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다방] 풍성한 가을이 그립다

대추리에 살던 작년 이맘때가 생각이 난다. 수확의 계절이 왔다는데, 도시에서 뿌리를 뽑힌 채 생애 대부분을 보내왔던 나는 가을이 와도 ‘도대체 무슨 수확?’ 이러면서 보냈었다. 내가 본 가을의 결실이란 길거리 은행나무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후두둑 떨어지는 냄새 구린 은행들과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그것을 줍는 나이 든 사람들뿐이었다. 대추리에서 첫 번째 가을을 맞이하며 나는 수확이 얼마나 기쁜지 알게 됐다. 마을이 함께 힘을 모아 벼를 수확했고, 집집마다 나눠 먹었다. 솔부엉이가 살던 숲에는 커다란 밤나무와 도토리나무도 있어서 그 아래에 떨어진 밤송이와 도토리를 줍기도 했다. 지킴이 집에서 자라던 대추나무에는 대추들이 많이 열려 신기했는데, 내가 살던 집 감나무에서도 열매가 부지기수로 열렸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을은 풍요롭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나는 이렇게 색색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올해 가을에는 무슨 수확을 할 것인가 생각하니 참 쓸쓸하다.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진동하는 이 땅에서 그나마 썩지 않은 채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곳을 모조리 빼앗겨버린 것은 아닌가? 떠밀리고, 짓밟히는 이들의 아우성만이 남은 곳에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맞으며 가슴이 시리다. 끝없는 노동과 만족할 수 없는 소비의 나락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이윤의 체제에 맞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 일어나 함께 완강한 제동을 걸어야 하는데, 왜 우리는 쫓겨나기만 하는 것일까. 나는 친구들과 새만금특별법이 얼마나 깡패 같은 법안인지 살펴보는 세미나를 하고, 곧 이란을 침공한다는 미국 보고 전쟁 그만 하라고 노래를 부르며, 소비를 하지 않는 자립적 삶을 알리기 위해 대안생리대 만들기 워크숍에서 강연을 하는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결실은 없고 폭력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도 아닌 내 삶은 무엇일까. 최소한, 일자리를 늘리고 소득을 올려주겠다고 약속하는 자들의 말잔치에 현혹되지 않을 판단력은 생겼다. 내 삶을 유지시키는 것은 정치가들이 떠드는 경제해법이 아니라 나의 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수십 년간 황새울 땅을 맨손으로 일구며 풍성한 가을을 지켜왔던 농민들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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