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이런 치졸하고 악랄한 자본의 세상에

풀무원 노조 전 사무국장 박제동 씨

"맨 처음에 노동조합 설립하고 노동자대회 한다고 서울에 데모하러 갔어요. 전경버스도 처음 봤지, 텔레비전에서만 보다가. 그런데 보신각 종 앞에서 붙었어. 그때는 그게 붙은 건지 뭔지도 모르고 막 앞으로 두루두루 가다가 보니 전경들이 곤봉 들고 뛰어오는데…. 둘러보니까 다 도망가고 여자 둘이, 인숙이란 아가씨랑 나랑 둘만 남은 거야. 종각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보신각종 지나서 또 울타리를 넘어야 하는데 뒤에서 인숙이가 언니! 하고 부르는 거야. 뒤돌아보니까 걔 뒤에 바로 전경인데. 그래도 나 혼자 도망갈 수가 있냐구? 거기서 걔를 끌어댕겨갔구 옆 건물 계단으로 해서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갔어.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전경들에게 막 맞았어요. 커피숍에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진짜 고맙더라구. 창밖으로 내려다보니까 다 전경들이야. 거기서 한 시간 넘게 갇혀 있었어요. 그래도 다행히 안 맞아서 또 가구 또 가구 그랬지. 그때 맞았으면 다음부터는 서울에 데모하러 못 갔을 거야.”



바로 어제 겪은 일인 양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하지만 벌써 7년 전 일이니 그때 나이가 마흔 둘. 불혹을 넘긴 나이에 그저 평범한 아줌마였던 박제동 씨는 그 시절 ‘노동조합’이라는 새로운 세상과 맞닥뜨렸다.



“신경질 나니까 닭갈비나 먹으러 가자!”



민주노총 춘천지역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박제동 씨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풀무원 춘천지역 노동조합(아래 풀무원 노조) 초대와 2대 사무국장을 지냈다. ‘바른 먹거리’란 다섯 글자와 초록색 풀잎 이미지가 떠오르는 청정기업 풀무원에 그이가 들어온 것은 그보다 좀 더 된 94년 무렵이다. “민주노총이 뭔지도 몰랐던” 그이가 어떻게 노동조합 사무국장이 되었는지, 그리고 “테레비에서나 보던 전경”과 왜 마주쳐야 했는지부터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96년도에 산재(산업재해)를 받았어요. 폐기처분할 걸 모아서 나르다 허리가 뜨끔해서, 어 이상해… 그랬는데 집에서 자고나니까 다음 날 못 일어나겠는 거예요. 그게 무게가 한 40키로 정도 됐거든요. 회사에서 산재처리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그게 문제가 됐죠. 회사는 자기들이 처리를 잘못 해놓고 나더러 치료비를 토해내라 그러더라구요. 한 달에 기본급 80 받을 때였는데 치료비가 나한테 얼마가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980을 나보고 내래요. 내 잘못이 아니고 회사의 착오로 그렇게 된 건데. 내가 산재 해달라고 했냐? 당신들이 하라고 그러고 지금 나보고 이 돈을 내라 그러면 어떻게 하냐? 못 내겠다, 그래서 행정심판까지 갔던 거죠. 그걸 위원장님이 지켜보고 있었나 봐요.
또 하나는 IMF 때 온갖 악랄한 짓을 회사가 다 했어요. 기본급으로는 도저히 생활임금이 되지 않아서 다들 잔업, 휴일 특근으로 채웠죠. 제가 한달 31일 중에 한 번도 안 쉰 적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여름에 휴가를 가면 다른 사람들이 잔업으로 메워야 했는데 잔업을 하고 나서 약속을 안 지키고, 명절 때 특근을 하면 이틀 치 주겠다고 해놓고 하루 저녁 치만 주고, 월차 년차 강제적으로 사용하라고 하고…. 그때 딱 노조를 만든다 그런 생각도 없이 더러워서, 굶어죽어도 안 해! 그러면서 다들 앞치마 벗고 공장을 나왔죠. 그때 다들 집으로 흩어졌으면 좋았을 걸. 누가 닭갈비나 먹고 가자, 해서 먹으러 갔죠. 그걸 회사에서 안 거야. 누가 주동을 했는지 찾으려고 한 거죠. 누가 주동한 사람도 없이 우발적으로 간 거였는데.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주동을 한 걸로 되어버린 거예요. 그걸로 7번이나 면담을 했어요. 그게 조합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거죠.”



그리고 풀무원 춘천지역 노조는 첫 투쟁으로 당시 57%나 되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뤄냈다. 당연히 140여명이던 사업장에서 노조원 아닌 사람이 없었고 이러한 힘으로 노조는 2003년 풀무원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근골격계 투쟁’을 시작했다.



“지금 작업 속도는 이전 속도로 되돌아갔어요. 버켓(두부재료가 담긴 박스) 하나에 두부 36모가 나와요. 그거 하나 돌아가는 시간이 2003년 전에는 56초였는데 지금은 53초가 됐어요. 2,3초 차이이지만 근골격계 투쟁하면서 56초를 65초, 67초로 맞춰났거든요. 그게 다시 53초가 되어버린 거예요. 근골격계 투쟁은 단지 아픈 조합원 산재처리 받아내는 투쟁이 아니었어요. IMF로 높아진 노동강도를 낮추고 노동환경을 좋게 하는 투쟁이었죠.
풀무원이 노동강도가 너무 세서 아픈 사람은 많았지만 그때는 다들 그게 근골격계인지도 몰랐고. 사실 근골격계란 말이 입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죠. 근, 골, 격, 계. 이게 발음이 안 돼서…. (웃음) 노조가 연구소와 함께 조사를 하니까 여자는 100%, 남자는 83%가 나왔어요. 이거는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다…. 그런데 투쟁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조합원들이 굉장히 망설였어요. 혹시 산재가 되면 불이익을 받게 되는 거는 아닐까, 산재 인정을 못 받으면 당장 뭐 먹고 살길도 막막하니까. 노조에서도 승인이 떨어질지 100% 확신할 수도 없었고. 그렇지만 월급이 안 나오면 조합에서 부담하겠다, 그렇게 설득하고 다녔죠. 서울 근로복지공단에서 집회하고, 병원 쫓아다니고, 주말마다 전국적으로 순회 다니면서 선전전하고, 학생들하고 지하철 타고. 2003년 1월 시작한 게 12월 31일 회사와 합의를 했어요. 그때 건강증진실도 회사에 생기고. 지금은 다 유명무실하게 되었지만. 근골격계 위원회 노조에서 만들고 회사와 협상을 하고 노동부에 안전진단 요청하고 그러면서 작업환경 개선을 하게 된 거죠.”



이러한 눈에 보이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때 90%를 훨씬 웃돌던 노조 가입률은 현재 38%로 급락했다. 그 한가운데 2004년, 163일간의 파업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잔인해요, 자본이란 게”



“2004년 파업이 길었어요. 2003년 근골격계 투쟁을 하면서 조합비도 거의 고갈이 되었고 다들 많이 지쳤죠. 반면에 회사에서는 작정을 했던 거지. 2004년 파업은 저희가 하고 싶어서 했던 게 아니라 회사가 유도를 했죠. 노조는 타결을 보려고 계속 양보안을 냈는데 회사는 그럴수록 개악안을 내밀었어요.
조합원들은 163일 싸우면서 모아 놓은 돈도 없어서 투쟁기금 걷는다고 3차까지 걷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어요. 다들 가정이 있으니까. 그 사이에 협박과 회유가 들어왔죠. 먹구 살기 위해서 조합을 나가야 한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회사 간부랑 저녁 먹으러 가면 다음 날 탈퇴를 하는 거예요. 밥 먹고 술 먹고 그러면 두세 명, 또 며칠 있다가 식사하러 가면 또 두세 명. 그땐 진짜 오장육부가 다 녹아내렸죠. 아침에 출근하면 노조 사무실 문 밑으로 탈퇴서 몇 장 쑥 들어와 있고. 위원장님 만나서 왜 나갔냐? 물어보면 명확한 이유가 없어요. 마누라가 하지 말라고 해서, 부모님이 반대를 해서….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걸 다 아는데.
파업하는 도중에 아이를 잃은 조합원이 있었어요. 백혈병으로. 근데 그때 전 조합원이 가슴으로 아파했어요. 많은 힘은 안 되지만 어떤 조합원들 30만원씩 병원비 보태라고 모아주고. 그 아이를 잃었을 때 저도 7시간을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자마자 소식 듣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죠. 그런데 그 사람이 제일 먼저 탈퇴를 했어요. 제가 그 집에 가서 울면서 애원을 했어요. 진짜 이 길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내가 급하게 마이너스 통장 만든 게 있어서 빌려주마. 그래도 안 되더라구요.
지금 해고된 조직부장하고 나하고 병원으로 갔다가 날밤 새우다가 돼지껍데기 놓고 소주잔을 부딪치면서…. 그때 조직부장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크리스마스 선물 사주려고 돈도 떼어놨는데 검찰 조사 받느라고 선물을 못 샀다고. 그게 한이 된다고…. 그런데 회사에서 조직부장 해고할 때 가장 앞장서서 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에요. 위원장님 건, 무슨 건 다 그 사람이 진술서를 쓰고 그래요. 세상 왜 이렇게 됐어요? 누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왜 이래요, 세상이. 얼마나 잔인해요, 자본이란 게.”



눈가를 휴지로 찍어내며 애써 눈물을 참는 제동 씨는 또 한 가지 아픈 기억을 들춰냈다. 그이는 2004년 파업 당시 여성 조합원으로는 유일하게 삭발에 참여했다. 때마침 따로 살던 제동 씨의 첫째 아들이 군 입대를 한다며 제동 씨를 찾아 온 것이었다.



“삭발을 했으니까 친정도 그렇고 내가 어디를 갈 수가 없잖아. 또 파업 중이었고. 아이한테도 머리를 삭발했다는 이야기 못했죠. 전화 통화는 계속 했지만. 그런데 군대에 가야 하니까 애가 왔어요. 인사를 하러. 그때 내가 교섭을 하러 들어갔었는데 아이가 먼저 도착했다가 작업장으로 위원장님이 데리러 왔어요. 그래서 같이 밥을 먹는데 누가 얘기를 한 거야. 그때 아이가 밥이 안 넘어가서 못 먹었대. 그런데 미리 이야기를 들어서 그랬지 그렇지 않았다면 엄마를 못 봤을 거 같았다 아이가 그러더라구요.
그 애를 데리고 집에 데려갔는데 집에 뭐가 있어요. 계속 못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지. 시장가서 장 봐가지고 밥 해먹이고 아침에 통근버스 타고 나오면서 군대 가라고 보내는데. 아이는 가야하고 나는 또 교섭 들어가야 하고. 저도 가면서 그게 마음이 안 놓였나봐. 문자를 21개를 보냈어요. ‘엄마 머리 깎은 거 보니까 너무 가슴이 아프고, 자기는 어렸다. 아줌마들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싸우는 걸 처음 봤다.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고, 자기 군 생활 열심히 할 거니까 조합원들 다 잘 되고 승리했으면 좋겠다.’ 지금도 걔가 제대를 해서 복학을 했는데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요. 그러면 아르바이트생이 다 그렇잖아요. 가끔 아, 우리 엄마가 이래서 싸우나 그래요. 아이들이랑 같이 살았으면 저는 못했을 거예요. 저는 할머니가 애들을 데리고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죠. 만약에 아이들과 같이 살았다면 못했어요.”



“여기서 그만두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해요?”



‘이웃사랑, 생명존중’을 기업정신으로 내놓고 있는 풀무원은 포장만 그럴 듯한 기업이 아니다. 풀무원 남승우 대표이사는 얼마 전 대선출마를 밝힌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과 함께 대안사회를 모색하겠다며 만든 ‘미래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풀무원은 최근 좋은 먹거리 제공을 위해 가축사육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동물복지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사회와 환경에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자체적으로 내놓아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는 풀무원의 노사문화와 현실은 정반대인 듯하다.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차별은 엄청나요. 똑같은 실수를 해도 조장이나 반장이 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죠. 쉬는 시간도 30분 휴식인데 10분 넘기면 바로 불려가요. 어느 날 반장이 불러서 나보고 40분 쉬었냐? 나는 기억도 못하는데. CCTV 보여주며 조합사무실 나온 시간이 40분이래요. 그래서 보니까 공장 정문뿐만 아니라 노조 사무실 앞에 그게(CCTV) 달려있더라구요.
지금 남아 있는 조합원들은 진정한 조합원들이에요. 산재요양 받고, 파업 끝나고 들어가서 다들 항복문서 같은 잔업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했어요. 또 인사이동이 돼서 길게는 6개월씩 뙤약볕에 잔디 풀 뽑고, 돌멩이 주워 나르고. 그 일을 다 했어요. 그 중에 한 사람은 그게 너무 치욕스러웠대. 정말 다음 날 출근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금도 회사는 잔업이나 특근을 하려면 동의서를 요구해요. 그러니까 조합원들은 잔업이 하나도 없는 셈이죠. 대부분 동의서를 노조에서 쓰지 말라고 그래서 안 썼으니까. 그 대가로 평균 30만원 정도 월급차를 감수하면서 조합에 남아 있는 거죠.
진짜 치사하죠? 대부분 40대 중반 50대 초반의 아줌마들이에요. 정년이 55세이니까 이제 정년을 앞 둔 사람이 많죠.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다가 들어와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월급 올리는데 큰 관심 없어요. 사실 이 나이에 다른 데 가서 얼마나 받겠냐 그러면서. 당연히 노조에서도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 한 적 없구요. 그런데도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예요. 회식 자리에 가면, 이제는 조합원들 끼어 있으면 그렇게 못하는 모양인데 술 먹을 때 공장장이 깍두기 한 입 베어 물고 나서 입에 넣어주면 받아먹고 그래요. 그런 수모를 당하구도 비조합원은 다들 자기 발로 나갔으니까 다시 들어오는 게 쉽지 않죠. 자존심 문제가 있는 거예요. 회사가 부당해도 쉽게 조합에 돌아올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어떤 계기를 만들어서 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걸 만들어야 하는데 쉽지 않죠.”



현재 풀무원 노조의 가장 큰 요구는 해고자 복직이다. 전 위원장을 비롯해 2004년 파업 당시 노조 간부 4명이 해고가 된 상태다. 인터뷰가 있기 얼마 전 조직부장은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그 해결의 기미는 쉽게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선다면 제동 씨가 아니고 노동자가 아니다.



“저도 2007년 1월 1일부터 청소, 이름은 그럴듯하게 위생조에 발령이 났어요. 부당한 인사이동을 거부하고 회사와 싸울 건가 고민했죠. 싸우면 해고가 빤한 상황이니까. 그런데 현재 조합 간부들이 조합이 너무 힘들다 그래서 결국 가서 일했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수시로 비조합원들 시켜서 시비를 걸어와요. 조직부장도 회사 밖 술자리에서 싸운 게 빌미가 되어서 때린 사람은 승진하고 조직부장은 잘렸거든요. 이번에 지노위 결정이 있다고 하지만 회사에서 대법까지 가져갈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회사에서 징계위를 열어서 징계를 주거나 인사이동을 시켜서 해고를 하려고 하겠죠. 그래도 끝까지 해야죠. 해고될 때 되더라도. 지금은 춘천공장에 비정규직 별로 없다고 하지만 오늘은 한 명이 내일은 두 명 되고, 또 세 명 되고. 이랜드 보면서 남일 같지 않아요. 비정규직법 막았어야 하는데 못 막은 게 우리 잘못이죠. 여기서 그만두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해요?”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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