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당신의 삶은 얼마입니까?

[특집] 소비가 아니라 삶에 의해 조직되는 주거를 꿈꾸며


주거권, 뉴타운에서 길을 잃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치솟던 집값의 하락세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집을 위해 몇 억의 부채를 짊어지게 된 사람들이나 부동산 폭등으로 하루아침에 몇 억을 깔고 앉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집값은 걱정덩어리다. 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의 허탈감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이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비단 허탈감만이 아니란 사실이다. 집 없는 자의 설움은 설움을 넘어 삶과 생존에 대한 박탈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패의 투자대상이었던 집은 본래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조건이자 생활의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기초이고 그래서 집과 주거권은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인권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당신의 삶은 얼마입니까?
주거권, 공간의 공공성을 둘러싼 권리
집과 자립은 평등한 관계의 출발점
이 사회는 언제쯤 센스가 생겨날 런지
좌담 “주거권, 소유가 아닌 정주의 권리로”





귀농한 아빠와 엄마, 동생과 함께 스스로 자기 방을 지었던 열여덟 살 아이의 글1)을 귀농통문이라는 계간지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적이 있다. 지금이 2007년이니, 자신이 직접 지은 자기 방에서 3년차의 생활로 접어들었을 그는 올해 스무 살 성년이 될 것이다. 그의 글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직접 단칸집을 짓는 과정과 그 때 자신이 한 생각들을 또래의 밝음으로 재미나게 소개하는 내용인데, 그 일부와 다른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삶을 조직하는 것


내가 집을 짓는다고 하면 많이들 놀라신다. 물론 나도 내가 집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안하고 살았다. 그런 내가 선뜻 집 짓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보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우리 살림채를 지을 때, 언니 목수가 와서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그냥 ‘여자도 목수 일을 하는구나’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내가 집을 짓기 시작하는데 별 거리낌(?)이 없었고, 또 짓다보니까 그냥 지어지더라. ^^;


3년 전, 한 건축가 선생님이 건축과 1학년 학생들에게 하던 수업 중에 하시던 말씀이다. 자신이 십 수 년의 유학에서 돌아와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너, 어디 사니?”라고 물었더니, “나, 현대 살아.”라고 답하더란다. 요즘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혹은 부러워하거나) 대답이지만, 사람 사는 공간의 이름이 ‘아무아무 동’나 ‘무슨 마을’이 아니라, 기업의 이름으로 바뀐 사실이 당시의 건축가 선생에게는 무척 황당했다고 했다.


다른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오자마자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룬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전했다. 6년의 세월을 감옥에 있었는데 그 감옥의 방이란 것이 너무도 좁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작은 방을 넓게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던 친구가 찾은 유일한 해법은 ‘자신이 작아지는 것’이어서, 방안 육면체의 한 꼭짓점에서 자신의 몸을 가장 작게 웅크려서 가장 넓은 방을 누릴 수 있었다 한다.



감옥의 방과 손수 지은 흙집, 그리고 현대아파트. 감옥이 좋은 집이랄 수는 없지만 자연에 대하여 인간이 건조(建造)한 환경이라는 의미에서 그것도 통칭의 집이라 치고, 감옥에 있었던 그분과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집을 지어낸 아이를 건축가 선생님의 정의를 빌어 표현하자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직(組織)’한 사람들이다. 건축은 건물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을 조직’하는 것이라는 건축가 선생님의 정의를 따른 것인데, 그것이 삶으로서의 의미에 충실하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직하기. 집에 산다는 것, 즉 ‘주거(住居)’에 대한 생각의 시작점은 그것이다.


삶을 ‘소비 당하다’


초라하고 작은 집이라도 그곳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의 뜻을 머금은 이름을 주고 나무판에 새겨 걸던 우리가, 언제부터 기업이름으로 집 이름을 대신하였을까? 말하자면 대량생산되는 주택상품의 등장 시기인데, 우리나라의 주택정책 역사를 소개해 놓은 연구2)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후의 자본, 기술, 자재의 부족 등으로 인한 소량의 주택공급 시기를 거친 후, 주택건설이 수익성 사업이 되는 60년대 말, 70년대 초 이후이다. 그 뒤 약 30년 만에 집이 기업이름도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상표를 가진 시대가 되었다. 직접 집을 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를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우리에게 집은 이제, ‘짓는’ 것이 아니고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는’ 것이다.


서울의 난곡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해서 철거가 이루어진 후, 옆 동네로 겨우 이사한 공부방의 아이들에게 살고 싶은 집을 그려보라고 한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인 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동그란 방과, 또 수없이 많은 감시카메라를 세운 담장으로 둘러싼 그 아이만의 영토가 있다. 철거를 당해 이웃마을의 지하단칸방으로 옮긴 경험을 가진 아이에게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城)이 필요했나보다.


사실 주택공산품 중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의 구성은 내장재와 방의 개수만 다를 뿐 방, 거실, 베란다, 주방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큰집이 조금 다른 건 남는 면적에 옷방과 술집을 흉내 낸 ‘홈바’나 욕실에 작은 사우나 정도 더 있는 차이랄까? 넓고 비싼 아파트에서의 생활이 다를 것 같지만, 공간구성에서는 작은 집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똑같은 주택상품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살 공간을 어떻게 구성해야 나의 생활을 잘 담을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더 나아가서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도 옅어졌다. 다만 거기서 거기인 생김새를 가진 아파트들 중에서 나중에 집값이 떨어지지 않을 곳에 빚을 지더라도 하나 사두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제, 그런 많은 집들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살 능력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불안함과 우울함, 울분이 사회나 집 없는 개인에게 똑같이 가장 큰 고민이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미 집이 있는 사람이라도 더 비싼 주택상품으로 옮겨가기 위한 주의를 게을리 할 수 없다. 때문에 주택상품을 사기 위한 평생의 노력이 계속된다. 집을 바로 주는 것도 아니고 겨우 살 수 있다는 허가뿐인데도, 그것도 모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추첨하는 것인데도 정부가 씀씀이를 좌지우지하는 청약에 들고, 큰 집 마련 재테크를 하기 위해 자신이 바라는 삶을 희생해가면서, 수입의 대부분을 집에 몰아넣는다. 그것은 집을 위해서 사는 삶이다. 집을 사려면 18년이나 쓰지 않고 일만 해야 한다는 흔한 통계는 그것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 조직되어야 할 대상인 집에 되레 우리의 삶이 ‘소비’당하고 있다.


앞의 집 지은 이야기를 글로 쓴 아이의 아빠가 ‘못 찾겠다, 꾀꼬리’ 노래가 유행할 시기를 겪은 세대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딸에게 물었다. 아빠세대의 아픔의 이유와 상황이 다른 너희들 세대의 아픔은 없지 않느냐고. 딸은 그 때 아빠에게 했던 대답을 다음과 같이 글로 옮겼다.


어른들은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라고 하면서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파는데 주력하지 않는지, 그래서 우리세대는 아픔은 없을지 몰라도 ‘소비 당하기’ 때문에 좀 공허하지 않을까 싶다고.


재주넘기 투기를 하지 않는 한 가능성이 적지만, 우리가 집을 위해서 포기한 우리의 삶이 돈으로 환원되고 성공적인 변태를 거듭하여 비싼 집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제 아무리 비싼 집이라고 해도 그동안 희생한 한번뿐인 삶과 가격을 견줄 수 있는가? 주택상품에 얽힌 지금의 굴레를 우리가 없애지 못한다면, 우리가 마련한 집이 비쌀수록 우리 삶이 더 많이 소비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묻자. 집 때문에 소비당한 당신의 삶은 얼마인가?


상품이 아닌 집과 동네를 만드는 일


서울의 난곡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해서 철거가 이루어진 후, 옆 동네로 겨우 이사한 공부방의 아이들에게 살고 싶은 집을 그려보라고 한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인 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동그란 방과, 또 수없이 많은 감시카메라를 세운 담장으로 둘러싼 그 아이만의 영토가 있다. 철거를 당해 이웃마을의 지하단칸방으로 옮긴 경험을 가진 아이에게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城)이 필요했나보다.


집값과 전세, 월세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는 우리나라의 요즘 사람들이 가진 바람도 본질적으로는 그 아이의 바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것. 주거권3)을 사회권 혹은 인권으로 인정하기를 각국 정부에 권고하는 국제사회의 주거권 정의에서도 가장 먼저 ‘점유(占有)의 안정’이 꼽힌다.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물리적으로 존재할 공간을 보장하는 것이고, 지금 살고 있는 데서 적어도 쫓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집을 절대적인 상품으로 여기는 것이 그것을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 물리적인 공간만 마련되었다고 해서 완성되지는 않는다. 빤한 말로 그 뜻을 정의하는 것이 무모하다고 할, 삶의 의미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내가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혼자 또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상의 모든 생활을 의미 있게 누린다는 말이다. 배우고 일하며, 소통하고, 치료받고, 안전해야 한다. 그런 모든 생활을 담는 것은 ‘주거’가 존재하게 되는 집과 집들이 모인 일정한 지역이며,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공통으로 축적된 기억들이 삶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그래서 주거는 주택만이 아니라 교육, 노동, 복지, 환경, 의료, 보건, 문화와 자치까지를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연결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주택상품의 가격이 낮아지는 것이 자신의 생활을 조직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은 사람에게 주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주택을 보장할 수도, 부족한 주거의 근원을 없애지도 못한다. 그래서 집값이 낮아지기를 요구하는 것보다는 상품이 아닌 집과 동네를 만드는 것이 올바로 접근하는 것이다. 손수 짓는 집을 ‘상상도 안했던’ 아이가 자연스레 집을 지었던 것처럼, 스스로 생활을 조직하는 원래의 본성은 풍족한 주거를 만든다.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을 상품으로 만들고 그것이 우리 삶을 온전하게 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자신의 생활을 조직할 권리를 말살하는 현재의 질곡이다.

덧붙이는 말

1 「18살 여자아이의 내 집 짓기」, 김정현, 귀농통문, 2005년 여름, 가을, 겨울호. 2 「주택정책 반세기」, 임서환, 대한주택공사, 2002. 3 우리 헌법은 잘 지켜지지도 않는 ‘환경권’은 명시를 하고 있지만, ‘주거권’이라는 용어는 헌법과 그 외 어떤 법률에서도 법적 개념으로 명문화되어 있지 않다. 프랑스는 얼마 전 노숙인에게 국가가 최소한의 주거를 보장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불이행시 노숙인이 국가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청구권을 명시한 법률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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