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먼저 그만두진 않으렵니다”

기륭 해고 노동자 1650일의 삶과 투쟁

지하철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탈까 잠시 망설였지만 영하 15도의 날씨에 버스가 아닌 걷기를 청한 건, 가슴에 돌덩이처럼 들어앉은 미안함에 단 몇 분이라도 당신들과의 만남을 미루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십분 남짓 걸었을까, 이제는 공사장이 된 옛 공장부지 앞으로 컨테이너 박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3평 남짓한 가건물 안으로 아침 출근투쟁을 마치고 옹기종기 모여 추위를 녹이는 당신들이 보입니다. 염치없게 아랫목을 내어 받고는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지 그러셨냐고 슬쩍 던져봅니다. 그나마 요즘은 주 5일제라 토요일은 쉰다는 너스레가 돌아옵니다. 벌써 5년째 굳게 닫힌 문 앞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 중인 사람들. 기륭의 해고된 노동자들입니다.



파견노동자의 눈물 위에 세워진 기륭의 성공 신화


“2005년 2월에 입사해 그해 5월 4일까지 근무했어요. 4월 30일에 일 잘하고 퇴근했는데 핸드폰 문자로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시오라는 문자가 왔어요. 장난인가 싶었는데 그러기엔 너무 섬뜩한 거예요. 나오지 말라면 나가지 말아야 하는데, 정말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5월 1일은 노동절이니 쉬고 5월 2일 아무 일 없다는 듯 같이 해고된 종희랑 출근을 했어요. 일반 직원들은 아무도 모르고 나한테 문자를 보낸 사람들과 문자를 보내게끔 한 사람들만 내가 해고됐는지 알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일을 하는데, 반장이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보더라고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계속 우리를 보기만 했어요. 무시하고 다음날도 출근했고 그 다음날도 출근했는데, 점심에 반장이 부르더니 왜 계속 나오냐는 거예요. 우리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런 문자를 보낸 거냐, 이유라도 알고 싶다고 하니까 보여준 게 A4용지 한 장인데 이름, 번호, 소속, 해고 사유 이렇게 해서 15명의 이름이 있는데 내가 8번으로 적혀 있더라고요. 오석순 하고 잡담 이렇게, 정말 이렇게 딱 두 글자만 적혀 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죠. ‘아니 이럴 수가, 이게 말이 돼.’ 우리 공장은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처음 입사했을 때 동료들이 맨 처음 한 얘기가 여기는 작업하면서 얘기하면 잘린다고, 그리고 일하다가 반장하고 눈 마주치면 잘린다고 그러니까 말도 하지 말고 절대 반장하고 눈 마주치지 말라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내가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말을 건다고 해도 옆 사람이 받아쳐주지 않아요. 그러면 잘리는 거를 그 사람도 잘 아니까. 대화가 안 돼요. 그렇다고 혼잣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일하면서 잡담을 하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어요. 아니 사실 관리자들만 잡담을 해요. 근데 사유가 잡담이라니 납득할 수가 없었죠. 따졌죠. ‘내가 언제 잡담을 했냐. 어떤 얘기를 했냐. 너무 억울하다. 정말 뭔가를 잘못해서 귀책사유로 해고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정규직 시켜준다고 특근에 철야까지 열나게 시키더니 이게 뭐냐.’ 이랬더니 반장이 얘기를 하는데 들어보니 제가 일하는 것과 관련해 몇 마디 건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잘린 거예요. 니가 관리자도 아닌데, 니가 그렇게 똑똑하고 잘났냐? 니가 왜 지시를 하냐? 이런 식으로 반장이 받아들이고 저를 자른 거예요. 정말 말로만 듣던 비정규직의 설움이 이런 거구나 싶었죠.”(오석순)


“저도 같은 날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어요. 구로공단이 다 그렇지만 기륭전자는 다른 사업장과 비교해도 해고 문제가 아주 심각했죠. 하지만 나만은 아니겠지, 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해고되는 거겠지,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해고될 때 15명이 동시에 해고됐는데, 사람들 사이에 관계도 좋고 인정도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었어요. 해고가 보편적 문제구나, 나한테도 닥칠 수 있는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못나서 부족해서 아니면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 내가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괴감도 많이 생기고. 저랑 같이 해고된 분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비참해 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왜 이렇게 당해야 할까, 나는 한 치의 잘못도 없는데, 눈곱만큼도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윤종희)



매출 1700억 원, 당기순이익 220억 원이라는 중소기업 기륭의 신화는 파견 노동자들의 눈물과 한숨 위에 세워졌습니다. 생산직 직원 300여 명 중 파견직 노동자가 250여 명에 달하건만, 파견직 노동자들은 투명인간이었습니다. 눈길은 고사하고 인사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월급은 최저임금 기준보다 겨우 10원 많은 64만1850원에 불과했고 하여 매달 70~100시간의 잔업과 특근을 마다하지 않고 일했지만, 여성이기에, 파견직 노동자이기에 월급봉투는 항상 남성보다, 정규직보다 얇았습니다. 그래도 묵묵히 일했던 건 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학비에 생활비를 벌어야했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사는 열심히도 잘랐습니다. 건의사항을 말했다고 잘랐고,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잘랐습니다. 오늘은 무사히 보냈다며 특근까지 마치고 회사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휴대전화 문자로 ‘더 이상 나오지 말라’며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그렇기에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시작한 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자신이 일회용 소모품이 아님을,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생산라인을 멈춘 분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별과 비인간화가 공장에서 비일비재했어요. 집에서는 존경받는 엄마고 아빤데 회사에만 오면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 그 비참함을 감수하고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사는 거죠. 근데 그렇게 항상 노예처럼, 기계처럼 살 수는 없다 싶었어요. 한참 눈치를 보다 몇 명에게 노조가 필요하지 않냐고 말했어요. 사람들이 다 겁낼 줄 알았어요. 근데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거예요. 너무 기뻤죠.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10명밖에 안되니까 사람들을 더 모으자고 했어요. 그 다음에 모였을 때 30명이 모였어요. 대단했죠. 그 30명이 한두 달 동안 조심스럽게 준비모임을 하고는 2005년 7월 5일 날 노조 결성보고대회를 하기로 했어요. 공장은 오전 10시가 쉬는 시간이에요. 미리 얘기하면 새어 나갈 수도 있으니 사람들한테 9시 30분부터 모이라고 하는데 노동조합이라고 얘기하지 말고 중요한 일이 있으니 모이자라고 얘기하기로 했죠. 9시 30분부터 전달해서 10시에 모이기로 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30분이 긴지 몰랐어요. 얼마나 떨리던지……. 10시가 딱 됐는데 너무 조용한 거예요. ‘불발인가보다’ 한숨을 쉬었죠. 그때 우리가 정말 준비 많이 했거든요. 볼펜 100자루 준비하고, 노조가입원서 200장 준비하고, 짧은 시간 안에 해야 하니까 바빴죠. 근데 조금 있으니까 우당탕탕 난리가 난 거예요. 하나 둘 모이는데 금세 200명으로 늘어났어요. 사람들은 노동조합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온 거죠. 뭔가 마음속의 분노가 많았던 거예요, 사실은. 제가 10분 동안 우리에게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죠. 이제 노동조합 생기니까 해고 안 당하고 마음대로 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눈물 흘리시는 아주머니들도 계셨어요. 노조 가입원서를 돌렸는데 그 자리에서 150명이 가입하셨어요. 숨 가쁜 30분이 지나고 쉬는 시간이 끝났는데, 보통 쉬는 시간 끝나고 자리에 앉아 있지 않으면 큰일 나거든요. 사람들이 시간 맞추려고 뛰다가 다치기도 했는데, 노동조합이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여유 있게 가시는 거예요. 사측이 꼬투리 잡으면 안 되니까 부지런히 가시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몇 분은 끝까지 가입원서 쓰고, 또 몇 분은 종 울렸는데도 그냥 슬슬 가는 거예요. 그 때 한분이 와서 그러는 거예요. 쟤네가 와서 뺏어갈 수도 있으니 가입원서를 허리춤에 차고 있으라고. 알았다고 하고 내려가시라 했죠. 모든 게 완전 감동이었죠. 50명만 넘으면 성공이다 이랬는데 200명이 모이고 그 자리에서 150명이 가입했으니까. 나중에 50명이 더 가입을 해서 조합원이 200명이 됐죠.”(김소연)



신생노조가 맨 처음 한 일은 현장을 점거하고 생산라인을 멈추는 일이었습니다. 끝 모를 해고의 행렬 속에서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해고되기 전에 싸울 것인가, 해고된 후에 싸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길 줄 알았어요. 노동자들이 다 모여 노조 만들었지, 파업에 들어갔지. 우리가 주요 부서를 점거했기 때문에 생산 활동이 완전히 중단됐거든요. 그리고 회사가 불법파견을 하고 있다는 결정이 지방노동위원회에서 파업한달 만에 내려졌으니 조건상으론 거의 완벽한 거였죠. 회사가 손해를 감수하고서 길게 가겠냐, 잠시라도 해고를 중단하고 교섭에 나올 거다. 그리고 그게 아니면 다 끌어낼 것이다 이렇게 봤어요. 근데 둘 다 하지 않은 거죠. 우리 기세가 있고 감당이 안 되니까 끌어낼 엄두는 못 낸 거죠. 하지만 회사는 계약해지를 감행하면서 해고를 중단하지도 않았어요. 회사가 작심을 한 거죠. 그리고 그것은 당시가 노무현 정부였는데 정부쪽 의지도 작용을 했던 거였고. 또 한 가지 문제는 노동자들이 워낙 근속연수가 짧고 비정규직이다 보니까 퇴직금도 없잖아요. 모아놓은 돈도 없고. 그러니까 생계가 너무 막막한 조건에서 대부분이 오늘까지 철야농성하고 내일 못나오고, 그러면서 미안하니까 말도 못하고 그런 상황들을 반복됐죠. 결국 점거농성 55일 만에 공권력에 의해 쫓겨났어요.”(김소연)



죽는 것 빼곤 다 해본 기륭 해고 노동자의 5년


‘죽는 것 빼곤 다해본 사람들’이란 수식어는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회사 앞에 천막을 쳤고, 회사 철문에 쇠사슬로 몸을 묶었습니다. 고소와 고발,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경찰서와 법원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습니다. 국회를 점거하기도 했고, 곡기를 끊은 채 수십 미터 높이의 구조물에 올라 보름 넘게 고공시위도 해봤고, 삼보일배를 하며 애끓는 호소도 해보았습니다. 예수의 두 배, 94일이라는 초유의 단식도 기륭 노동자들, 당신들이 쓴 역사였습니다. 참으로 여한 없이 싸운 시간이었지만 또한 참으로 서럽게 버텨온 시간이었지요.



“단식은, 회사나 정부보다는 우리를, 우리를 지지해주던 많은 분들을 정말 괴롭게 했던 투쟁이었죠. 어느 날은 이소선 어머님이 와서 ‘정말 죽으려고 그러냐?’면서 ‘짐 보따리 다 내놓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전태일 열사도 그러다 갔다고…….”(김소연)



툭 터져 나온 눈물이 말을 막습니다. 너무 담담하게 인터뷰에 응해서 저 역시 담담하게 했던 당신이 울고 있었습니다. 저도 울어버렸습니다. 2008년 6월부터 시작된 단식이 50일을 넘기고 또 70일을 넘기면서 저 역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제 몸의 병을 주체하지 못해 병가를 얻은 때였건만 저의 하루는 당신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되곤 했습니다. 하루가 일주일 같던 그해 여름. 지켜보는 이의 마음도 그리 타들어갔는데, 두려웠는데 온몸으로 그 시간을 견뎌야했던 당신들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2008년 봄 천일투쟁을 시작하고 난 뒤에) 회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교섭이 아닌 면담으로만 보겠다는 거예요. 우선 그것부터 해결하자며 고공농성을 했죠. 새벽에 서울 시청 앞 조명탑을 최영미 동지가 올라가는데, 그 친구가 고소공포증이 심했어요. 울면서 노래 부르면서 올라가는데……. 그 농성으로 교섭자리가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논의가 잘 안되면서 다시 구로 CCTV탑에서 17일간의 고공농성을 하게 된 거고, 또 자리가 만들어졌지만 안이 결렬돼서 결국엔 단식농성으로 가게된 거죠. 단식 60일쯤 됐을까. 사측 안이 나왔는데 저도 그렇고 조합원들도 그렇고 절대 받을 수 없었어요. 그때 민노당의 이정희 의원이 이거라도 받아서 어떻게 해보자, 정말 죽을 거냐, 그러면 안 된다며 펑펑 울었죠. 근데 저희는 죽어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한결같이 얘기한 건 뭐였냐면 ‘우리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여기까지 온 건 기륭전자의 불법파견노동에 대해 어떻게든 책임을 지으려는 거였는데 제3의 회사 취업알선 정도는 우리도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우리가 처음에 도급을 받았지, 싸움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어려워졌다고 그걸 받는다는 게 말이 되냐, 그렇게 하느니 깨끗이 손을 털겠다’는 거였어요. 정말 모두들 대성통곡을 했어요. 다들 얼마나 아팠겠어요, 처참했겠어요. 결국 이정희 의원도 우리 의견을 존중하겠다면서 내려갔는데 절대 죽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으려 했어요. 논의는 계속됐지만 더 이상 진전은 안됐어요. 그 상태에서 풀고 싶진 않았는데 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가게 되면서 94일 만에 단식을 풀었죠.”(김소연)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지난 세월이 남긴 상처는 채 아물지 못해 금세라도 비명이라도 새어나올 듯 저려보였고, 괜찮다는 손사래가 무색하게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승리하진 못해도 먼저 그만두진 않으렵니다”


2008년을 달구었던 기륭의 천일투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회사는 완강했고, 정부는 더욱 완강하게 파견노동을, 비정규직 노동을 옹호했습니다. 회사는 신대방동으로 이전을 하고, 미국 시장에서 신제품이 주목을 받으면서 주식시장에서 상한가를 쳤지만 당신들은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삶 역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더욱 심해진 생활고에 사치가 되어버린 가족들과의 외식, 명절 그리고 친구들과의 커피 한잔. 함께 어깨를 걸었던 250명은 모두 흩어지고 이제 32명만이, 그중에서도 8명만이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할 만큼 했다고, 걸 수 있는 건 다 걸었다고 이제 손 털고 일어나도 되련만 당신들은 계속 싸우겠다 했습니다.



“5년 투쟁하면서 잃은 것도 많아요. 매일이 어렵고 힘들죠. 하지만 정말 얻은 게 말도 못하게 많은데 가장 소중한 건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그 사람들과 하나가 됐다는 거예요.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내 마음의 의지가 무너질 때가 많은데 옆에 있는 동지들이 족쇄가 돼 도망도 못 간다고 하곤 해요. 살면서 늘 어려울 때마다 내 부모, 형제, 친구들이 해준 것보다 함께했던, 함께하고 있는 동지들이 해결해줬던 게 훨씬 많았어요. 재정적인 어려움을 비롯해서 무슨 문제가 있으면 가장 먼저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주고 어떻게든 해결해주려고 뛰어다녔지요. 2008년 권명희 조합원이 돌아가셨는데, 그때가 기륭 1천일 투쟁 과정이었어요. 남편이 고아여서 친지도 가족도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했는데 그걸 우리가 함께 해결했죠. ‘함께 맞는 비’라고 촛불시민연대 회원들이 일도 나눠서 함께 치러주시고. 또 전국적으로 많은 관심도 지지도 받았는데, 권명희 조합원의 장례를 엄청나게 많은 분들의 관심과 애도 속에 치룰 수 있었어요. 사실 그게 결국 우리가 추구하려고 하는 관계인 것 같아요. 그런 걸 지키기 위해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노조 운동도 하는 거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싸우는 거고. 그런 소중한 경험들이 있기에, 함께해준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계속 싸울 수 있는 것 같아요.”(윤종희)


“저도 이해가 안가요. 두 달 반 일 하고 5년을 싸운다는 게. 근데 그건 제 의지와 힘 때문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엔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투쟁 시작하고서는 정말 탄압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용역 깡패한테 맞아서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오늘 정말 죽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맞았어요. 너무 공포스러웠어요. 더군다나 경찰이나 전경에게도 보호는커녕 무지막지한 테러를 받았는데, 그게 분노를 키운 과정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싸우다보니, 별로 큰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핸드폰 문자로는 해고통보를 할 수 없도록 한 성과도 생겨났어요. 또 기륭 투쟁으로 인해서 비정규직 문제, 파견노동자의 문제가 사회에 많이 알려진 것도 사실이고. 사회에 알려지는 만큼 어깨에 짊어지는 짐도 무거워지더라고요. 사실 진짜 가끔은 ‘나도 평범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정리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근데 이만큼 왔는데 내가 여기서 정리하면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서 내가 희망을 거둬 가는 게 아닌가 겁이 나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나서서 못 싸우고 있지만 기륭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자기의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내가 포기를 하게 되면 그 사람들이 ‘기륭노동자들이 그렇게 싸웠는데, 안한 것 없이 다해가면서 길게 싸웠는데 그래도 해결을 못한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풀겠어. 그냥 죽으나 사나 이렇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길게 싸웠더니 이제 나 혼자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와 있는 거죠. 내가 여기서 이겨서 승리를 해야겠다는 의지보다는 이게 더 큰 거예요. 정리를 하고 싶지만 정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끝에 승리할지, 못할지 모르겠어요. 꼭 승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 하지만 결코 내가 먼저 그만두지는 말자는 다짐은 해요. 기륭이 진짜 망해서 없어지면 더 할 수도 없겠지만 내가 먼저 포기하는 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이렇게 마음먹고 결심한 게 어느 날 너무 힘들어서 바뀔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나를 힘들 때마다 생각하고 되돌아보겠죠, ‘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결심했었어. 진짜 그만둬야 할 만큼 그렇게 힘들어’라고.”(오석순)



잊지 말아달라는 바람에 답하기


참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짐만으로도 벅차건만 오지랖 넓게 다른 노동자의 설움도 함께 지겠다는 당신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썰물처럼 밀려들다 밀물처럼 빠져나가는 연대에도 고맙다며 그들이 아니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며 감사를 전해달라는 당신들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투쟁이 혹여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지 걱정이라며, 싸우는 우리들은 지금 행복하다며 배시시 웃는 당신들은, 정말 곱고 강한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가 5년을 투쟁을 했어요. 그리고 2008년에는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다고 했는데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정말 커요. 그때정도에 해결돼줬어야 가장 좋은 모습이었는데, 그랬더라면 다른 데서도 희망을 가졌을 텐데 다른 동지들에게 저렇게 했는데도 어렵구나라는 절망과 상처를 줬을 수도 있고. 단식도 90여일 넘게 했고 고공농성도 했는데 해결되지 않으면서 사업주들에게도 정말 저렇게 놔두면 회사 망하겠다는 압박을 주고 빨리 해결하자라는 생각도 들게 했겠지만 노동자들에게도 힘들다는 절망감을 준 것은 아닌지, 싸우는 걸 두렵게 만든 건 아닌지 그게 가장 안타깝고 미안하죠.”(윤종희)



당신들의 투쟁이 승리로 끝날지는 그 누구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맘 편하게 일상으로 돌아가 뒹굴며 쉬고 싶다는 당신들의 바람이 언제 이뤄질지 역시 기약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할 수도 없습니다. 비정규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며 싸워도 이기지 못할 거라는 패배감을, 무한경쟁의 시대, 나라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며 투쟁을 외면하곤 질끈 눈감아버린 이기심을 우리가 극복해낼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꾸 되뇌게 되는 바람은 무모한 듯 보이지만, 불가능한 듯 보이지만 열심히 싸우고 있는 당신들을 우리가 아프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떻겠냐, 니네가 더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냐. 물론 이런 뉘앙스만 보내는 것은 아닌데 그런 뉘앙스를 보내는 게 보이기도 해요. 사실 우리도 지칠 대로 지치고 많이 힘들거든요. 해서 그런 사람과 만나게 되면 사실 맘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고강도 투쟁을 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하고 응원을 해주니까 힘들지가 않았어요. 또 도움도 많이 주고 그러니까 어려움도 많이 줄어들고. 근데 고강도 투쟁이 끝나고 나면 관심에서 멀어지잖아요.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잊은 사람들도 많아요. 근데 우리는 아직도 싸우고 있거든요. 욕심이겠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오석순)


“저희는 믿어요. 사람들의 머릿속에 우리가 있다는 걸. 다만 몸이 여기 있지 않을 뿐이라는 걸. 계기가 또 되면 그 사람들이 또 모일 수 있을 것이다 저희는 그렇게 믿어요. 지금 눈에 보이진 않지만 곳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우리가 믿는 가장 큰 힘이에요.”(김소연)



사진 박김형준 객원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