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교실에서 국가는 떠나라

국익을 위한 교육이 가져온 획일화의 비극

국가주의 교육이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국가이익과 발전에 기여하는 인간의 육성에 두는 교육”이라 정의할 수 있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는 교육과 문화의 형태로 유지되고 재생산된다. 한국의 경우 역사적 경험 속에서 군사주의, 배타적 혈연주의, 남성가부장문화가 주요한 특징이며, 한국에서 교육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남성가부장문화의 바탕 위에 배타적 민족주의를 군사문화를 통해 체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교육은 이러한 문화의 유지, 재생산을 위해 획일화된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국가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주의가 학생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체득되는 것을 의미한다.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머리모양에 정렬된 책상


학교 현장의 일면을 재구성해보며 어떻게 국가주의가 학생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체득되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자.


난 작년 말부터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올 초, 중학교 신입생의 임시담임을 맡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조잘조잘 재잘재잘하며 임시로 배정된 학급에 모여 있다. 복장도 두발도 제각각이다. 울긋불긋 교실은 활기가 넘치고 다양한 개성들이 모여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다. 그런 학생들은 바라보며 3월에 입학하고 난 뒤의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모두가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바둑판마냥 가로 세로로 정렬 된-흡사 군인들의 도열을 연상시키는-책상에 가지런히 앉아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 오로지 충성할 것을 앵무새마냥 읊조리며,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는 무조건 해야 하고, 애국가는 나라사랑의 마음을 담아 불러야 한다. 닛뽄도(일본검)를 허리에 차고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서 천황 만세를 공부했을, 과거 일제시대의 교실 풍경과 무엇이 크게 다른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과도함일까?


명찰은 왜 꼭 달아야 하나? 교사가 학생의 이름을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서? 궁금하면 학생에게 이름을 물어 보고 기억하려고 노력하면 된다.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강제로 커밍아웃해야 하는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것도 같은 학년임을 드러내기 위해 같은 모양, 같은 색깔로 말이다. 군복의 명찰도 아니잖은가?


새 학년이 시작되면, 교실을 가꾸기 위해 소위 “환경미화”라는 것을 한다. 칠판 왼쪽에는 무얼 붙이고, 오른쪽에는 무얼 붙이고, 교실 뒤편 게시판에는 무얼 붙이고 등등이 친절하게(?) 종이에 그려져서 모든 담임들에게 배포된다. 그리고 모든 교실은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내용을 부착한다. 단지, 세부 내용과 색깔만 학생들의 몫이다. 그래서 모든 교실이 붕어빵이다. 군대 내의 획일화된 내무반 문화와 똑같다.


수업은 군대식 인사인 “차렷, 경례”로 시작한다. 학생은 아직 미숙하다는 전제로 인하여, 때려서라도 가르치려 한다. 때리면서까지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과정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 앞에 인권은 한낱 사치품으로 전락한다.


교실에는 국가의 교육과정만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고등학교 국어(상) 3단원에 ‘봄 봄’이라는 학습자료가 있다. 한국의 모든 고등학교 1학년들이 거의 같은 시기-1학기 중간쯤에 ‘봄 봄’을 배우게 된다. 다른 것을 배우면 안 된다. 왜냐면, 시험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이다.



비교육적인 획일화에서 오는 비극


교육부에서 나온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수학습지도안]에 따르면, 단원 설정의 의미부터 수업 목표, 교수-학습 전략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친절하게(?) 제시되어 있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된다. 학생과 교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오직 국가의 요구만이 있을 뿐이다. 한국의 학생들은 오로지 국가가 요구하는 것만을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성장발달에 따른 학습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다양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학생들은 같은 것을 같은 방식으로 배우고 같은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획일화는 국가주의의 전형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모두 국가가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명찰을 교복에서 떼는 것부터 시작하자. 교실을 아이들의 삶의 공간, 놀이 공간으로 만들자. 무엇을 공부할지, 어떻게 공부할지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가 함께 이야기하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것이 오직 하나의 미덕이 아닐 수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자. 차이가 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로운 것이라는 것을 교실에서부터 이야기하자.


그것이 싫다면, 교실에서 국가는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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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석 | 정왕중 국어교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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