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한상희의 쇳소리] 전봇대와 인권

길거리의 간이 광고판으로 충분하던 전봇대가 갑자기 최강의 정치적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불산업단지의 대로에 박혀 있던 전봇대는 대통령당선인의 한 마디로 모든 규제와 탁상행정의 표본으로 전락하다가 급기야는 무지막지한 기중기에 의해 뿌리째 뽑혀 버리고 말았다. 선박용 대형 블록의 통행을 방해한 혐의를 받던 이 전봇대는 자신도 모르게 국가실패의 전형으로 내몰리며 새 정부의 선진화 공약을 빛내는 반면교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징조작의 과정에서 정작 핵심논점 하나가 사라진다. 애당초 화학제품이나 비금속광물제품, 가구 등의 제조공장용으로 설계·시공되었던 이 공단에 어떤 연유로 선박용 대형블록 제조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는지, 그로 인한 공단운영·관리상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책임과 용도전환의 비용은 어떤 방식으로 획정되고 분배되었는지 등의 논의 자체를 은폐한 것이다. 실존을 규정하는 핵심 사안은 간과된 채 표피의 수준에서 교통을 방해하는 볼썽사나운 전봇대만이 부유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은폐와 조작이 인권의 현실에서는 일상사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질을 감추고 현상만 표출하며, 구조는 은폐한 채 사건만 부각시킨다. 노사간의 갈등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살피기보다는 파업절차의 위반이나 영업방해만 드러낸다. 한미FTA의 폐악은 접어둔 채 그 반대시위대의 교통방해만이 죄목으로 추출된다. 삶의 전부를 억누르는 폭력은 일상화되어 버린 채 그에 저항하는 단말마와 같은 행동만이 공권력의 관심대상으로 부각될 뿐이다.


실제 인권은 그 자체 구조에 맞닿아 있다. ‘국가로부터’ 혹은 ‘국가에 대하여’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국가 그 자체의 존재목적에서부터 권력의 작동과정까지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공적인 것이 된다. 비록 한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거나 소수자집단의 생활이 왜곡된다 하더라도 그 문제는 국가 전체의 문제이자 인류 모두의 관심사항이 된다.


하지만, 새 정부가 구상하는 실용적 선진화정책은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이런 당위론을 전혀 무용한 것으로 만든다. 실용을 강조하며 성과를 우선하고 공공성의 미덕보다는 생산성의 권력만을 중시하는 정책기조는 모든 갈등의 원천이 되는 구조의 문제를 그대로 은폐하거나 엄폐해 버린다. 탈이념의 기치 아래 자본의 해방이라는 하나의 이념만이 강제되며, 탈규제의 외침 끝에는 언제나 공공성이라는 국가목적의 소멸이 예정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동체는 고립된 개인으로 해체되어 시장으로 내몰리며 공적인 것은 여지없이 사사화되어 자본권력에 포획되어 버린다.


더러 현재의 국면을 두고 5공이래 진보진영의 최대의 위기라 한다. 하지만 실용의 기치 아래 괄호치기를 강요당한 인권적 가치의 문제, 7·4·7의 선진화 비전속에서 해체되는 인권레짐의 문제, 세계화의 물결 앞에서 존재기반까지 위협받는 공동체적 삶의 이념들-이 거대한 인권의 요청들이 꿈틀거리는 이 시점은 차라리 재구성을 위한 귀한 기회일 뿐이다.


이에 대불공단의 전봇대는 또 다른 상징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 시대의 인권운동이 현상에, 행동에, 표어에 침착되는 수준을 넘어 실용과 선진화로 가장한 저 거대한 구조를 들이받는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