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의 기쁨과 슬픔

무릇 모든 종교는 사람의 가치를 드높인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노라고 가르친다. 서양에서 인권의 개념이 창안되고 뿌리내린 이유를 기독교에서 찾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가치는 동양의 전통 종교에서도 또렷하게 나타난다.


뜬금없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잠시 드넓은 바다를 떠올려보기 바란다. 깊은 바다 속 숱한 생명 가운데 눈 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그 거북이는 100년에 한 번 꼴로 바다 위에 머리를 내놓는다. 넓디넓은 바다에는 구멍이 뚫린 통나무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거북이가 바다 위로 올라왔을 때 그 통나무를 만나면 잠시나마 구멍에 목을 넣고 쉴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문득 물음을 던진다.


눈 먼 거북이가 과연 통나무를 만날 수 있겠는가?


따옴표 없이 인용한 데는 의도가 있다. 자칫 특정 종교의 편견이 독자의 눈을 가릴 수 있어서다. 짐작했겠지만 눈 먼 거북이의 일화는 불경에 나온다. 물음을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붓다다.


붓다의 질문에 제자는 대답한다. “그럴 수 없습니다.” 실제로 광활한 바다에 떠다니는, 그것도 구멍이 뚫린 통나무를, 눈 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 물 위로 떠올라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다시 붓다는 의표를 찌른다.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저 거북이가 통나무를 만나기 보다 더 어렵다.”


사람의 존재 의미를 극적으로 드러낸 비유다. 불교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긴 윤회과정에서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기회’다. 그러기에 붓다는 “불꽃같은 치열함으로 정진하라”고 가르친다.
옳은 말이다. 다만 필자가 더 강조하려는 대목은 ‘불꽃 정진’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남의 소중함이다. 사람으로 존재하는 기쁨이다.


문제의 핵심은 우주의 귀한 존재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있다. 굳이 붓다가 살았던 시절의 노예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당장 오늘을 보라. 신자유주의의 미친 바람으로 사람의 가치는 시나브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 빈 공간으로 자본의 논리, 자본의 ‘가치’가 물밀듯이 파고든다. 천문학적 이윤을 남기면서도 이른바 ‘구조조정’이나 ‘명예퇴직’을 강요하는 저 자본의 탐욕을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가.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이 대낮에 이른바 공권력 손에 맞아 죽고 있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바로 이 지점에서 눈 먼 거북이 일화가 가르쳐주는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은 슬픔으로 이어진다.


바다 속 거북이가 떠다니는 통나무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 때의 기쁨은 분명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이다. 하지만 사람이 낡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실현해갈 수 없다면 그 자체만으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다. 사람의 가치를 사회적 맥락에서 떠나 상정하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다. 마땅히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새로운 사회를 일궈가야 옳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사람은 더불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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