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폭력의 구조

1. 구조적 폭력


폭력은 이론적으로 매우 난해하고 복잡한 대상이어서 이를 사고하려 할 때마다 매번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늘 실천적인 정치적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사고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된다. 하지만 가설적으로 구조적 폭력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문명화(civilization)는 폭력의 강도를 완화하고 그 빈도를 감소시키지만, 이는 개인·집단의 사적 폭력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국가의 폭력 독점을 통해 성취된다. 국가는 영토의 경계선을 구획하고 그 내부에서 법을 정초하여, 자신과 경쟁하는 권력세력들을 무력화시키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국가는 사적 폭력을 통제하고 외세의 침입을 방어하여 주민들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는 ‘권력’이기도 하고, 권력에 대항하거나 일탈하는 주민들에게 법의 이름으로 공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점에서 ‘폭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령 독일어에서 게발트(Gewalt)는 지배, 관리를 뜻하는 권력을 의미함과 동시에 강제력, 힘을 뜻하는 폭력을 함의한다. 국가는 합법적으로 정당한 힘(때로는 무력까지)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담당자로서 권력이자 폭력이다.


둘째, 자본주의는 신분제에 기초한 봉건제의 경제외적 강제를 제거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상품교환의 담당자로서 시민들을 형성시킨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실제로는 경제외적 강제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폭력으로 생산관계에 내부화된다. 공동체 내부에서 시장경제는 화폐를 매개로 하는 등가교환을 전제한다(이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의 교환이 부등가교환인 것과 다르다). 자본이 노동력을 구매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 또한 등가교환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생산관계에서 자본은 노동력을 초과착취함으로써 절대적, 상대적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다양한 전략들을 행사하며, 그로 인해 노동시장에서의 등가교환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노동력의 재생산(생존)을 보장받는 대신 초과착취를 위한 구조적인 폭력에 손쉽게 노출된다.


셋째, 근대 국가를 특징짓는 민족 형태는 가족·지역·종교·직업·성별 등 일차적 동일성(identification, 정체성)을 민족(nation)이라는 2차적 동일성으로 포섭하여, 일차적 동일성들 간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폭력을 예방하고 감축한다. 민족이라는 상징의 매개를 통해 일차적 동일성들은 사적 폭력을 제어하는 한에서 자유롭게 허용·유지될 수 있다. 이런 2차적 동일성으로의 통합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가족과 학교)의 호명(interpellation)을 통해 진행되며, 이와 더불어 권력과 지식의 결합을 통해 구성된 헤게모니적인 정상적 규범과 규칙을 개인에게 규율화하는 과정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개인성들은 억압되고 배제된다. 민족적 동일성으로의 통합 과정에서 나타나는 1차적 동일성들의 해체는 그 자체로 폭력적인 과정이며, 동시에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로 통합될 수 없는 타자들을 그 경계선 밖으로 추방·배제하는 폭력을 동반한다.


요컨대 국가가 독점하는 합법적 폭력, 자본주의적 초과착취, 상징적 동일성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상징적 폭력 등은 구조적 폭력의 대표적인 세 가지 형태이다. 이런 구조적 폭력들은 구조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폭력이라는 점에서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유지되고 강화된다. 그러나 이런 구조들은 각각에 고유한 폭력을 유발하고 있지만, 동시에 구조에 기능적이지 않은 폭력들(이를테면 합법적이지 않은 사적 폭력, 경제외적 강제나 불공정한 부등가교환, 일차적 동일성들 간의 폭력)을 일정하게 예방하고 완화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구조 외부의 폭력들이 범람하는 오늘날의 정세를 돌아볼 때 보다 분명해진다.



2. 구조 외부의 폭력


금융세계화는 배제를 일반화한다. 국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민족적 동일성 등에 포섭되어 있던 인구들이 그 외부로 밀려나서 ‘쓸모없는 인간’ 내지 ‘일회용 인간’으로 대량생산되는 것이다. 이는 자본의 철수와 거부로 착취조차 당하지 못해 인간 이하의 생존 상황에 내몰린 제3세계, 국가의 행정과 치안에서 방치된 게토와 같은 공동체 내부의 외부, 시민권이 없는(따라서 인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못하는) 수많은 이주민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을 고전적 맑스주의를 따라 ‘룸펜프롤레타리아’라고 할 수도 있고, 자율주의(Autonomia)에서 말하듯 ‘다중’(multitue)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지적하듯이 적나라한 생명의 위험에 노출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배제의 일반화는 구조적인 폭력에 구조 외부의 폭력을 새롭게 추가한다. 이를 비비오르카(Michel Wieviorka)를 따라 ‘폭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폭력은, 첫째 폭력의 세계화·민영화·사유화로 나타나는 정치이하(infrapolitical)의 폭력이다. 정치적 의미를 상실한 폭력, 아무 의미도 없는 폭력들이 무기판매, 마약거래, 인신매매 등 특정한 조직·집단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행된다. 둘째 정치상위(metapolitical)의 폭력이다. 양보할 수 없는 종교, 이데올로기, 윤리 등의 이름으로 정치를 초월한 가치들을 위해 일상적인 폭력과 테러가 확산된다. 물론 이 두 가지 유형의 폭력은 서로 융합하며, ‘절대악’과 타협할 수 없다는 의미과잉의 폭력은 사적인 이권을 차지하려는 의미상실의 폭력과 결탁한다.


또한 배제의 일반화는 발리바르(Etienne Barlibar)가 분석하듯이 구조적 폭력을 넘어서는 잔혹(cruauté)의 두 형태로서 초객관적(ultra-objectif) 폭력과 초주체적(ultra-subjectif) 폭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초객관적 폭력은 사회적 원인(특히 경제적 빈곤화)과 결부된 자연의 재앙들(전염병, 홍수, 지진 등)처럼 사회적 주체가 불분명한 ‘얼굴 없는 잔혹’ 내지 ‘주체 없는 폭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초주체적 폭력은 인종청소와 절멸을 낳는 인종주의의 확산처럼 다수의 사회적 주체가 연루된 ‘메두사의 얼굴을 한 잔혹’이다. 금융세계화로 인해 배제된 ‘쓸모없는 인간’ 내지 ‘일회용 인간’이 이런 폭력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일차적으로 연루되는 상황은 불가피할 것이다.


‘폭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나 초객관적이고 초주체적인 ‘잔혹’은 구조의 재생산에 필수적이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구조에 역기능적이기도 하다. 국가는 더 이상 헤게모니적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하며, 자본주의는 생산성 하락으로 공황을 향해 치닫고, 민족적 동일성의 해체는 적합한 사적·공적 윤리를 결여한 동일화로 나아간다. 이제 국가는 최소한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도 없이 노골적인 폭력을 행사해야 하고, 세계적인 자본은 금융 투기의 악순환을 반복해야 하며, 마치 홉스적 자연상태처럼 만인이 서로에게 늑대인 국면이 비로소 도래하는 것 같다.


구조를 재생산하는 구조적인 폭력이 비구조적인 폭력들을 일정하게 감축함으로써 작동한다면, 금융세계화로 인한 구조 외부적 폭력의 범람은 구조의 위기를 반영함과 동시에 구조 내부에서(그리고 구조를 변혁하기 위해) 전개될 수 있는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예컨대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선거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아예 배제된 이들에게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은 호사일 뿐이다. 새로운 폭력의 확산과 정치의 소멸은 서로가 서로를 부추기며 거대한 카오스(chaos)로 진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3. 폭력에 대항하는 정치


구조적 폭력과 구조 외부의 폭력이라는 폭력의 이중구속(double bind)은 그에 맞서는 저항의 정치를 사고하는 데에도 딜레마를 야기한다. 주지하듯이 폭력에 대항하는 정치는 크게 비폭력(non-violence) 정치와 대항폭력(counter-violence) 정치로 구분되어왔다.


대체로 도덕적 관념이나 종교와 결합하는 비폭력 정치는 모든 폭력을 파괴 내지 악으로 파악하고 어떤 조건에서도 평화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폭력에 대항하여 법에 호소하거나 법 자체가 폭력적일 경우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지만, 대개 도덕적 정당성의 원천을 ‘우리 안의 폭력성(파시즘)’을 제거하는 데에서 찾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자기수양이나 자기파괴를 지향하기 쉽다. 대체로 계급정치와 결합하는 대항폭력 정치는 부르주아적인 계급독재를 변혁하기 위해서 대항폭력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거나, 더 적극적으로는 폭력만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매개라고 역설한다. 이는 폭력과 법에 대립하는 대항폭력에 호소하거나 국가권력을 전복하는 무장봉기를 독려하고, 극단적인 경우 소수 엘리트의 테러리즘으로 귀결하여 저항의 정치 자체를 붕괴시키는 데 일조한다.


비폭력 정치와 대항폭력 정치가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쌍이라는 점은 어느 한쪽의 실패가 다른 한쪽을 부정적으로 정당화하는 악순환의 역사에서 예증된다. 한편으로 폭력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를 재정초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세력들과 장치들을 대항폭력을 통해 제거하지 않고는 정치를 재정초할 수 없다는 혁명적 정치의 이중적 명제 중에서, 비폭력 정치와 대항폭력은 각각 반쪽씩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68년 혁명을 배경으로, 비폭력/대항폭력의 이분법을 비판한 것은 아렌트(Hannah Arendt)였다. 아렌트는 폭력과 권력을 구분하고, 폭력이 아니라 권력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는다. 여기서 권력은 들뢰즈와 네그리가 구별하는 권력(pouvoir)과 역량(puissance) 중에서 역량에 가까운 개념이다. 아렌트는 권력의 핵심을 인민의 역량으로 파악하고, 이로부터 권력과 폭력을 구별하는 근거를 마련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역량(제도화된 권력이 아닌, ‘권력 이면에 있는 권력’)과 폭력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물론 아렌트는 폭력을 ‘물리적 폭력’으로 단순화시킨다는 약점이 있지만 이런 구별은 제도화된 권력을 비판하는 준거를 제공하고(인민의 역량에 기초하지 않는 권력은 폭력과 다르지 않다), 대중운동이나 혁명적 정치를 옹호할 수 있는 논리를 제시한다(인민들이 제휴하고 연대하여 행동할 때 바로 그곳에 정당한 권력/역량이 존재한다).


폭력이 지배하는 곳에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아렌트가 겨냥하는 것은 정치의 복원이다. 그녀에게 정치는 언어를 통한 교류와 토론, 그에 근거한 제휴와 연대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공적 영역이다. 그것은 러시아혁명의 소비에트, 프랑스혁명의 파리 코뮌, 미국혁명의 타운쉽(township)처럼 인민의 역량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시공간이다. 아렌트는 이런 평의회(council)에서 공적 영역의 모델을 발견하고, 이를 영속화시키는 데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요컨대 비폭력이나 대항폭력이 아니라, 인민의 역량에 기초한 영속적인 공적 영역만이 폭력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배경으로, 발리바르는 비폭력/대항폭력의 이분법을 비판하는 반폭력(anti-violence) 정치를 제시한다. 반폭력 정치는 특히 구조를 넘어서는 극단적 폭력들로 인해, “정치의 가능성을 부단히 삭제하는 주체적·객관적 폭력의 각각의 형태를 모든 곳에서 퇴치한다는 목표를 동시에 확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정치적 실천도 더 이상 사고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발리바르는 우선 인권의 정치를 재구성한다. 그가 말하는 인권의 정치는 자유와 평등이 양립할 수 없거나 서로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동일하다는 평등자유(égaliberté) 명제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정치에 대한 권리’를 법적·제도적 시민권으로 확립하는 시민권의 정치이다. 또한 인권의 정치는 민주주의의 한계에서 새로운 권리를 발명하거나 그런 한계들로부터 권리를 확장하면서 구성적 질서들을 형성하고 또 해체하는 봉기의 정치이기도 하다.1)


인권의 정치에 기초하는 반폭력 정치의 모델은 시민인륜의 정치이다. 시민인륜(civilité)은 시민권(citoyenneté)과 사적·공적 윤리(Sittlichkeit)를 동시에 함의하는 신조어이며, 시민인륜의 정치는 정치적 시민권과 사적·공적 윤리를 결합하여 다양한 동일성들 간의 갈등과 폭력을 해결하려는 정치이다. 이는 동일성들과 폭력의 극단적인 결합에서 비롯하는 증오와 잔혹을 전환시켜 사적·공적 실존에서 폭력을 감축하는, 엘리아스(Nobert Elias)의 말을 빌리자면 ‘습속 윤리의 문명화’를 지향한다. 요컨대 발리바르는 평등자유에 기초한 시민권, 동일성들 간의 폭력적 갈등을 제어하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인륜을 통해 폭력의 이중구속을 벗어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아렌트와 발리바르가 공히 지향하는 바는, 이를테면 비폭력이나 대항폭력에 선행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다. 폭력이 만연한 곳에서 정치가 소멸한다면, 폭력에 대항하는 정치는 비폭력이나 대항폭력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공적 영역의 구성이거나 평등자유를 시민권으로 확립하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반폭력이 되어야 한다. 특히 반폭력 정치를 위해서 그에 적합한 시민인륜을 구성해야 한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폭력에 대항하는 정치에는 구조 분석이나 전략·전술만이 아니라 윤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1) 이에 대해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는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명제는 계몽주의의 지속적인 급진화를 위한 영구혁명(permanent revolution)의 정식이다.”라고 평가하고, 지젝(Slavoj Zizek)은 “발리바르가 겨냥하는 바는 평등자유에 대한 ‘불가능한’ 요구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현실화하는 그 어떤 실정적 질서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정치적 행위자이다.”라고 논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