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오월이 아닌 광주의 기억

#1. 기억은 두려움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시 외곽에서 들려오던 총소리가 점점 도청 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 날 새벽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락방에 숨어서 그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장갑차의 캐터필러와 헬기의 바람개비 소리가 캄캄한 새벽하늘을 찢었다.


계엄군들이 소지한 M16 소총과 시민군들의 칼빈 그리고 M1 소총 소리는 누구나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시민군들의 총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27일 새벽 여명이 밝아왔다.


그날 오전 내내 시민들의 시신을 실은 군용차량과 쓰레기청소차량이 시내를 빠져 나갔다.


그리고 군 당국은 도청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에 연막소독을 뿌려대며 광주 오월의 진실을 감추려고 갖은 애를 썼다. 광주오월항쟁이 쏟아놓은 검붉은 피는 그렇게 연막소독 밑으로 가라앉았다.


광주엔 아무도 없었다.


사람다운 사람은 지난한 도피생활로 들어갔거나 또는 죽었거나, 끝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은 잡혀가서 상무대 군 영창에 갇혀 모진 고문을 감내해야 했다. 다만 나 같은 한갓 쭉정이나 다름없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오월광주의 패배와 슬픔을 참아내야 했다.


우리는 다시 새롭게 기억해냈다.


27일 새벽 여명이 밝아오면서부터 우리는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듯이 오월광주 10일 간의 항쟁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했다. 패배와 슬픔으로 뒤덮인 핏빛 오월 광주의 진실을 바라보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진실은 항상 두려움 너머에 빛나고 있다.



#2. 기억은 투쟁이다


진실은 지극히 단순하다.


5월 21일, 마수 같은 계엄군을 광주 시내에서 쫓아 내버린 우리는 시민공동체를 만들었다. 시민군들이 자발적으로 치안을 담당하고 이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정상화하려고 계획했다. 모든 관공서도 문을 열어 제 역할을 하도록 계획했다. 이미 시민들에 의해서 생필품을 나누고 팔고 사는 시장은 이곳저곳에 형성되었다. 많이 가진 자들은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 놓았다. 시민들이 도청광장에 모여서 직접 선출에 의해 우리들 시민공동체의 대표 시장을 뽑을 계획도 세웠다. 시민들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이 시민공동체 기간 동안 강절도 강간 등 크고 작은 범죄 사건이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 한 건의 교통사고도 없었다. 단 한 건의 화재사고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공동체가 바로 시민들 스스로 피를 나누어 세워진 해방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이 진실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광주에 투입된 신군부의 학살을 모든 시민들이 힘을 합하여 물리쳤다는 자긍심이었다.


5월 17일, 신군부 악마들은 국민들이 정상적인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막아보려고 계엄령을 확대하고 즉시 민주인사들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민주화를 외치는 광주시민들을 폭력으로 탄압했다. 전투경찰에서 계엄군으로 바뀌었다. 최루탄에서 몽둥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5월의 찬란한 햇살 아래 그들의 대검이 번쩍이며 시민들의 배와 가슴을 갈랐다. 뒤이어 조준사격을 감행했다. 군인들 개개인의 도덕과 양심은 집단과 상명하복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한 발짝도 발휘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시스템 안에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악마가 되었다. 이것이 군인들을 동원하는 국가폭력이 대량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이유이다.


이 무서운 대량학살의 국가폭력을 기억하는 일은 ‘투쟁’이다.


오월광주 이듬해인 1981년엔 시민들이 묻혀 있는 망월동 묘지의 참배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몇몇이 골방에 모여서 오월광주 1주기 추도식을 가졌다. 이 추도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명이 잡혀가 두들겨 맞고 조사를 받았다. 항쟁 당시의 자기체험을 이야기 한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시대였다.


1982년 2주기 추모식을 하기 위해 시민들은 망월동 묘지로 몰려갔다. 참배 행렬을 막아선 전투경찰들과 투석전을 벌이다가 산으로 쫓겨 가거나 잡혀가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부지기수였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구내 옥상에 올라 밧줄을 타고 광주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끌려갔다. 시내에서 광주진상을 밝히라고 악을 쓰는 시민이 경찰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끌려갔다.
광주의 문화패들은 광주의 기억을 연극으로 노래극으로 만들어 공연했다.


소설가들과 시인들은 광주의 분노와 희망을 노래했다.


화가들은 광주학살을 판화로 수없이 인쇄하여 뿌렸다. 그리고 어디론가 잡혀가서 두들겨 맞아 반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돌아온 그들은 새로운 진실에 눈을 뜨게 되고 작업에 더욱 몰두했다. 누군가는 광주의 진실을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죽었다.



#3. 기억은 희망이다


이 분노의 기억을 ‘희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대’의 힘이 필요했다.


광주는 더 이상 죽음과 패배의 도시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공유했다.


광주에서 만들어진 연극과 노래극, 시와 소설, 그림과 판화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복사되어 전시 공연되었다. 슬픔을 이겨낸 유가족들이 투쟁의 맨 앞에 섰다. 부상자들이 휠체어를 타고 뒤를 따랐다. 그들의 담담한 증언이 이어졌다.


1985년 이후로는 광주의 진상을 말하는 것이 더 이상 금기 사항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고 그 배후는 미국의 한반도 식민통치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 작용했다는 사실이 공식화되었다.


우리가 그토록 마주하기를 두려워했던 한국 현대사의 진실이 발가벗겨진 채 우리들 앞에 그 누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왜곡되고 비틀어진 역사를 이제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해 우리들은 각자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모두 내어놓아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우리는 목표를 세웠다.


‘한반도의 오월化, 오월의 한반도化’


이 목표를 위해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명성이 있는 사람은 명성을, 학문이 있는 자는 학문을, 예술가는 예술을, 힘 있는 자는 힘을, 돈이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은 돈을 내놓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 희망을 공유했다. 그리고 이 희망의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우리는 그렇게 1987년 6월 시민항쟁을 통과하면서 우리들이 세웠던 목표가 일정 정도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4. 기억은 권력이다


이젠 누구나 오월광주를 자유롭게 기억했다.


한반도 현대사의 모든 질곡은 분단에서 비롯되어 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오월항쟁’은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반핵반전 평화, 그리고 조국통일’이라는 목표는 강고한 전쟁이데올로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세우기엔 중과부적이었다.


매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드는 오월행사 비용의 일부를 광주시로부터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청광장도 오월행사의 장으로 그냥 내주었다.


이제 기억하는 일은 투쟁이 아니라 ‘놀이’가 되었다.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현실의 이해관계로 돌변했다. 누구든지 모여 일종의 ‘오월관련단체’를 만들어 관이나 지방의 업체들에게 드밀며 이런저런 행사비용을 요구했다. ‘오월’을 머리띠에 두르고 제도정치권의 지분을 요구했다. 누군가는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어떤 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오월’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오월’을 드밀며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죽여야 했다.


‘오월’은 권력이 되었다.



#5. 기억은 타락이다


오월광주 학살의 원흉 전두환과 그 일당들 몇이 감옥으로 갔다. 그 대신에 학살의 진실은 오리무중 속에 들어갔다. 진실이 완벽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로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망월동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이 되고 죽은 자를 위해서 궁궐 같은 집이 지어졌다. 오월당사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도 이루어졌다. 누군가는 오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기 주변사람에게 돈을 받고 오월 부상자로 꾸며서 유공자를 만들었다. ‘가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월관련 단체들끼리 이런저런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불화와 싸움이 잦아졌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이런 오월의 타락상을 직시했다. 그들은 ‘광주오월이 바로서야 한반도 민족민주운동이 바로 설 수 있다’라는 책임감으로 오월재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이미 오월재단도 주변의 이해관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몇몇 인사들은 오월재단의 이사장 직함을 서로 차지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 직함마저도 개인적인 출세의 방편이 되었다.


우리는 6백만 명이 학살되었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홀로코스트가 하나의 권력과 상품이 되면서 다른 민족들이나 사람들이 겪었던 숱한 전쟁의 기억이 사라졌다. 중국에서만 2천만 명이 생목숨을 빼앗은 일본의 전쟁학살도 이 홀로코스트의 ‘전쟁 상품’ 뒤에 가려지고 말았다. 작년 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도 이 ‘홀로코스트 상품’에 가려져버린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쏘아대는 폭탄의 화염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언덕에 올라서 망원경으로 구경하며 낄낄 웃어대는 이스라엘의 청춘남녀들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의 총리대신들은 침략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을 군신으로 받드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싶어 안달이다. 다시 말해서 ‘홀로코스트 상품’이 가려주는 틈을 이용해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누군가가 오월재단에게 절실하게 요구했다.


“국가폭력을 이겨내고 그 진실을 쟁취해낸 오월의 명예는 제주 4.3학살과 여순학살 등에 눈을 돌려 그들 과거 국가폭력이 빗어낸 비극을 벗겨 내주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그러나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이미 반관(半官)이 되어버린 오월광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기엔 벅찬 일이다. 그렇다. 대통령 선거 때만 되면 후보자들이 앞 다투어 참배하는 ‘오월광주’에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광주’는 희망을 잃어버린 늙어빠진 권력의 추한 모습이다. 나랏돈을 받아서 치루는 ‘오월 추모행사’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문화행사들 속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는 없다. 원래 지구상의 어떤 정부도 환경과 평화와 인권을 스스로 지켜주는 경우는 없다. 하물며 자신들이 저지른 국가폭력의 진실을 스스로 거론할 수 있겠는가. ‘광주오월’도 이제 국가의 제사(祭祀)가 되었다. 제사를 지내는 국가의 미래는 절대 밝지 못하다. 국가가 만드는 제사는 무엇인가 항상 불순함을 숨기고 있다. 그 제사의 궁극적 목적인 희망을 국가는 끊임없이 갉아먹기 때문이다.


미래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기억’은 현실의 각종 이해관계의 놀이터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희망이 거세된 기억은 타락이다. 그 기억에 투입되는 모든 이벤트성 행사는 순간적인 마약에 불과하다. 타락한 이후의 기억은 그 기억이 그토록 증오했던 국가폭력의 모습을 오히려 절묘하게 닮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