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거북이 섬에서 온 사람

지구별의 새로운 길을 찾는 니컬라 루소


평소 같았으면 ‘그가 캐나다에서 한국에 처음 온 것은 2001년이다.’라고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북이 섬에서 왔다고 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거북이 섬은 원주민이 캐나다를 가리키는 말이란다. 니컬라 루소. 그는 서울과 연대(solidarity)를 합쳐서 만든 서울리데리티(Seoulidarity)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국제적 사회문제를 한국에, 한국 사회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 해 12월, 새만금 갯벌을 살리고 이라크 전쟁을 중단하자는 ‘길바닥 평화행동’이 열리던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그를 만났다.



논리보다 앞선 욕망을 따라 왔어요



우선 그가 어떻게 ‘거북이 섬’에서 바다 건너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가 한국에 오기 전에 했던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니컬라는 한국에 오기 전에 세젭(College Education General Et Professional, 고등학교와 대학 중간에 있는 캐나다의 교육과정)에 다니고 있었고 이후 대학에 들어가 ‘환경과 건강’을 전공했다.



“2000년 가을에 시애틀에 거대한 집회 있었잖아요. 흥미로운 움직임이라고 생각했어요. 주변에 알리고, 학교 안에서는 올라가는 교육비 반대, 무료교육 위한 활동했어요. 또 2001년에 내 고향에 북미, 중미, 남미 국가가 모이고 자유무역협상 하려고 했어요.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단체에서 이것에 반대 표현하려고 했어요. 그때 커다란 집회 준비한 모임 있었어요. 여기 참여하면서 나에게 큰 영향 끼쳤어요. 세젭에서 학생 동아리 결성하고, 다른 학생과 함께 사회문제, 환경문제 같이 공부하고, 도서관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서 같이 행동하면 새로운 질문 나오고, 새로운 질문에 다시 토론하고.
열일곱 살 때 학교에서 역사 선생님이 저희들에게 비평적으로 생각하라고 주장했어요. 공식적인 역사는 권력이 있는 사람 역사라고 했어요. 그때 그 선생님은 학교에서 무료교육을 위하여 교사노조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학생으로서 이 교사 보고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름방학 때 부모와 함께 도시 떠나고 시골에서 보냈어요. 퀘벡에 세일러헌(세인트로렌스) 강이라고 커다란 강이 있어요. 이 강에서 어렸을 때부터 놀았어요. 그러나 오염이 많이 되었고 부모님이 ‘여기서 더 놀지 마라. 병에 걸린데’ 했어요. 재미있는 놀이터가 오염 되었다는 게 너무 아쉬웠으니까 아마 그때부터 환경에 대해 관심 갖게 된 거 같아요.”



그의 관심은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새만금 갯벌 살리기,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활동과 이어졌다. 니컬라가 한국에 온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2001년 처음 왔을 때는 7개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3개월 정도 한국에 머물렀다.



“퀘벡은 다 프랑스 말 하니까 영어 배우러 밴쿠버에 갔어요. 거기서 지금은 헤어진 한국 여자 친구 사귀었어요. 그 여자 다시 보러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 잘 몰랐어요. 여기서 뭘 할지 몰랐어요. 그냥 왔어요. 우리가 선택할 때 논리적인 이유 말고 그냥 욕망 따라 하는 것이죠. 내 욕망, 이유는 완벽하게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나 한국에 올 욕망 있었어요. 그 여자 보러, 다른 문화 보러.
서울과 시골, 한국에서도 많이 다르죠. 내 인상은 한국에 대한 인상인지 서울에 대한 인상인지 구분이 되기가 어렵죠. 거대한 도시, 아파트 생활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사실 걱정했어요. 오기 전에. 내가 숲에 가는 거 아주 좋아하니까, 여기에 너무 복잡하고 어려울까봐 걱정했었어요. 그러나 와서 적응할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떤 때는 답답했었어요. 공원이 필요했어요. 신촌에 있었고, 갑자기 아주 답답해서 급하게 공원, 숲에 가야 한다는 느낌 들었어요. 연세대학 안의 숲에 갔어요. 그건 아주 급한 욕망이었어요.”



캐나다, 한국, 그리고 후암동 낡은 집



어쩌면 역설적으로 숲에 가야 한다는 그의 욕망이 그를 이곳 서울 한복판까지 오게 했는지 모른다. 그가 가진 자유로움은 자신이 가진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 아닐까. 니컬라는 2003년 한 서점에서 열린 환경관련 행사에 연극을 보러 갔다가 환경운동가를 만났고, 차츰 한국에 대해 알아나가며 활동을 시작한다.



“그분과 생태공동체, 에코빌리지에 대한 이야기 했고, 그분이 저를 위하여 한국에 있는 생태공동체 보게 했어요. 그래서 녹색대학교, 야마카시즘(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생태주의) 공동체 방문했어요. 지리산 가서 만났던 사람 자주 방문해요. 녹색대학교 통해 만났던 귀농한 사람이고 친해져서 지난여름에 집을 같이 지었어요. 지리산에서 자급자족하는 아나키스트 가족도 만나게 됐어요. 몇 번 가서 같이 조금씩 농사짓고 벼 베기도 했어요. 그리고 갯벌 살리기 활동도 했어요. 8월에 살살페스티벌, 에코토피아 캠프에 동참했어요. 서울에서 거기(새만금)까지 자전거로 갔어요. 며칠 걸렸어요. 가는 길에 시화호 농성하는데 구경하고. 천천히 자전거로 다시 갔어요. 작년에 바닷길 걷기 하면서 새만금 처음 알게 되었어요. 이런 생태계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생명 너무너무 많아요. 믿기가 어려울 만큼 많아요. 어떤 어촌에 들어가고 거기서 어민의 생활, 바다에 가는 거, 거기에 사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현했을 때 감동했어요.
대추리는 미국 친구를 만나서 함께 갔어요. 대추리에서 투쟁과 예술, 미술이 어떻게 같이 서로 보완할 수 있는지 알게 됐어요. 대추리 촛불집회 있잖아요? 아주 멋있어요. 그 전에 판소리 들은 적 있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근데 그때 판소리 듣고 이거 박물관에만 있는 문화 아니고 정말 살아있는 문화라는 느낌 느꼈어요. 혼자서 하는 거 아니고 듣는 사람 같이 ‘얼씨구~’ 하면서. 그리고 거기 사람들, 지킴이, 주민들이 어떤 문화, 스스로 만들어서 인상적이었어요. 사람은 개인적인 삶만 아니고 공동적인 삶도 있어요. 이거 위협당하니까 너무 아쉬워요. 그리고 인간뿐만 아니고 인간 아닌 존재, 땅, 식물, 동물에 대한 느낌도 있어요. 특히 기지 확장을 위해 파괴된다는 거 너무 아쉬워요.”



현재 그는 서울리데리티 활동과 함께 우연히 알게 된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세미나에 참여하기도 하며 올 봄부터는 후암동의 오래된 집에서 서울리데리티 활동을 같이 하는 제프, 그리고 또 다른 친구들과 같이 살고 있다. 캐나다가 아니라 거북이 섬에서 와서 한국이 아니라 후암동 낡은 집에서 사는 니컬라에게 그래도 캐나다에 대해, 그리고 한국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후암동에 오래된 집에 살아요. 난민들이 세웠던 동네에요. 산동네, 아주 작은 집들이 있어요. 집들이 다양하고 자동차 못 다니는 골목길. ‘수유+너머’에서 어떤 부동산 괜찮다고 소개했고, 부동산 가서 내가 월세 없는 집 찾고 싶다고 그랬어요. 부동산이 집을 우리에게 보였어요. 너무나 나쁜 집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들어가자마자 너무 좋아요. 넓고 유일해요. 모양이 규칙적이지 않아요. 지저분했어요. 부서진 가구, 이상한 냄새, 이거 치우면 열린 공동체 세울 수 있다는 거 상상할 수 있었어요. 이 집 구하고 친구 많이 올 거라고, 활발 되겠다고 친구와 이야기했어요.
캐나다는 유일한 현실 아니에요. 캐나다에 여러 가지 현실 있어요. 일부분만 내가 알아요. 한국도 일부분만 알아요. 이주노동자 캐나다에 오고, 불법이 되고, 아주 어렵겠죠. 캐나다 원래 주민들 살다가 유럽에서 식민지 세우고, 국가 세우고, 이거 정말 미워요. 식민지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캐나다 국가에서 태어났으니까 장점 있어요. 좋은 건 의료, 교육. 거의 무료이니까 걱정 덜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 생존 걱정 덜 할 수 있어요. 캐나다 국가는 거짓말쟁이에요. 거짓말 잘 해요. 사람들에게 보이는 면 아주 잘 속여요. 이라크 침략하지 말라는 큰 사회운동 있었어요. 정부가 동참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어요. 많은 활동가 승리했어요. 캐나다 잘했다고, 전 세계에서 캐나다 평화 좋아하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사실 캐나다 동참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미군이 이라크 갈 수 있도록 미국 전쟁을 위한 배 걸프 만까지는 가요. 캐나다 산업 무기 폭탄 만들어서 미군에 팔아요. 캐나다 정부가 전쟁 산업 지원해요.
퀘벡 분리 독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 지 잘 몰라왔어요. 왜냐하면 저는 불어하고 국가 통해서 불어문화 지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문화발전을 국가를 통해 할 수 있는 거 아니라는 비평적 관념 갖게 됐어요. 퀘벡이 국가 되어서 문화 지원하면 또 다른 문화 동시에 무시하는 거고. 퀘벡은 보호해야 할 사람 말하면서 원주민 탄압해요. 퀘벡 불어 하는 사람 위해 개발한다고 북쪽에 커다란 댐 만들고 수력발전소 개발 통해서 우리 민족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자고 하면서 원주민 탄압해요. 민족국가 답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이니까’라는 말은 소수를 억압하는 말



그렇다면 한국은, 그리고 한국문화는 어떨까? 그는 이해해야 할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마음 아픈 건 절친한 한국친구들이 “여기는 한국이니까”라고 말할 때이다.



“캐나다에서 여자 아주 편하게 가까웠어요. 애정표현, 우정표현 아주 자연스럽게 했는데 한국에 어려워요. 친구로서 여자 친구로서 손 만질 수 없는 거죠. 아주 불편해요. 성차별 반대하려는 활동가, 몸에 대한 정치 저도 이해해야 되요. 여자들은 남자와 같은 방에 자기에 불편하면 나도 인정할 수 있어요. 내가 이해해야 해요. 하지만 다른 방향도 가능해요. 다른 길로 갈 수 있고 거기에 익숙해질 수 있어요. 내가 자전거 타니까 더우면 티 벗어요. 나중에 어떤 여성주의자가 나에게 이거 하면 안 된다고 말했어요. 여성에 대한 존중 부족한 행위라고 했어요. 제가 이거 좀 더 생각해보고 동의하지 않아요. 몸에 대한 억압 있어요. 성 차별이 아니고 다른 이슈에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누가 제게 ‘니컬라 여기는 한국이니까 한국방식 따라야 해요’ 할 때에요. 이런 말 못 받아들여요. 소수는 대부분 다수 따라야 할 일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항상 유일한 상황이니까 그 상황에 조화 찾아야 해요. 기만적인 문화, 편견 없애버려야 해요. 지금 한국에 있으니까 한국 문화 따르면서 갈등해소할 일 아니에요. 우리 독립한 존재로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이니까 한국 따라야 한다고 하면 국가주의, 민족주의라고 봐요. 여기 어떻게 한국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문화 다양성 있고 다른 생각 가진 사람들 있어요. 그거 인정해야 하고, 이곳 국가 땅 아니고 지구별이에요. 이런 말 아주 어려운 것은 친한 사람한테 들었어요. 그래서 아주 마음 아팠어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내 의견 듣고 싶어 하니까 재밌어요. 심심하지 않아요. 길에서 누가 저에게 와서 어떠냐고 물어보고. 대화할 기회 많이 생겨요. 하지만 외국인에 대한 환상 있을 거 같아요. 특히 어떤 인종주의? 차별이 있는 거 같아요. 친구가 독일인이고 한옥 짓고 있으니까 기자가 왔어요. 우리도 면담하고 기사 썼어요. 그러나 내가 했던 말 바꿨어요. 기자에게 우리가 직장 없고 활동한다고, 손들고 지리산까지 내려간 이야기했어요. 한국사람 친절하냐고 잘 태워주느냐고 물어봤고 나는 잘 태워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 매력에 빠진 외국인, 한국사람 친절해서 돈 없어도 한국에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나왔어요. 깜짝 놀랐어요. 한국 사람이 외국인에게 잘 해주고 특히 백인이 한국 멋있다고 생각하면 좋아해요. 그러나 이거 볼 때 이주노동자나 흑인이나 한국에서 어렵게 사는 외국사람 어떻겠어요? 외국인에게 관심 있을 때 피부색깔 중요해요. 선진국에서 왔으면 흥미로운 외국인이에요. 내가 백인이니까 내 의견에 관심 있어요. 그러나 이주노동자 저만큼 얘기할 수 없을 거 같아요. 이거 어떻게 깰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내 피부 때문에 관심 있냐? 묻고 싶어요.
그 기사는 <중앙일보>에 나왔고 ‘사이월드’도 나왔고 유명해졌어요. 우리 이 유명함을 이용하자고 했어요. 이 기사에 나온 것처럼 철없는 애들인 척 하면서 외국인보호소까지 히치하이킹 하면서 가는 거 카메라로 기록했어요. 청주 이주노조 지도자 있는데 가면서 가는 동안 우리 외국인 보호소 뭔지 모르는 척 했어요. ‘친구가 거기 갔는데 안 와요. 거기가 재밌나 봐요?’ 하면서 기록했고 홈페이지(http://www.seoulidarity.net)에 올릴 거예요. 재밌었어요. 기대하세요.”



정말 기대된다. 그는 오는 여름 애인과 함께 캐나다를 거쳐 네팔로 꽤 오랜 동안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그의 여행도, 앞으로의 활동도 역시 기대된다. 그의 말대로 지구별에는 참 많은 길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건 캐나다보다 한국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에요. 각 사람 자기가 사는 데에서, 일상에서 자기 욕망을 따라서 활동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내 욕망을 따라서 우연히 한국에 오게 되었고 여기 사람들 때문에 올 힘이 있었어요. 여기 와서 사람 만나고 이것저것 하게 되어서, 이제 여기서 재밌게 활동할 수 있으니까 여기 있어요. 그것 때문에 새로운 길 생겨요. 살다가 새로운 길 생기고….”



인터뷰 강곤 | 기자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강곤 |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