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폭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임재성에게

임재성에게


8월 중순에 휴가가 있어 며칠 고향인 부산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차를 타고 엄마와 광안대교 위를 지나고 있는데 저녁노을이 참 예쁘더라구요. 그래서 노을에 빠져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하늘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를 가리키며 “저거 봐라, 얼마나 멋지노” 하더라구요.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서로의 생각에 따라 바라보는 것이 많이 달랐던 거지요. 아마 이번 글의 의도도 그렇게 하나를 바라보는데 다른 시각을 가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 기대에 잘 부응(?)해야 할 것 같네요.


이번 주제가 폭력과 비폭력에 관한 것인데, 저에게 그 주제를 촛불집회에 비춰 얘기하는 데는 저에게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100번 넘게 진행된 촛불집회에 두 차례 밖에 안 나갔거든요. 물론 단 두 차례의 경험도 제게는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부시가 방한한다고 해서 나갔던 집회에서는 전경과 실랑이를 벌이는 통에 제 옷이 다 찢겨져 ‘헐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 친구들과 했던 얘기 가운데 하나는 “한국 사람들은 정말 착하다.”입니다. 이렇게 경찰들이 집회 자체를 못하게 하고 물대포 쏘고, 두들겨 패고, 끌고 가는데도 돌 하나 던지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런데 정말 한국 사람들이 착해서 돌을 던지지 않았던 걸까요? 임재성 씨가 제게 주신 글에서 “운동권 안에서 암묵적으로 깔려있는 저항폭력에 대한 긍정이 시민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저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가 광주항쟁이겠지요. 다른 예로 요즘 독도 문제가 한창인데 만약 일본 군함이 독도 근처에서 무력시위라도 한다면 임재성 씨가 말씀하시는 운동권이 무력으로 맞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시민들은 “죽은 이순신 장군이라도 살려서 맞서 싸우자.”라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강연을 가서 참여 하신 분들과 자주 해보는 것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흉내 내서 ‘전쟁은 ( )다’를 가지고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겁니다. 그러면 거의 100% 가까운 대답은 ‘공공의 적’‘재앙’‘눈물’ 등입니다. 그런데 얘기를 바꿔서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선인들이 독립 운동한다고 총을 들고 싸운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또 거의 100%가 ‘저항’‘권리’ 등의 대답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폭력/비폭력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황에 따른 가치로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폭력/비폭력 논쟁은 어제 오늘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어떤 사람들은 왕에게 상소를 올리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죽창을 들고 싸우자고 했지요. 일제강점기에도 어떤 사람들은 무장투쟁보다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일이 현실 가능하고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광주항쟁, 6월항쟁, 91년 5월투쟁의 과정에도 비슷한 일은 늘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운동할 때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화염병을 던지며 싸웠습니다. 하지만 화염병을 던질 때조차도 우리의 행동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나무가 빽빽한 산에 감나무가 두어 그루 있다고 해서 그 산을 감나무 산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다 위에 배 몇 대 떠있다고 해서 그곳이 바다가 아니라 조선소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회운동의 거의 대부분은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때론 언론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국가폭력과 힘으로 맞대결하는 일이 크게 비춰질 때도 있기는 하지만, 사회운동이 가진 99.999%의 힘과 노력은 다른 이들과 어울리고, 토론하고,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일에 쓰입니다. 이것을 두고 ‘운동권=폭력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임재성 씨가 말씀하셨듯이 사회운동이 책임감 있게 논쟁을 하려면 먼저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을 한 상태에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을 터부시해왔던 지배적인 분위기를 지적하셨지만, 이것을 거꾸로 물어서 그러면 폭력을 사용한 경우가 얼마나 있었는지를 차분히 되묻고 싶습니다. 만약 저의 생각대로 폭력을 사용한 것이 극히 제한적인 사례였다면 ‘과거의 운동이 폭력적이었으니 이제 새롭게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지 않는 것이 될 겁니다.


다음 얘기로 그러면 제한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 얘기해 보지요. 첫째, 폭력을 사용할 경우 여성과 장애인 등이 배제되는 상황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건 꼭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폭력의 사용 여부보다는 한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사고와 행동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경과 맞닥뜨린 상황에서 여성과 장애인들도 직접 방패를 잡고 흔들고, 전경의 방패에 전동 휠체어를 밀어 붙이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여성과 장애인 또는 여성적이라는 것이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 또한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여성과 장애인들도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힘을 사용합니다. ‘남성=폭력’‘여성=비폭력’의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폭력이 사용되는 상황에서 여성과 장애인의 배제 문제는 폭력의 사용 여부 이전에 여성/남성, 장애인/비장애인의 사회연대 의식을 먼저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다수의 참여 문제입니다. 힘과 힘이, 폭력과 폭력이 충돌하게 되면 다수의 참여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지적에 저 또한 동감합니다. 특히나 크게 한 판 붙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자는 식의 자기만족적인 태도는 사라져야겠지요. 하지만 거꾸로 폭력의 사용 여부가 다수의 참여를 결정짓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촛불집회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돌을 던지거나 무언가를 부수지 않아도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5월이나 6월에 비해 아주 많이 줄었습니다. 거꾸로 노무현 정권 시절 한미FTA협상을 중단하라며 경찰들과 치고 박고, 언론에서 연일 폭력시위라고 떠들 때도 많은 사람들은 참여를 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는 폭력의 사용 여부가 아니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수언론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폭력을 주장했던 경우 또한 그 핵심은 폭력을 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아니라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벌어질 수 있는 이후 상황에 대한 우려가 더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폭력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폭력만으로 세상을 바꾼 적은 없지만 폭력도 때로는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얘기를 쉽게 하기 위해 이라크를 예로 들어보지요.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2005년에 이라크에서 총선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원했던 것은 총독부 체제의 유지였는데 왜 이라크인들이 직접 참여하는 선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거기에는 이라크인들의 거대한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그 저항 속에는 미국의 점령을 뒤흔드는 무장투쟁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006년 7월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해서 한 달 동안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8월에 결국 이스라엘은 철수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압력 때문에요? 이스라엘의 양심 때문에요? 제가 보기에는 국제사회의 압력 때문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양심 때문도 아니고 레바논인들이 이스라엘군과 치고 박고 싸웠고 결국 이스라엘이 패배해서 물러난 겁니다. 이라크에서 선거를 했다고,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에서 물러났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당시의 상황을 폭력을 사용해 바꿀 수 있었던 거지요.


지금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라는 것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우리 집에 강도가 들면 경찰도 불러야 하고, 옆집에 불이 나면 119도 불러야 하고, 가난해서 병원에 못 가는 사람이 있으면 국가가 나서서 치료를 해줘야지요. 혹시 국가라는 말이 부담스러우시면 그것을 사회연대기구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든 하나의 사회는 사회 전체의 필요를 위해 무언가를 할 집단이 필요합니다. 결국 문제는 그 집단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집단을 누가, 어떤 목적에서, 어떤 방법으로 운영하느냐 일겁니다.


국가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국가가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시민들이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폭력을 어디를 향해 사용하느냐가 문제이겠지요. 지금은 국가도 그렇고, 시민들도 그렇고 특정 소수의 부와 권력 또는 자기 욕망만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폭력을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면 저는 100% 공감합니다. 하지만 때론 사회의 정의와 시민의 자유를 위해서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 또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 운동이 폭력/비폭력 논쟁에 보다 책임감 있게 나서기 위해서는 부당한 국가폭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과 성이 다르다고, 인종과 민족이 다르다고 까닭도 모른 채 두들겨 맞지 않고, 또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도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은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도구이지만 우리가 살려야 할 것은 현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