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대한민국에서 ‘데모’란 무엇인가

유사 이래 공격받아온 집회시위의 사회적 의미


대한민국에서 데모하기


아버지는 말하셨다. “데모를 하더라도 앞장은 서지 마라.”
한국사회에서 ‘데모’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 데모가 요즘 사면초가로 내몰리고 있다. 물론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권과 언론자본의 무지막지한 공세가 자못 치밀하고 정교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데모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한다. 월간 <사람>은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20주년을 맞는 2007년, 한국사회에서 데모의 의미를 묻는다. 대한민국에서 데모란 무엇인가, 또한 데모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물론 여기 담긴 글 속이 아니라 거리에서 찾을 수 있을 테지만 그 길 찾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한민국에서 ‘데모’란 무엇인가
‘평화시위’는 정답이 아니다
의경 출신 김OO 씨가 본 ‘폭력시위’
국가인권위의 참 희한한 권고
집시법, 그 폐지를 향하여
민주주의만 빼고 다 바꾸자





데모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특정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다수인이 벌이는 집단행동으로서, 데모는 집단의사의 형성과 표현, 그것의 전달과 실현 등의 기능을 가진다.” 데모, 다른 말로 집회시위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도 원칙적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민주사회에서 데모는 사회구성원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며, 집회가 가진 여론 형성과 표현의 기능은 대의제도 아래서 더욱 중요해진다는 설명이다. 매스미디어가 소수의 수중에 독점되어 있는 현대와 같은 상황에서 데모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별도의 언론을 가지지 못한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옹호함에 있어 데모는 가장 중요한 수단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데모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선 구성원들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지칭된다. 그런데 문제는 데모의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원칙적 강조들이 데모에 대한 사회의 긍정적 인식을 그자체로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 | 참세상



데모는 더 이상 정의롭지 않다?


오래전 어른들로부터 이런 말쯤은 한번 씩 들어 봤을 것이다. “데모 하는 일이 있더라도, 앞에는 서지 마라.” 이 말엔 데모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통념이 잘 함축되어 있다. 데모에 대한 통념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데모는 한편으로 부패하거나 부정의한 정부에 대한 반대, 혹은 사회의 정의를 위한 보편적이고 올바른 행동으로 긍정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데모는 현행법을 어기는 행동, 그래서 주민등록부에 빨간 줄이 그어져서 신세망칠 수도 있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독재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의문이 팽배했던 시절, 혹은 대학하면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연상이 자연스러웠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래서 이야기했던 것이다. 하긴 하더라도 나서지는 말라고….


그런데 지금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제 데모를 사회의 정의를 위한 것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 그렇기 때문에 나와는 상관없는 짜증나는 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듯하다. 데모를 하더라도 꼭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도 뒤따른다. 택시를 타면 “합법적으로 요구하면 될 일을 왜 저렇게 난리는 치느냐”라는 운전기사의 입담이 귀를 때린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과거 ‘데모’가 가지고 있던 긍정적 상징들, 다시 말해 사회정의를 위한 보편적 올바름이라는 상징, 불편은 있지만 조금은 감수해야 하는 것, 데모는 현실의 규범과 법에 반기를 드는 것 따위의 상징들이 해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형식적 민주주의에 갇힌 데모


사실 언제나 국가는 데모와 같이 표출되는 시민들의 정치적 행위를 규제할 때 항상 시위형태(합법인가 불법인가)를 문제 삼고, 사회의 안정성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의미를 격하한다. 그런 의미에서 데모에 대한 요즈음의 사회적 시선을 두고, 국가와 언론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가 반영된 것, 혹은 국가권력과 사회운동 사이의 역관계가 반영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데모를 둘러싼 사회의 시선이 변화하고 있는 배경에 몇 가지 이유를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87년 이후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되었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 데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여하간 민주화가 진전되었다는 믿음은 데모로부터 민주화 또는 사회정의를 위한 보편적 행동이라는 의미를 상당부분 탈각시켰다. 87년 체제의 특징이 ‘형식적 민주주의는 진전’으로 규정되면서, 제도화된 민주주의에 근거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확대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정상적인 정당정치 구조도 완비되었고, 지방자치제와 같은 대의구조도 발달했으니, 정치적 요구를 이와 같은 제도와 틀을 활용하면서 관철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세를 얻는다.


90년대 이후 사회운동이 보인 일련의 제도화 흐름도 데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변화시킨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이미 90년대 중반 여성운동의 일부가 현실 제도 속으로 다수 진출하여 권력의 핵심에 포진했고, 또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노동자운동도 이런 제도화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노무현 정권에 변절한 운동세력이 다수 포진되는 현상을 두고 운동세력이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다는 이데올로기가 득세하기도 한다. 여하간 이런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운동세력을 과거 독재시절의 탄압받던 약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름대로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 이들을 바라보게 되고, 또 그런 한에서 이들이 벌이는 데모에 대해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보편적인 주장이 담긴 것이라기보다는 특정집단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행동 정도로 치부해버린다. 물론 이 과정에 보수언론이나 국가의 이데올로기 공세도 한 몫 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집회시위는 어떻게 변화해왔나


데모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의 변화들은 사회운동의 방식에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라는 믿음 속에서 사회운동의 상당수가 제도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슈를 주류화 하는 전략을 택하다보니, 데모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95년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여의도 국회 앞 집회를 상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데모는 정치적 요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여론화할 수 있는 공간에서 집회 주최자가 독립적으로 결정하면 되는 문제이지만, 여의도 집회의 증가는 사실 사회운동이 대중운동 그 자체의 발전보다는 법안을 중심으로 국회를 압박하는 방식의 활동에 치중하면서 나타난 현상은 아닌가 반문해본다.


2000년경에 등장한 1인 시위도 다시 되씹어볼 만하다. 사실 1인 시위는 새로운 시위문화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배경에는 90년대 이후 가속화된 대중운동의 약화라는 경향이 반영되어 있다. 1인 시위는 데모가 갖는 일차적 의미, 즉 ‘다수의 집단행동을 통한 여론의 형성과 표현’과는 한참 거리가 있고, 주로 언론에 기대어 이슈를 제기하는 활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조금은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대한 전면거부가 아니라 합법의 틀 안에 안주하는 운동문화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자성해본다. 이전의 가두시위가 집시법이 허용하는 합법의 틀 안에서 거리행진으로 바뀌었지만, ‘이게 걷기대회인지 뭔지’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내부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통제를 위한 국가폭력과 이데올로기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데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변화하고 또 사회운동의 방식이 합법주의적인 것으로 경도되어 가는 동안, 오히려 국가는 이런 상황을 조장 또는 활용하면서,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공격을 더욱 체계적으로 진행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정부로 일컬어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들어 이와 같은 현상은 더욱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두 정권은 데모에 대한 예의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을 조장·활용하면서, 90년대 이후 발달한 합법적인 데모문화를 선진 집회·시위 문화로 포장하고, 이 틀을 벗어나는 데모, 특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생존권적 저항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국가폭력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시기에만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집시법 개악이 두 차례나 이루어지고, 이와 때를 같이해 경찰폭력이 문제시되었던 것은 이런 상황을 반증한다.


2000년과 2004년에 각각 개악된 집시법은 집회시위를 마음껏 통제할 수 있도록 경찰의 권한을 확대했다. 예를 들어 집시법의 대부분의 조항은 “관할 경찰서장은 ~한 경우에 집회를 금지 또는 제한 통고 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즉 관할 경찰서장이 자의적으로 금지 및 제한할 수 있는 집회라고 판단하면 얼마든지 금지할 수 있도록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최근 경찰이 한미FTA 반대시위에 대해 ‘도심집회 금지’ 등의 방침을 내세웠던 것은 바로 이런 개악된 집시법의 조항에 근거한 것들이다.


집시법을 활용해 데모를 통제하고 있는 경찰의 문제는 심각하다. 경찰은 주로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저항을 제압하고 관리하는 데에 자신의 권한을 활용한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에 따라 발생했던 문제들과 연관된 저항들, 예를 들어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저항하는 노동자들, 노동의 불안정화에 저항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한미FTA 체결에 반대하는 노동자들, 빈민들,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개악 집시법을 빌미로 경찰폭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집회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집회에 나갔다가 노동자와 농민이 경찰에 두들겨 맞고 죽는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이 쯤 되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어떤 ‘데모’를 할 것인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데모에 대한 국가통제가 경찰폭력을 동원해 데모를 물리적으로 봉쇄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데모에 대한 사회적 규범을 강제하려 한다는 점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데모를 둘러싼 사회적 시선의 변화를 활용해 국가는 평화시위론, 선진 집회문화 등의 이름으로 데모를 둘러싼 룰을 만들려 하고 있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일체의 데모는 이제 범죄로 치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합법영역에 안주하는 사회운동의 데모방식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독재정권 시기 데모는 무엇보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데모 자체가 철저하게 차단당한 상황에서 집회와 시위를 성사시키는 것은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공간을 열었다는 것으로 자체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모를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들 속에서 이제 데모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데모를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아닌가. 국가가 정한 룰에 따라 합법영역에서 데모를 ‘성사’시킨다고 해서, 그 공간이 곧바로 정치적 공간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더 이상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공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회·시위와 같은 정치적 권리의 파괴를 동반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이 우선적으로 가져야할 관점은 신자유주의 반대에 데모의 자유와 같은 정치적 권리를 옹호하는 행동방식을 함께 결합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정부가 강제하는 합법과 준법의 영역을 넘어 집시법에 대한 전면적인 불복종으로 데모의 자유를 실천적으로 확보해나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새삼 소중하게 들려온다. 정치적 자유의 축소나 집회·시위의 자유의 억압이라는 결과에 대한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원인에 대한 투쟁과 결합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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