마찬가지다. 교통의 소통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희생시키고 경제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 왔던 시민사회의 추동력이 이런 합법성의 이름 아래 시나브로 스러져 버릴 가능성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기서 새삼 집시법의 재개정을 말하는 것은 진정 무의미한 것이 된다.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반영하기 위한 법 개정작업이 결국은 개악으로 끝났던 지난 경험 때문만은 아니다. 바람직한 집시문화 운운하면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 또한 부질없다. 애시 당초 집회·시위의 ‘자유’는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이 모든 논의들을 처음부터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집시법을 폐지하라. 집회·시위의 자유는 신고제의 탈을 쓴 허가제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사회질서를 명분으로 가해지는 그 어떠한 억압도 집회·시위라는 인권과 친숙하지 않다. 그래서 이 집시법의 폐지는 인격의 실현과 민주의 실천이라는 헌법의 요청이 새삼 타당해지기 위한 최우선적 조건이 된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