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단체탐방]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운동 만들기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

남편 일찍 여의고, 그때 중학생, 고등학생 애들 있었으니까 빚을 내서 조그만 식당을 시작했지. 이땐 카드가 먼지도 몰랐고…. 처음엔 장사 그럭저럭 됐어. 그때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하는 게 카드 하나 신청하면 만원씩 받는다고 했었다구. 아는 형님 아들이 그거 해서 하나 만들었지. 만들면서 안 쓰면 되지 했는데 만들고 나니 남의 돈 빌려 쓰느니 카드 쓰게 되더라구. 장사가 안 되니까 월급에 집세에 한 달에 이백, 삼백에서 오백까지 적자가 나더라구. 그래서 빌리고 빌리다 보니까 2003년도엔 가게 문도 닫고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지. 갚아야지 싶어서 다시 장사 시작했는데 일 년 만에 오천만 원 빚이 생겨서 신용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었어. 어떻게 개인파산이라는 걸 알았는데 할라니 변호사나 법무사 비용이 200만 원이야. 신용불량자가 200만원이 어딨어? 그러다 인권운동연대를 알게 되서 작년 10월에 찾아와 파산 신청했지.”


김명숙 활동가는 그렇게 인권운동연대와 연을 맺었다. 면책 후 나같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지 싶은 마음에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아래 인권운동연대)에서 금융피해자 상담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상담과 파산.면책과정을 도우면서 ‘또 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구나!’ 기분이 좋다고 한다.



민중과 만나는 파산학교


‘금융피해자’는 ‘신용불량자’를 사회구조적인 맥락에서 조명한 말이다. ‘빚을 졌으면 책임을 져야지’하는 논리나 개인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하기에 앞서 그 이면을 들여다보자. 1997년 IMF부터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사람들은 불안정한 고용과 저임금에 전면적으로 노출됐고, 실질소득이 하락하면서 삶은 궁핍해져갔다. 이 가운데 정부는 소비활성화와 내수 진작을 위해 신용카드사용을 장려했고 카드사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양적 팽창을 하였다. 그러나 무분별한 정책은 카드사를 압박하고 민중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그 속에서 자영업자나 저소득 계층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신용불량이나 파산자에 대해 ‘개인의 책임만을 추궁’하는 사회적 시선은 곱지 않다. 서창호 활동가는 역으로 바로 그 지점에서 민중과 만날 수 있는 연결고리로 보았다. “금융피해자 수가 2004년도 삼천 명, 2005년도에 삼만, 2006년도에 12만 올해 20만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요. 이 분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파산문제를 해결하고,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사람들을 빈곤운동의 주체로 함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인권의 시각에서 접근했다.


2005년 4월 인권운동연대 사무실을 개소하고 8월부터 본격적으로 금융피해자를 위한 파산학교를 열었다. 파산학교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네 시간에 걸쳐 총 세 강의로 구성된다. ①왜 신용불량자가 아닌 금융피해자인가? 신용불량자의 사회적 책임성, 채무와 추심과정에서 빚어지는 인권침해 ②채무탕감, 채무상환제도 등 파산에 대한 이론 ③파산신청을 위한 서류작성 등 실무교육으로 채워진다. 왜 금융피해자라고 하는지에 대한 사회구조적 분석과 이해가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른 실무교육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당사자 조직 ‘좋은모임회’


파산학교에 온 금융피해 당사자들이 사회구조적 모순을 알고 당당한 운동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을 운동의 주체로 이끌어내는 것은 인권운동연대를 시작할 때부터 계속되어온 고민이다. 장애인단체나 이주노동자단체 같은 특정영역의 단체와 달리 포괄적인 범위의 인권단체들이 대중을 조직하고 만나는 기획을 가지는 경우는 흔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민중 조직화의 고민 속에서 파산학교가 시작됐고, 지금 파산학교를 거쳐 간 사람들로 구성된 자치모임 ‘좋은모임회’가 조심스럽게 나래를 펴고 있다. “파산과 관련한 사회적 인식도 좀 바꿔내고 금융자본으로 인한 파산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정책이나 법의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 이영부 좋은모임회 회장님이 영 어색해 하신다. “지난해 12월 한나라 김정근 의원이 파산법 개정안을 냈어요. 워크아웃(8년간 분할하여 채무상환)을 먼저 진행한 후 파산 신청할 수 있게, 두 단계를 거치게 하겠다고. 이는 은행과 여신기관들의 이해를 반영해 파산을 더 어렵게 하려는 거죠. 좋은모임회에서 자본의 이해만 대변하는 이 법안의 문제점에 대해 공유하고 입법저지 농성과 집회로 법안을 저지시켰어요. 삼성생명의 면책자 보험가입 제한 등 사회적 차별에 항의하는 활동을 했죠.” 서창호 활동가가 이영부 회장님을 거들어 좋은모임회의 활동을 덧붙였다.



권리주체로 거듭나기


파산신청으로 면책이 됐다고 좋아진 것도 없다. 면책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면책이 되어도 신용등급은 10등급, 통장개설 외 아무런 금융활동도 할 수 없다. 게다가 은행연합회는 특수기록코드 1201(법원 등으로부터 파산으로 인한 면책결정을 받은 거래처라는 뜻)을 기록해서, 금융회사, 통신사, 보험회사, 고용을 목적으로 조회하는 회사나 기업에 제공한다. 아무런 근거 없이 개인정보를 수집, 활용하며 인권을 침해한다.


면책자들은 천 명 이상의 사업장에 취업을 하게 될 경우 서울보증보험의 취업보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서울보증보험이 면책자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사례가 많아 입사가 결정되고도 취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방문교사, 대리점 개설, 백화점 중간관리자 등의 취업에 있어서는 보증보험 발급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니, 면책이 되어도 살아갈 길이 막막한 건 마찬가지.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권리주체로 나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금융피해자 운동은 당사자 조직화 문제에 직면해 있고 좋은모임회가 그 출발선에 있다.


올 하반기에는 좋은모임회와 함께 지자체의 생활안정기금 실질화를 위한 사회적 요구를 모아낼 예정이다. 각 지자체별로 저소득층의 생활안정을 위해 기금을 조성해 놓고 있으나 거의 운영되지 않고 있는 상황. “대구시의 경우 110억 원 정도가 배정돼 있는데 1%도 사용이 안 되고 있어요.”라며 서창호 활동가는 좋은모임회 회원들과 내부 워크숍과 스터디를 진행한 후 10월 중순부터 적극적으로 요구안을 제기할 예정이다.


인권운동연대는 금융피해자를 사회적 약자로 인식,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왔다. 아쉬운 점은 사회권을 다루는 인권단체에 파산학교나 금융피해 당사자를 조직하는 문제를 늘 제기했지만 운동사회 내에서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서창호 활동가는 인권단체연석회의가 AIDS/HIV감염인 문제에 집중했듯이 금융피해자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래본다.

좌측부터 이미선 활동가, 김헌주 운영위원장, 이영부 좋은모임회 회장, 서창호 할동가


살 자리를 국가가 내주어야 한다


인권운동연대의 주제는 사회권이다. 그동안 신자유주의 공세에 떠밀린 금융피해문제에 집중해 왔다. 올해는 주거권과 최저임금, 최저생계비까지 외연을 확장했다. 인권운동연대의 운영위원이면서 대구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의 집행위원장인 정용태 님은 “회사에 취직을 해도 일할 책상을 하나 내주잖아요. 국민으로 태어났는데 살 자리를 국가가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며 주거권에 대한 의견을 드러냈다. 현재 대구시는 2015년까지 273곳을 재개발, 재건축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세입자나 저소득층이 거리로 내몰릴 것은 명약관화한 일. 저소득층을 비롯한 원주민들이 개발에 밀려 기반하고 있던 지역에서 쫓겨나지 않을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개발, 재건축 시행에 앞서 이러한 개발이 사람들의 삶에 실제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분명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장밋빛 환상이 아니라 진행단계별 실제 결과가 이렇다하는 정보조건을 주고 동의여부를 물어야지….” 정용태 운영위원은 건설자본의 배만 불릴 뿐 원주민의 요구나 권리가 사라진 개발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 우리사회에서 집은 여전히 금전적 가치로 존재한다. 주거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빈곤당사자들의 권리의식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일가구일주택’은 공허한 담론으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하나의 주력사업인 최저임금, 최저생계비 문제는 이제 막 발을 떼는 상태다. 그간 대구 지역 내에서 빈곤을 의제로 한 연대단위가 없었다. 인권운동연대는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가 별개의 사안이 아니므로 공동의 의제로 묶어낼 상설 연대체를 지역사회에 제안했다. 10월부터 활동가 혹은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부터 시작해 나갈 거라고 한다.



이 외 장애인, 노숙인 인권 사업은 지난달 상근을 시작한 이미선 활동가의 몫이다. 현재 경북대병원의 ‘의료공공성확보와간병인노동성쟁취를위한공동대책위’에서 활동하는데 배우는 입장이라며 말을 아낀다.


지난 7월 2일 개소한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지역사무소는 든든한 배경이면서 숙제다. 인권상담창구로서, 특히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에게 유용한 인권침해 구제기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지자체, 구치소, 검.경 등 인권침해소지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권위가 인권교육사업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권감수성이나 인권인프라가 풍부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탄탄한 인적, 물적 기반을 갖춘 국가인권위에 인권운동의제를 선점당해 시민사회운동이 제 기능을 못할 우려도 있다. 또 국가기구에 대한 모니터링이라는 새로운 숙제까지… 일장일단이다.


정말이지 할 일은 많고 사람은 없다. 그래서일까. 김헌주 운영위원장은 “내 역할은 못하게 막는 거”라고 우스개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요구받는 것에 비해 할 수 있는 역량이 제한된 현실을 생각한다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는 생각에서 과감히 잘라버리는 결단도 필요하다. 서창호 활동가 1인 체제에서 금융피해당사자로 구성된 상담활동가 2인에 지난달부터 상근을 시작한 이미선 활동가까지 상근인력은 4명. 정기적인 활동비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부담이 있다. 그러나 재정과 인력을 충원해 금융피해자 문제를 골간으로 하면서 사업을 확장해갔으면 하는 바람은 마찬가지. 인권운동연대는 금융채무, 주거권, 노동불안정 등 빈곤일반을 관통하는 권리운동을 일반화하면서 당사자들을 권리주체로 조직해가는 길을 열고 있다.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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