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단체탐방] 열 사람의 한걸음

갯벌배움터 그레

겨울의 마른 들판을 달려 평야가 끝나는 즈음 계화도가 있다. 계화도 초입에는 그레질 하는 여성, 백합, 도요새와 함께 ‘백합아 다시 만나자’는 계화도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새겨진 ‘갯벌 배움터 그레’가 자리하고 있다. 한때 많은 주민들과 환경, 사회단체 활동가들로 북적였을 그레. 마지막 물막이공사가 완료되고 일 년이 지난 지금의 그레는 겨울 들판만큼이나 황량하다.



‘항상 그레질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레의 고은식 활동가가 새만금 반대활동을 시작한 건 2000년, ‘새만금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이라는 단체가 계화도로 사무실을 옮겨오면서 부터다. “활동을 하면서 단순한 반대를 넘어 주민들 스스로가 바다, 갯벌이 있어서 우리가 있고 그것들 때문에 건전한 지역공동체가 된 게 아닌가, 이런 걸 알아가면서 반대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은식 활동가는 나의 생존권을 넘어서 환경과 생태에 대한 내면이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과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새만금에 반대하는 계화도 사람들’을 만들었다. 모임을 하다 보니 공간이 필요했고, 단체 사람들이나 주민들도 마찬가지 욕구가 생겼다. 이때 주민 중 한 사람이 옛날 김공장이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건물을 선뜻 내주었다. 새만금사업 반대 투쟁을 위해 각지에서 온 학생들, 단체 활동가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사무실로 단장했다. 길로 난 벽면에는 살아있는 갯벌과 바다 즉 그레의 소망을 담았다.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새만금의 대표적인 산물이 백합이에요. 이 백합이 주민들의 생계를 쥐고 있기도 하고, 새만금에서 백합이 영원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항상 그레질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레’라고 지었다며 고은식 활동가가 이름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레의 성장통


그레의 주된 목적은 제4공구가 막히기 전까지는 새만금 공사 중단과 지역공동체 활성화였다. 물막이 공사가 끝난 지금은 갯벌 생태계의 파괴와 해수유통의 필요에 대해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을 주 활동으로 하려 했다. 그러나 녹록치 않다.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서 주민들은 막막해 하기만 할 뿐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활동에 참여했던 활동가들도 떠나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줄었다. 대외적으로 새만금 문제를 알려내는 일들을 구상해보지만 주민들 중심으로 구성된 단체다보니 컴퓨터나 인터넷에 익숙지 않다. 물막이 공사가 완성된 이후의 패배감은 구체적인 계획이나 활동을 막고 있는 형편이다. 새만금이 아직 너른 갯벌일 때 갯벌배움터로서의 역할은 간단했다.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면 됐지만 지금은 갯벌배움터로 기능하기 위한 인공의 그 무엇이 필요한데 이 또한 막연할 따름이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공동체에 대한 그이의 고민에서 새로운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지각변동의 가능성이 보였다. 그레는 좌절과 패배가 아닌 성장통을 겪고 있다.



좌절과 재기의 반복


한때는 흥에 겨워 새만금 반대투쟁을 했더랬다. “2000년도에 한 2년간 공사가 중단되었을 때는 정말 신나는 반대운동을 했죠. 다 끝난 싸움을 하는 거 아니냐고 환경단체는 환경단체대로, 우리 주민은 주민들대로 착각을 하고 있었죠.” 고은식 활동가는 그때를 그나마 행복했던 활동으로 추억한다.
계화도 주민들은 환경예술가 최병수님이 만든 짱뚱어 솟대를 싣고 서울까지 도보행진을 진행했다. 그 짱뚱어가 아직도 새만금 갯벌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2001년 5월 24일 순차개발로 공사가 재개되면서 새만금 반대운동은 좌절과 재기의 반복이었다. 공사가 재개되자 당시 반대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나가 떨어졌다. ‘새만금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의 사무실에도 셔터가 내려졌다. 정부를 막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살기 어려운 상황이나마 개선할 수 있는 대체어장이나 재보상을 요구하자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하지만 맨손어업을 하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2년 해창산 국립공원을 파헤쳐 방조제공사를 한다는 소식에 여성들이 나섰다. 여성들의 투쟁에 지역 청년들도 합세했다. “그런 기운들이 모여서 삼보일배를 만들어 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삼보일배 끝나자마자 4공구를 농촌공사가 막아버렸죠.” 고은식 활동가가 허탈함을 드러냈다. 2003년 새만금갯벌에서 서울까지 새만금공사 중단을 촉구하는 삼보일배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정작 공사를 진행하는 농촌공사는 삼보일배가 끝나자 보란 듯이 공사를 재개했고, 사람들은 또 한 번 좌절했다. 다시 함께하던 사람들이 떠났다.


‘새만금사업 반대’를 외치던 환경단체들도 4공구가 막히면서 부분개발을 거론했다. 20%를 내어주고 나머지 80%의 갯벌을 살리자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어느 곳도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일부로 국한시켜 개발한다? 자칫 어민이 새만금사업의 주체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문제기도 했고, 우리 살자고 다른 쪽을 희생하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환경단체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희망을 끈을 놓지 않은 맨손어업 여성들


절망의 가운데서도 맨손어업을 하는 여성들은 새만금 문제를 사회에 알렸다. 2005년 2월 ‘새만금 사업을 취소 또는 변경하라’는 판결을 얻은 것이다. “1심에서 우리한테 유리하게 결론이 나서 굉장히 고무됐죠. 거기에 희망을 걸었는데 다시 2심, 대법원에서 완전히 무너졌죠.” 고은식 활동가는 또 한 번 좌절 속에 함께해온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법을 통한 새만금 문제 해결에 사활을 걸었던 환경단체들은 2심 이후로는 이제 새만금공사 저지 투쟁은 끝났으니 막힌 이후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운동방향을 잡아야한다고 돌아섰다. 언론들은 연일 새만금 완공 관련한 기사를 쏟아냈다. 주민들도 이제는 속상한 마음을 풀어내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끌어안고 끙끙 앓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건 여성들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2005년 10월 23일 청와대 일인시위를 시작했다. “여기서 서울로 일인시위를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자율방범대차로 부안에 모셔다 드리면 첫차로 서울에 가요. 그러면 10시 30분 쯤 되거든요. 우리가 서울지리 잘 모르니까 거기서 한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가 데리고 청와대로 가면 청와대에서 11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일인시위 하고 다시 고속버스터미널 데려다 주면 부안 오고, 대기하던 방범차가 태워 집에 오면 밤 10시 30분 되는 거죠.” 고은식 활동가는 힘들었지만 참 의미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생존권과 환경파괴에 맞서니 여러 곳에서 연대의 손길이 이어졌다. 2006년 2월에는 계화도만이 아닌 새만금 연안의 어민들과 대책위를 만들었다. 어민대책위는 물리적인 방법으로라도 새만금공사를 중단시킬 각오로 결성되었고, 지난해 3월 해상시위를 통해 한나절 공사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그레는 이 기나긴 새만금 반대 운동의 그리고 주민들의 구심점이었다.



악순환의 늪에 빠진 새만금 공사


주민들의 이런 사투에도 불구하고 방조제는 완공됐다. 뭇생명들이 넘쳐나던 갯벌은 3,40cm 깊이로 갈라지며 사막화되었다. 그리고 백합, 게, 도요새 등의 거대한 무덤으로 바뀌었다. 방조제가 망쳐놓은 건 비단 갯벌만이 아니었다. “내수면 안쪽의 물을 빼주면 한 달에 토탈 6~8일 정도는 갯벌에서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수면 밖의 배들이 이쪽서 소득을 얻는 패류가 있는데 여길 못 들어오니까 신고를 하고, 주민들끼리 서로 난리니 같이 죽는 거죠.” 이현숙 님은 방조제로 인해 주민들 간의 불화가 깊어짐을 안타까워했다. 예전의 채 5%도 안 되는 갯등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경쟁은 치열해지고 심지어 서로 신고하는 사태(현재 방조제 안쪽의 어로행위는 불법임)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잡자니 내수면에는 펌프배까지 등장했다.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갯벌을 파헤쳐 패류를 잡는 것으로 당장 많은 양을 잡을 수 있으나 갯벌은 망가진다고 한다. 주민들은 벌이가 없다보니 농촌공사 내 새만금사업단에서 진행하는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하는데 이도 문제다. 영세 어민들한테 혜택을 주겠다는 의도지만 한 달에 두어 번 나가는 걸로는 생계를 충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부 소수에 의해 좌우되다 보니 주민 간 불화만 부추긴다. 갯벌도 주민들도 끊임없는 악순환의 늪에 빠져버렸다.



희망은 사람이다
맨손어업을 하시던 이현숙, 고은식 님


계속 지기만한 싸움에 뿌듯한 감동으로 기억되는 순간은 없다고 한다. 그저 가슴에서 뭉클한 건 ‘어차피 우리야 여기 사는 사람이고 살아야 되는 사람인데, 갯살림 친구들이라든지 같이 와서 개인적으로 희생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는 이들을 ‘새만금 귀신’이라고 부른다. 6개월 간 급여도 없이 간사 역할을 한 고철호 님, 마지막 물막이 싸움 당시 손발 역할을 해 준 상용 님. 고마운 마음과 함께 새만금을 잘 지켜내야 되겠다는 각오도 새롭게 한다.


새만금 싸움에 나선 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생존의 위협이었다. 우리가 매일 호흡하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바다와 갯벌의 소중함을 몰랐다. 방조제 완공으로 사막화되어 가는 갯벌, 갯벌에서 죽은 생물체로 인해 거품띠가 생긴 바다. 바다가 힘들어지는 만큼 사람의 삶으로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 소중함을 배운다. “지역민들과 생활하면서 어려움을 느끼다보면 투쟁도 재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이현숙 님도 고은식 님도 새만금은 다시 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레는 다시 그 길을 만들고 있다.



사진 박김형준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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