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용역의 뒷모습

부끄럽지만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 문학상의 생활·기록문 분야 예심을 덜컥 맡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전화로 수락하고 보니 우편으로 접수된 것까지 포함해서 대략 150여 편의 글을 일주일 만에 읽고 본심에 올릴 작품을 가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의 글을 평가하고 그 당락을 결정짓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본심에 보낼 작품과 탈락시킬 작품을 가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본심으로 넘겨야 하는 작품 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들의 편차가 워낙 심한 탓도 있었습니다. 생활글, 기록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문장이나 예술성보다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흔적이 있는 글, 글쓴이의 정성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들을 위주로 추렸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글을 읽어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지만 한 편 두 편 읽다 보니 글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잠시 원고를 내려놓기도 했고 혼자 드러누워서 낄낄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살아왔던 동시대의 가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때 그 시절, 형편이 좋지 않아서 못 먹이고 못 입혔다며 미안하다 하시지만 사실 저희 집은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경제사정이 급속도로 좋아졌던 탓에 유별나게 궁상맞았다거나 고달팠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솔직히 1980년대 이전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절대빈곤은 소설이나 영화로 많이 접했지만 제가 십대, 이십대를 보낸 8, 90년대에도 이토록 가난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들과 함께 같은 하늘과 같은 땅에서 살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한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이제 막 한국사회에 등장한 중산층들이 둥지를 틀었고 그 맞은편 작은 하천 너머로 아마도 신흥 중산층들에게 삶의 터전을 속절없이 빼앗겼을 사람들이 모여 살던 무허가 판자촌이 빼곡했습니다. 판자촌 동네 아이들은 한 학급에 대여섯 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꼬질꼬질하던 한 아이가 어느 날 제 짝꿍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5학년 때였을 겁니다. 땟물이 줄줄 흐를 뿐만 아니라 어딘지 좀 모자라고 숙기도 없어 보이는 그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저는 약간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 아이가 점심 도시락을 싸왔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까지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하고 학용품을 제가 먼저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처음으로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생겼기 때문인지 계속 제 주변을 맴돌더니 급기야는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얘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나랑 안 놀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아이가 제 주변에 있는 게 불편하고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약간 차갑게 대하며 제가 반걸음쯤 물러서자 그 아이는 더 차갑게 제게서 몇 걸음이나 물러나 아예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서먹서먹한 채로 그 아이와 멀어졌습니다.

다시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중학교에 올라가서입니다. 제가 들어간 중학교는 인근에서 하나뿐이었던 남자 중학교로 당연히 학교 분위기가 상당히 거칠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우연히 복도에서 그 아이와 마주쳤습니다. 한눈에 봐도 그 아이는 더 이상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동네 형들이나 고등학생들과 어울린다고,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요샛말로 이른바 ‘일진’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복도에서 그 아이를 마주친 순간 서로 눈을 피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뒤로는 그 아이를 보지 못했고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문득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참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지만 제가 첫 번째로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아이일 겁니다.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작품을 읽어나갈 무렵은 한창 무식급식 주민투표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면적인 무상급식은 안 된다는 주장의 핵심은 빠듯한 나라 살림살이에 왜 부자 아이들의 밥값까지 대줘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군대에서는 왜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군인들에게 무상으로 밥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소득 상위 50%이상은 군복을, 상위 20%이상은 총까지 스스로 장만해서 입대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 반대편 주장인 “아이들에게 눈칫밥은 더 이상 안 된다”는 이야기도 마땅치 않습니다. 군복무가 의무라면 당연히 군대에서 군인은 양질의 식사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듯이 의무교육에서 급식은 학생들의 당연한 권리여야 합니다. 눈칫밥이나 낙인효과 같은 정서적인 접근이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고 무상급식을 이뤄내는데 효과적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여력이 있을 때 베푼다는 시혜적 차원의 복지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보편적 복지로, 그리고 인권의 차원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는데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편 정말로 무상급식을 한다고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만난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는 모두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라 오히려 분위기가 좋더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미 아파트 몇 단지에 사는지를 가지고 친구 집의 경제력을 짐작하고 무슨 학원을 다니는가 하는 것으로 또래집단이 나뉘는 마당에 무상급식 하나로 빈부격차에서 오는 차별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어른들의 바람일 뿐이겠죠.

군대에서도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전방부대였기에 40명 정원의 한 소대에서 4년제 대학을 다니다온 사람이 채 10명이 안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중대 행정반이라는 편한 자리에서 군 생활의 절반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들었던 이야기로는 후방 무슨 본부 같은 곳은 4년제 대학생 아닌 이들이 열에 한둘이 될까 말까 하였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온 이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사회경험에도 불구하고 늘 힘든 일을 도맡아야 했고 제대할 날짜가 다가올수록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데모를 한다고 쫓아다니고 문학을 한답시고 술에 절어 지내던 대학시절에는 사회경제적 차이가 크게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둘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다 보니 출발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농사짓는 노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의 친구와 자식이 결혼을 한다니 전세 아파트라도 마련해줄 형편이 되는 집의 친구는 반지하와 신도시로 사는 곳부터 다릅니다. 아마 어느 한 편이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던 일이 대박 나지 않는다면 이 둘의 차이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복지, 주거와 교육, 의료와 같은 것들은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아 누구나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고 그 가운데 어떠한 모욕이나 차별, 배제가 끼어들 수 없게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위한 기획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복지국가 논의에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가 이미 너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눈칫밥과 사회적 낙인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도 그렇습니다. 복지를 위해서,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를, 좀 못사는 다른 나라를 착취해야만 할 겁니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좋지만 그러면 당장 피해를 보는 것은 편의점이나 PC방 같은 영세 자영업자라는 말이 어쩔 수 없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평택 대추리에 지어지는 미군기지로 인해 누가 얼마나 더 안전해질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제주도 어딘가에 해군기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 앞에서, 그리고 공사 지연에 따르는 천문학적인 비용 운운하는 말들 속에서 강정 싸움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가 되고 맙니다. 서울시민의 쾌적함과 그럴듯한 ‘디자인’을 위해 서울역에서 노숙인은 당연히 쫓겨나야 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이주민은 필요한 만큼 시한을 정해 들여왔다가 쫓아내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한편 바로 이웃나라의 핵발전소 사고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도 원자력 에너지에 기대어 또 이렇게 한여름 불볕더위를 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곤란과 어려움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아닐는지요.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번호 《사람》의 표지 사진입니다. 다섯 명의 젊은이들 뒷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 검은 색 계통의 어두운 티셔츠를 입었고 다들 무척 지친 듯합니다. ‘마리’라고 쓰인 간판 밑 내려진 셔터 앞에 선 이들은 마치 전쟁영화에서 나오는 포로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요? 어디를 보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용역, 용역직원, 혹은 용역깡패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 지난 6월 19일 명동 재개발 구역인 카페 마리에서 철거가 진행된다는 소식이 트위터로 퍼지자 일요일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의집회와 몸싸움 끝에 카페 마리는 다시 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농성장이 되었습니다. 사진은 그 과정에서 안에 들어간 동료가 집기를 다 철거할 때까지 철거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못 들어가도록 셔터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왠지 참 애처롭습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둘러싸여, 혹시라도 카메라에 얼굴이 찍힐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용역들. 사실 현장에서 이들을 만날 때면 유난히 겁이 많은 저는 눈을 마주치는데도 적지 않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몇 발짝만 물러나면 그저 애처롭고 안타까운 존재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정함과 공포의 대명사인 이들은, 이들의 뒷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뒷모습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 삶도 이미 자본의 용역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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