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하루 세끼 밥 위해 몸성하면 그게 제일이지요”

40년 연탄배달 배창일 씨의 새해 소망

봄날 같은 날씨가 불안한 겨울이다. 좋은 세상 오기 전에 지구가 먼저 죽겠구나, 말초신경까지 곤두서 있던 2008년 12월 18일, 간만에 한파가 몰아닥쳤다. 연탄배달 40년, 예순아홉의 배창일 씨를 만나러 가던 날은 영하권으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목도리 칭칭 동여매고 수원 행궁 골목을 찾았다.


방금 배달을 하고 오는 길이라 손등에 시커먼 탄재가 묻어 있었다. “온통 새까매서…”, 먼지를 툭툭 털면서 멋쩍게 웃으셨다.


“요즘 연탄배달 주문이 많은가 봐요?”라는 질문에 “아무래도 경기가 안 좋다보니 예년보다는 배달 일이 많아요.”라며 허허허, 웃으셨다. 요즘은 하루에 500장정도 배달하는데, 추워지면 주문량이 곱절로 늘어나기도 한다.


연탄 소비량의 80%는 가게. 하루 난방에 연탄 3장이면 족하다. 석유 값도 오르고, 경제사정도 안 좋다보니, 연탄만큼 훌륭한 연료도 없다. 가정집에서도 석유보일러를 뜯고 연탄보일러를 놓는 집이 늘고 있어, 작년보다는 부쩍 바빠졌다고 한다.


연탄 한 장에 430원에서 450원, 작년 380원이던 연탄 값도 올해는 꽤 올랐다. “겨울에 없는 사람들은 살기가 더 힘들잖아요. 근데 경기도 안 좋고, 연탄 값이 많이 올라서 괜히 제가 죄송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또 허허허 웃으셨다.


원래 고향은 서울,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홉 살 때 엄마랑 피난 내려와 정착한 곳이 수원이었다. 간신히 한글만 떼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시절, “실공장에 다녔는데 월급이 적어서 도저히 먹고살 수가 없었어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연탄배달이 더 돈이 된다고. 그 길로 시커먼 연탄 나르며 여태껏 살아왔네요.” 또 웃으신다.


달랑 리어카 두 대로 시작한 연탄배달, 그가 실어 나른 연탄만 해도 작은 산 하나는 옮겼을 정도다.


“예전에는 손으로 연탄을 찍어서 그리 단단하지가 못했어요. 오르막길 가다가, 또 연탄광에 쌓다가 떨어뜨려 깨뜨리는 일도 많았는데… 한평생 이 일만 하다 보니 이젠 연탄 쌓는데 도가 텄죠.”
요새 나오는 연탄은 크기는 작아졌지만 단단해졌고, 19공탄에서 22공탄으로 구멍 수도 늘어 화력도 좋아졌다.


아침 6시 연탄가게 문을 연다. 연탄 땔 일 거의 없는 여름철에도 예외는 없다. “집에선 일도 없는데 뭐 하러 꼭두새벽에 나가냐고 하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여요.” 몸에 인이 박힌 것이다.


작년부터 그는 먼 길을 돌아서 출근한다. 행궁 골목이 삶터이자 일터이자 고향이었다. 그런데 행궁 복원사업으로 인근의 집들을 부수고 새롭게 단장하겠다는 지방정부의 새마을운동 식 문화정책으로 그의 집이 철거됐다. “시에서 하는 일인데 별 수 있었겠어요?” 약간의 보상금 받고 화성시 정남으로 이사한 게 작년이다. 지금도 새벽 첫 차를 타고 수원까지 온다. “여기가 고향이에요. 가게도 여기에 있고,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고, 일이 있건 없건 첫 차 타고 그냥 나와요.”


배운 거 없고 가진 거 없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한 번도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장가도 가고 두 자식들 키우고 여태껏 살아온 게 다 연탄배달일 때문이었는데요. 고단하지만 연탄 한 장으로 사람들이 따뜻해진다고 생각하면 보람도 느껴요.” 한 평생 연탄배달로 오른쪽 팔뚝은 비틀어졌다. 무릎 관절도 나빠졌다. 그래도 지금껏 먹고 살 게 해줘서 고맙기만 하다고 한다.


“새해 소망이요? 나 같은 사람보다는 더 배우고 잘 난 사람들한테 물어보시지.” 까만 손등이 신경 쓰이는지 인터뷰 내내 손을 만지작만지작 하시더니, 급기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또 웃으신다.


“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마음 아프죠. 사실 돈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닌데… 근데 있는 사람들은 더 돈 벌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담배꽁초라도 남의 것이면 손대면 안 되죠.” 그는 사람들이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암만 돈 많아야 뭐해, 하루에 밥 세 끼밖에 더 먹어요? 그 세 끼 밥 위해 몸 성하면 그게 제일이지요.”


두 평 남짓한 연탄광에는 1600여 장의 연탄이 빼곡하다. 천장에는 사다리며 고무함지며 장도리 같은 연장들이 그의 성품처럼 정갈하게 놓여 있다. 짬짬이 나이든 분들 집에 가서 지붕이며 하수도며 고장 난 곳을 수리해준다. 그는 이렇게 연탄배달하며 집수리해주며 이곳으로 마실 온다고 한다.


40년을 ‘연탄아저씨’로 불리며 행궁골목을 누볐던 그의 삶이 결코 녹녹하지만은 않을 터인데도 눈빛이 맑고 순수한 이유가 여기에 있나보다. “호주머니에 술 한 잔 걸칠 만큼만의 여유만 있으면 그걸로 족하죠.” 또 허허허 웃으신다.


인터뷰-노영란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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