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사라지는 사람들

단속.추방 반대를 넘어서는 구호와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 안의 세계 이주노동자,이주민



국내 외국인 100만 시대. 이제 몇 십 년만 지나면 한국은 이주민이 전체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이민사회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고작 150명의 출입국 단속 공무원이 20만이 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연례행사처럼 단속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은 국제결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글교실을 열어주기에 여념이 없다.
두말할 필요 없이 국가는 이주를 관리하고 통제한다. 그 틀 안에서 합법적 단속, 인권친화적인 추방을 외치는 일은 뭔가 석연치 않다. 별로 문화적이지도 결코 다양하지도 않은 정부와 지자체의 다문화 정책도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하며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할 우리 안의 ‘우리’.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어 노동자로, 여성으로, 아이들로, 그리고 이웃으로 살아가는 국경을 넘어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사라지는 사람들
고용허가제 3년, 그 빛 좋은 개살구

이주여성에게 평등한 사회적 권리를

은지와 바타 이야기

한국적 다문화 운동의 실험, 안산 국경없는 마을

“이주노동자는 노동자다!” 이주노조 까지만 위원장







근로자와 노동자라는 비슷한 ‘말’ 사이에는 사실, ‘찐한’ 의식과 무의식의 싸움이 들어있고, 서로 다른 이해와 감수성이 녹아있다.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근로자’와 ‘노동자’라는 말은, 어쩌면 서로 다른 인식과 실천을 내용으로 하는 서로 다른 존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법체류자’라는 언어의 전략


또한 우리는 ‘외국인근로자’와 ‘이주노동자’라는 규정 사이에 놓여있는 차이만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실천한다. ‘불법체류자’와 ‘미등록이주노동자’라는 규정도 마찬가지다. ‘불법체류자’라는 규정은 메마른 법의 언어, 행정의 언어다. ‘체류’가 ‘불법’이므로 그 ‘불법’은 행정적인 처분의 대상일 뿐이다. 사람 자체가 불법/합법의 대상일 수 없으나, ‘사람’을 ‘체류’의 관점으로 한정함으로써 건전지 폐기처분 하듯 간단히 행정처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합법/불법의 경계를 통해 구체적인 ‘사람’을 지워버리는 것, 그것이 불법체류자라는 규정이 수행하는 행정의 전략이다. 불법체류자라는 언어 하에서 우리는, 다 쓴 건전지를 폐기처분하는 수준 이상의 인식과 실천을 얻기 어렵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법체류자-단속’에 대하여 ‘단속.추방 반대’를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행정의 문제틀에 포섭된 울림이 약한 구호이며, 빈약한 실천일지 모른다. 문제는 언어를 전환하여 문제제기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사진 | 참세상



150 : 200,000 숨바꼭질의 연극성


출입국의 단속 공무원 수 약 150명, 국내 체류 중인 미등록이주노동자 약 20만 명, 이 단순한 숫자상의 비교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다. 이른바 ‘불법체류자’ 문제를 ‘단속’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명확한 사실을 그들도 결코 모르지 않는다는 것.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은, 쫓기는 자의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존재의 문제이지만, 쫓는 자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단속은 ‘규모의 관리’다. 단속이 적정 ‘규모의 관리’를 위해 생산해내는 것은 어떤 이미지, 어떤 공포, 그리고 메시지들(signal effects)이다. 그들이 방송국 카메라를 동반하고 단속에 나설 때, 주기적으로 집중 단속의 경고를 반복할 때, 단속은 주권국가의 ‘법의 지배’에 대한 ‘이미지’, 사회적 사형 집행의 ‘공포’를 만들어 낸다. 그 이미지와 공포를 통해 전달하는 직접적인 메시지는 분명하다. “열심히 일한 자, 유통기한이 지났으니 떠나라!”



‘미등록’ 문제에 있어서 ‘국가’라는 ‘술래’의 역할


‘단속’이 하나의 연극이라면(또는 연극일 수밖에 없다면), ‘떠나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하나의 연극에 불과한 것일까? 이방인을 ‘불법의 지대’에 두고 활용하려는 암묵적이지만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용인인가? 아니면 국민국가 체제와 ‘이주’라는 전지구적 현상 사이의 불가피한 틈새에 대한 국가의 무능력인가?(제도의 불가피한 한계인가?)



“총자본으로서의 국가는 이주노동자의 이입을 통하여, 합법적 이주노동자를 정책의 주요대상으로 삼기보다는 불법화된 미등록노동자의 양산을 통하여 비정규직을 포함하여 2차 노동시장(여성, 장애인 등 소수노동자)에 대한 통제의 주도권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통제.관리를 주도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김병조, 2006, <한국자본주의와 이주노동자>1))



국가에 의한 ‘불법의 암묵적.계획적 용인과 배치’라는 위와 같은 관점은 이주 문제에 대하여 많은 진보적인 입장이 취하고 있는 관점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감히 말하자면, 그러한 분석은 너무 나이브한 것이 아닐까? 국가 정책의 성격을 자본의 이해로부터 직접적.무매개적으로 도출하려는 ‘조급함’과 ‘단순함’의 산물은 아닌가? 이 관점은 국가라는 ‘술래’의 복합적 성격과 역할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히 이주노동정책은 이중노동시장의 2차 부분에서 인종적.민족적 하위 노동시장을 형성하여 위계적으로 노동을 분할하는 통제의 전략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 수행은 ‘국민’과 내국인 ‘노동자’의 동의를 적극적으로 획득하는 헤게모니적인 방식으로만 수행될 수 있다. ‘고용허가제’를 분기점으로 이주노동정책은 시장이 주도하고 국가가 방조하는 유형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통제형으로 전환되었고, ‘미등록’ 문제도 그 만큼 변화하고 있다. 이제 운동의 전선은 나이브한 시장의 야만성에 있기 보다는 ‘일반이익’(국익)으로 표현되는 헤게모니적 제도와 인식의 ‘숨어 있는 폭력’과 싸우는 것에 놓여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내국인 노동자의 폭력적 관점은 건설현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났지만, 한국 사회의 인식과 제도에도 지배적으로 숨어있고, 언제든지 분출할 수 있다. 미등록이주노동자의 문제는 ‘작은 자본’과 ‘큰 자본’, ‘조합주의적’ 노동자와 ‘민족주의적’ 국민, ‘법의 지배’와 인권 등 다양한 벡터(vector)의 힘과 헤게모니적 국가가 만나는 지점이다. 헤게모니적 지배의 획득이라는 관점에서, 더 이상 국가는 일면적으로 단순하게 ‘불법’을 정책적으로 양산하지는 않는다. 국가라는 ‘술래’의 더 복잡한 역할과 성격을 포착해서 실천의 지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만약 ‘불법체류자’, ‘미등록’의 문제를 한국 이주노동정책의 ‘숨어있는 진짜 전략’이라고 판단한다면, 합법화 요구는 근본과 근본이 부딪히는 결정적 문제가 되고, 그만큼 합법화 공간이 열릴 가능성은 지극히 예외적인 것으로만 상정될 것이다. 그러나 대선후보 이명박이 ‘사면’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상황이 강제한 또 하나의 연출일 수 있겠지만, 일면의 진실은 담겨져 있다. ‘불법’의 존재가 ‘제도’에도 부담이 된다는 것, ‘불법’의 지대는 불가피한 무능력의 지대라는 것. ‘합법화’의 요구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실현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



‘이주’도 ‘인권’이다!?


“이동성이 극대화되고 있는 세계에서 이민은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민은 인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계 안에 갇혀 국민국가적인 컨테이너 안에서 하는 영토적인 사고가 만들어 내는 범죄와 같은 것으로 취급될 행동이 결코 아니다.” (울리히 벡, 2007. 5. 23. <오마이뉴스>)

고용허가제 3주년 규탄집회. 사진 | 이주노조


세계시민적 기획의 전통은 칸트로까지 올라가며, 하버마스로, 네그리에 이르기까지 제기되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리고 이민(이주)을 인권의 문제로 제시하는 울리히 벡의 해법은 ‘이민세’의 도입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법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역시 ‘국가’의 문제이다. 이주의 문제는 국민국가 체제의 뿌리에 닿아있다. 출입국 경계의 설정 없이는 국가 권력의 행사도 있을 수 없다. ‘이주를 인권으로’라는 인식의 전환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체제를 떠받치는 국민국가의 문제를 우회하고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근본적인 기획이다.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세금 징수가 ‘이주를 인권으로’ 관점화 하는 마법의 황금열쇠일 수는 없다. 그것은 EU라는 컨테이너에 갇힌 ‘역내의 인권’일 뿐일 것이다.



‘합법화’라는 슬로건?


‘이주’의 문제는 국가와 자본의 노동 분할전략에 맞서는 동시에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분할에도 대항하는 운동의 과제를 제시하는 매우 근본적인 영역의 문제이다. ‘이주도 인권이다’라는 인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근본과 마주하는 만큼의 ‘긴 호흡’이 필요하다. ‘세계시민권’, ‘만인을 위한 여권’, ‘이민세’ 등의 기획은 그 긴 여정 중의 어느 이정표의 이름들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 없는 사회에 대한 상상은 아직 국민국가의 경계로 분절된 ‘법의 지배’의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서는 탈영토적 흐름들이 존재하지만, 그 흐름은 아직 ‘탈국가적 정치주체’화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존의 윤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주 운동은 그 흐름의 근본을 사고하는 긴 여정에 올려놓고 정치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근본을 지속적으로 전망하되, 현실이라는 질료의 저항을 거친 ‘지금 여기’에서의 가능한 실천은 우선은 ‘합법화’의 요구가 아닐까? 150 : 200,000이라는 단속의 연극성을 드러내고,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면, 제도의 한계와 무능력을 실천의 지점으로 삼아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은 것이 아닐까?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사라진 구체적인 ‘사람’들, 그들도 우리처럼 ‘빵과 장미’ 모두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우리의 출발점은 아닐까?

덧붙이는 말

1) 결론에 대한 의견은 다르지만,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하여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분석적으로 접근한 소중한 시도이며, 그 시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정정훈 |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