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당신을 채우는 그의 빈자리

노들장애인자립센터 김영희 소장

지난 2002년 3월 3일. 늘 그렇듯이 이제 2회째를 맞은 서울DPI(서울장애인연맹) 장애인 청년학교의 수료식을 겸한 뒤풀이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한 장애인 활동가가 세상을 등졌다. 사인은 장애인 청년학교를 준비하면서 쌓인 과로에 의한 심근경색이었다.
그의 이름은 정태수. 89년 복지관의 비민주적인 운영에 항의하며 15일간의 삭발농성을 시작으로 같은 해 ‘장애인 복지법 개정’과 ‘장애인 고용촉진법 제정’ 쟁취를 위해 공화당사에서 12일간의 단식투쟁, 95년 노점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한 최정환 열사와 다음해 아암도에서 의문사한 이덕인 열사 투쟁, 그때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장애인 노동권 확보를 위해 제주에서 서울까지 한 달여 동안 이어졌던 96년 장애인 고용촉진 걷기대회 등을 벌였던 당시 서울DPI 사무처장. 그는 길지 않은 10년여 동안 장애인운동청년연합,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등을 비롯한 많은 단체에서 조직부장과 사무국장 등 궂은 일을 도맡아 왔다. 당시 서울DPI 부회장으로 함께 활동했던 김효진 씨는 어느 글에서 “3월은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었다. … 열사는 민주열사들의 묘역 마석 모란공원에 묻혔다. 하늘도 서러운지 그날 때 아닌 눈이 내렸다.”라며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의 죽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세상에 이제 열 두 살 된 딸 세린이와 부인 김영희 씨를 남기고 갔다. 그의 5주기 추모제를 앞두고 고인의 부인이자 현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김영희 씨를 만났다.



노래와 운동으로 맺은 인연



김영희 씨는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경증 장애를 가진 그녀는 내심 사회복지에 관심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서울에 있는 그럴 듯한 학교에 가야 한다는 권유에 못이겨 숙명여대 화학과에 입학한다. 애초에 전공에 관심이 없었던 영희 씨는 “노래패 죽순이”라 불릴 만큼 민중가요 노래패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고 ‘노래’를 계기로 정태수 열사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부탁을 했어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라는 곳이 있는데 노래모임을 만드는데 도와달라는 것이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나도 장애가 있지만 워낙 경증이라 장애운동이나 장애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물론 자라오면서 아이들이 따라오며 내 걸음걸이를 흉내 낸다거나 어느 할머니가 ‘너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며 무섭게 한 마디 하고 간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분명 무수한 차별을 받으며 자랐겠지만, 그때는 그게 차별인지도 몰랐죠. 그래도 분명한 사회적 시선을 느낄 수는 있었죠. 학교에서는 원만하게 지내왔는데 학교를 딱 벗어나면….
그때 남편은 장애인한가족협회 조직국장이었어요. 남편 입장에서는 열심히 장애인을 조직해야 했었으니까 나를 관심 있게 지켜봤겠죠. 어떻게 사귀게 됐냐구요? 한 1년 정도 지났을까, 한번은 영화를 후배들과 같이 보여준다고 하면서, 톰 행크스가 주인공으로 달리기를 하는 내용이었는데…, 아무래도 장애 문제에 대해 초년병들인 장애인들이니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영화도 보고 공부도 하며 이래저래 만남이 많았죠. 그러다가 먼저 관심을 표명하더라고요. 뭐 그러면서…. (웃음)
졸업은 안 했어요. 원래부터 전공에 관심도 없었고 노래운동과 학생운동을 하면서 졸업장을 딴다는 것에 별 의미를 못 느끼고 있었죠. 오히려 장애인한가족협회에 나가면서부터 서서히 장애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학생운동을 하면서 배웠던 지식들과 내가 처한 현실적 조건, 장애인 문제와 접근시키려고 내 딴에는 많은 노력을 한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장애의 문제를 사회적 약자의 문제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고.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장애인한가족협회에서 활동을 했죠.
결혼은 좀 사연이 많아요. 우리 집에서 반대가 심했거든요. 자기 자식도 장애가 있는데…. 부모님이 기대가 크셨다보니까 실망도 크셔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시골 분들이시다 보니 체면을 너무 중시하셨죠.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작용했어요. 장애인과 같이 살면 네가 맞고 살 거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저는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말리러 자취방까지 오시고 저는 가출을 하게 되었죠.



그 시기 남편은 수배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95년 3월 장애인 노점상으로 노점 단속에 항의하며 서초구청에서 분신을 한 최정환 열사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 생존권 문제가 막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거기에 같은 해 11월 또 다시 인천 아암동에서 노점투쟁을 하던 이덕인 열사가 의문사로 발견되면서 당시 장애인 생존권과 빈민장애인 문제는 장애운동에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던 시기였다.



활동하던 단체가 그때 당시에 장애인의 노동권 문제를 갖고 어떻게 해보자 이러던 곳이었고, 그 한 부분이 장애인 노점상 문제였어요. 계기가 된 것이 최정환 열사 투쟁이었죠. 그냥 막연하게 노동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하자,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조건에서 장애인의 노점을 확보하는 것은 분명 큰 의미가 있었죠. 그래서 청계천8가라든지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을 통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죠.
그러던 중에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에 애기 아빠가 결합했는데 그 지역에서 이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고소해서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었어요. 그게 제가 제주도에서 올라온 부모님을 피해 가출한 것과 맞물리면서 둘이 같이 수배생활을 하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경찰서에서 고소한 사람과 협상이 잘 될 것 같다고 연락이 와서 경찰서로 갔는데 그만 남편이 구속이 되어버린 거예요. 갑자기 제가 오갈 데가 없어져버렸죠. (웃음) 그런 상황에서 시부모님이 집으로 들어와라, 그래서 저는 들어가 살고 남편은 구속되어서 들어가 살고…. 남편이 한 달 좀 넘게 있다가 나와서 그때부터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죠.



정태수 열사가 남긴 것



동거를 해도 집에서는 계속 반대를 했어요. 아이도 갖지 말라고 하고. 남편을 인사도 시키고, 이 사람이 이러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열심히 살겠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죠. 그래서 뭐, 내 운명은 내가 찾겠다 하고 독립을 선언했죠. 가족과 인연을 끊은 거죠. 그리고 딸 세린이를 임신을 했어요.
활동을 하면서 먹고사는 문제도 참 중요했는데, 저는 최소한 생계를 유지하면서 활동을 해야 하지 않겠냐, 이런 요구를 남편에게 많이 했죠. 그때도 시댁에 도움을 받아야 했거든요. 그러던 차에 제가 만삭이 되었을 즈음 누구 병문안을 가다가 남편이 다리를 다쳐서 활동을 쉬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맡은 일을 박경석 대표(당시 노들장애인 야학학교 교장)에게 넘기고... 그때부터 2~3년간 인쇄물 기획사를 하면서 먹고 살았죠. 하지만 남편의 고민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서 후배들을 키우고 싶다는 거였어요. 결국 나는 이 길을 가야겠다, 내가 활동에 전념하는 것을 이해해달라며, 2000년 즈음 복귀를 해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죠.



활동을 재개한 정태수 열사는 서울DPI 조직국장 등을 거치면서 그렇게 바라던 장애인 청년학교를 개최하고 그 2회째를 치르다 갑작스럽게 떠나고 만다. 그녀에게 정태수는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옆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떠나고 나니까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남편은 자기 안에 강한 원칙이 있는 거 같기는 한데 그걸 잘 표현하지는 않았어요. 제 남편이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드러웠고 남을 먼저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줬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이런저런 요구를 많이 하고 일을 시키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대단한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장애운동에서 헌신적으로 역할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노들야학에 박경석 대표를 활동을 하게 만든 것도 남편의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죠. (웃음)
지금도 생활하는 것은 만만치 않죠. 여기서 활동비를 받고 추모사업회 지원도 있지만 많이 부족하죠. 그래서 시댁 도움을 받고 있어요. 그게 예전부터 지독하게 싫었는데 활동을 하려면 포기해야 할 부분도 있는 거 같아요.
세린이는 불만이 많죠.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으니까. 저녁 회의는 무조건 못 간다고 정해놨는데도 그게 그렇게 안 되잖아요. 아빠의 빈자리도 크겠죠.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 부분은 잘 받아들이고 있는 거 같아요.
남편이 죽으면서 제 가족들에게 배신감이 너무 많이 들더라구요. 뭐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이해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도 하지만. 내 가족이 남편을 인정해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도 상처로 남아있죠. 그런데 오히려 가족들은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니까 안타까움 때문이었는지 먼저 연락을 하더라구요. 그동안 인연을 끊고 살았는데…. 그렇지만 가족이란 것이 부정할 수만도 없는 관계여서 그때부터 오가고 있죠. 자주 가려고 하는데 여건이 잘 안돼요. 2년에 한 번 가나? 그래도 그때의 서운함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아요.



“활동을 하지 않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나서야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남편이 사회복지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으면 활동하기 좋다고 몇 차례 권유를 하기도 했지만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공부를 다시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노들장애인 야학에서 만든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소장으로 지난해 9월부터 활동 중이다.


노들야학은 장애인한가족협회에서 만든 야학이에요. 장애인 운동을 하면서 대중을 만날 기회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만든 거죠. 남편은 중증장애인이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제기를 많이 했어요. 장애인의 문제를 중증장애인 중심으로 풀어야 한다고.
자립생활이란 것은 비장애인에게는 아주 일반적인 일이죠. 성인이 되면 부모로부터 벗어나서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반대로 장애인에게는 평생 부모의 보호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예요. 남들은 당연한 일상인데 우리는 투쟁을 통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고 얻어내야 하는 것이죠. 사실 자립생활을 하려면 활동보조 문제만이 아니라 주거의 문제, 이동의 문제, 소득의 문제가 다 걸리는 거죠. 그러니 센터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명확히 한계가 있죠. 그래서 자립생활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정부나 지자체와 싸워서 제도화 하는데 주력을 하고 있는 거죠.
최근에는 자립생활을 지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부의 지원을 매개로 경제적 이익을 보기 위해 만드는 사람도 많이 생기는데, 우리는 그보다는 생존권을 획득하기 위한 권리로서 싸움의 이념이자 매개 고리가 되는 것이죠.
장애인 자립생활이 쉽지 않죠. 주거와 활동보조인 등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가족의 도움이나 지지가 없으면 이것이 해결되지는 않죠. 교육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가족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본인도 가족에게 그런 요구를 하기도 어렵고. 또 한 편으로 언제 연결이 될 지도 모르는 지원 프로그램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도 없고, 기본적으로 장애인이 자립생활을 한다면 그 과정도 본인이 나서서 길을 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저희 입장이죠.
그동안에는 장애인 문제에 고민하며 함께 하고 싶어 했고, 무엇이든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남편이 하니까 나 몰라라 했는데 막상 남편이 없고 보니 내가 남은 인생을 얘만 키우고 돈 벌면서 살아야 하나, 과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던 차에 애도 좀 컸고 여기 자리가 생겨서 활동을 다시 하게 되었죠. 그랬는데 부족한 게 많죠.



이제 얼마 있으면 정태수 열사 5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추모사업회에서는 매년 추모식에서 ‘정태수 상’을 시상해왔다. 장애인 단체에서 정말 싫어했던 ‘장애 극복상’들과는 다른 ‘정태수 상’은 몇 가지 기준이 있지만 “현장에서 열심히,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격 기준이다. 아마 그녀는 무수한 정태수 열사의 후배들을 심사하느라 이 상을 끝내 받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도 정태수 열사와 그녀가 바라는 것이리라.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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