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이슈] 대학평준화, 입시문제 해결의 유일한 대안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사회 vs 사회적 연대에 입각한 공동체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 1986년, 어느 여중생의 유서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30분 공부하고 20시간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2002년, 어느 초등학생의 유서



사랑하는 친구들아. 너무 힘들었어. 이거 쓰는데 왜 이렇게 눈시울이 붉어지니… 눈이 아파, 근데, 그래도, 죽고 싶어. 내가 죽는다고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거야. 선생님들의 강력한 몽둥이도, 선생님들의 공부, 공부 소리. 난 사실 평범한 여중생일 뿐이야. 노래 부르길 좋아하고, 그림 그리길 좋아하고, 수다떨길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하지만 사회는 내게 그걸 바라지 않아. 같은 머리, 같은 옷, 그리고 같은 공부.
- 2007년, 어느 여중생의 유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라는 어느 여중생의 외침이 우리 사회의 양심을 울린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여전히 행복은 성적순이다. 아니, 어쩌면 20년 전보다 지금의 학생들이 더욱 가혹한 입시지옥에서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입시노동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미래의 행복’이라는 명목 아래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히고 있다. 두발규제, 체벌 등 학생 인권 유린도 “대학 가면 모든 걸 네 맘대로 할 수 있어.”라는 말 한 마디로 용서가 된다.



저주받은 89년생


지금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이른바 ‘저주받은 89년생’으로 불린다. 이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이른바 ‘죽음의 트라이앵글(내신-수능-논술 삼중고)’로 불리는 2008학년도 입시안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1학년 때 생전 처음 접해보는 ‘내신등급제’로 신음했다. 과거의 ‘수, 우, 미, 양, 가’ 식의 절대평가가 아닌 ‘상위 4%까지는 1등급, 상위 11%까지는 2등급’ 하는 식의 상대평가를 적용받게 되었다. 그 결과 ‘친구의 노트를 훔치는’ 가혹한 경쟁체제를 교실 안에서 체험하게 되었다. 이들은 2학년에 올라와 어느 날 갑자기 서울대를 중심으로 ‘논술 본고사’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접하게 된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가지고 5지 선다형 찍기 문제에 씨름하던 이들은 이제 느닷없이 ‘창의력 신장’의 깃발을 높이 들고 논술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들이 3학년에 올라오자마자 고려대, 연세대 등 상위권 사립대학에서 수능의 비중을 강화하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아이들은 이제 ‘창의력 신장’의 깃발을 내리고 다시금 EBS 수능 강의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참교육은 간데없고, ‘창의력’이니 ‘경쟁력’이니 하는 온갖 요란한 깃발만 나부끼고, 아이들은 ‘합격’이라는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림이 없다.


우리나라의 입시 제도는 해방 이후 16차례 바뀌었다고 한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예비고사, 학력고사, 본고사, 내신, 수능, 논술, 면접 등 나올 수 있는 모든 방안은 다 나온 셈이다. 하지만 그 어떤 방안도 현재와 같은 가혹한 입시 지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이 한 줄로 서열화되어 있는 한, 어떤 제도로도 모든 수험생들이 상위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입시경쟁체제를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입시경쟁체제를 해소하여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치고 공교육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대학서열화체제를 해체해야 한다. 대학서열화체제 해소란 곧 대학평준화를 의미한다.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 과도한 입시교육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도한 입시교육이 대학서열화와 학벌사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대부분 인정한다. 그런데 대학서열화를 없애는 것은 곧 대학평준화라는 말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인 반감을 보인다.



유일한 대안인 대학평준화


하지만 대학평준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방안이며 유일한 대안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나라에서는 이미 현실인 제도이다. 초등학생 입시 지옥을 없애기 위해 1969년도에 중학교 입시를 없애고 중학생 입시 지옥을 없애기 위해 1974년 고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었다. 고등학생 입시 지옥을 없애려면 대학평준화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유일한 대안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식인 것이 우리나라에서만 상식이 아닌 것 중의 하나가 대학평준화이다. 세계적으로 학문경쟁력 1위를 자랑하는 핀란드는 자일리톨의 나라가 아니라 100% 국립대 평준화의 나라이다. 세계적 석학을 배출한 철학과 교양의 나라 프랑스도 대학평준화 체제이다. 오스트리아나 호주는 아예 대학입학 자격고사 없이 고교 졸업장만 있으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원조 미국의 대학도 소위 아이비리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공립대학은 평준화 체제에 가깝다. 우리나라처럼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여 전국의 모든 대학이 한 줄로 서 있는 나라는 일본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도 우리나라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


대학평준화의 개념은 사실 단순하다. 대학평준화란 모든 대학이 균등한 교육 여건을 갖추는 것, 그리고 입시의 문턱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정한 자격을 갖춘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까운 대학에 가도록 하는 것, 누구나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나왔느냐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 방안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하나, 대학 간의 교육 격차를 해소하고, 상향평준화의 토대를 만든다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첫 번째 전제는 ‘좋은 대학’, ‘나쁜 대학’의 차이를 없애는 것, 즉 대학 간의 교육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울대 등 몇몇 대학에 집중되어 있는 정부의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우선적으로 낙후된 지역의 대학으로 돌려야 한다. 단지 교육 환경에 대한 지원뿐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교수를 정규직 교수로 전환시키고 대학마다 특성화된 교육과정이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 현재 GDP 대비 0.5%에 불과한 고등교육 분야의 재정 지출액을 OECD 국가의 평균 지출 비율인 1%대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전국의 모든 대학의 교육 여건을 현재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려 ‘상향평준화’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둘, 현행 입시 제도를 폐지하고 대학입학자격고사제를 실시한다
대학입학자격고사는 성적을 산출하는 시험이 아니라 ‘합격’, ‘불합격’ 여부만 판별하는 제도이다. 대학입학자격고사에 통과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학교 및 학과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바칼로레아’라 불리는 대학입학자격고사에 통과하면 누구나 파리1대학, 파리2대학, 파리3대학 식으로 평준화된 대학에 지원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대학입학자격고사는 ‘합격’과 ‘불합격’ 여부만 판정하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수능처럼 점수를 매길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지식 암기식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창의력과 사고력을 측정할 수 있는 서술형, 논술형 문항을 기본으로 하게 된다. 현재의 논술 본고사와는 달리 고등학교까지의 학교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친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써나갈 수 있는 수준의 적정한 난이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셋, 통합전형, 통합이수, 통합학위 제도를 시행한다
대학평준화 체제는 전국의 모든 대학이 계열별로 학생을 공동으로 선발하고(통합전형), 자유롭게 학점을 교환하며(통합이수), 동일한 졸업장을 수여(통합학위)하는 체제이다. 대학입학 자격고사를 통과한 학생이면 누구나 가까운 대학, 원하는 학과에 입학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입학 정원을 탄력적으로 운영하여 지원자 모두를 수용하되, 불가피하게 지원자 전원을 수용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거주지나 개인의 특성 등을 고려하여 학교나 학과를 다시 배정하게 된다. 또한 전학이나 전과를 허용하고 타 대학에서 이수한 학점도 동일하게 인정함으로써 자유로운 학문 탐구를 보장하게 된다. 또한 졸업장에는 학교명을 기입하지 않고 전공과 성적만을 기록하여 학벌에 따른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대신 학사 관리를 엄격하게 하여 일정한 자격 조건을 갖춘 학생들에게만 졸업 자격을 부여하도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벌이 아닌 능력으로 인정받는 풍토를 만들어 학생들이 더욱 학문에 정진하도록 한다.



넷, 학력 학벌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사회적 조치를 시행한다
현재 우리와 같은 학벌구조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공직자 임용이나 취업, 임금, 승진 등에 있어 사회적 차별이 확고히 정착되어 있다. 이러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직자 가운데 특정 대학이나 특정 지역 출신의 비율을 제한하는 공직자 할당제 시행, 취업이나 임금, 승진 등에서 학벌에 따른 차별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학력.학벌 차별금지법 제정 등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대학평준화가 완전히 정착되기 이전부터 이러한 사회적 조치를 우선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대학평준화가 가능한가? 중학교 평준화가 가능했고 고등학교 평준화가 가능했듯이 대학평준화도 가능하다. GDP 규모나 교육재정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OECD 가입국가 중 경제력 11~12위의 나라이다. 과거의 중학교, 고등학교 평준화가 독재 권력의 정치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대학평준화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사회로 갈 것이냐, 사회적 연대의 정신에 입각한 공동체 사회로 갈 것이냐’에 대한 사회적 결단의 문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범국민적인 실천이다. 그 실천의 시작은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http://edu4all.kr)’ 회원 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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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빈 |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정책교육위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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