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카페 마리에서의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당신에게 현장은 무엇인가

오늘 아침에 가게 안으로 용역들이 밀고 들어왔어요. 용역들이 까만 옷 입고 왔으면 마음의 대비를 하는데요, 학생처럼 입고 왔어요. 앞에 세 명이 평상복 차림으로 먼저 들어오기에 연대온 학생인줄 알고 인사하려고 한 번 쳐다보았죠. 그래서 마음 놓았는데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오더라고요. 뒤늦게 알았지만 그건 이미 늦은 거죠. 뒤따라 들어온 용역들과 함께 가게 안의 집기를 다 부수고 사람을 끌어내고, 용역들이 이불을 사왔는데 그걸로 가게 안의 사람들을 둘둘 말아서 뒤집어씌우고 건물 밖으로 모두 쫓아냈어요.
퇴직금 받아서 3천만 원을 갖고 엄마한테 돈을 빌리고 ‘마리’라는 상호로 카페를 처음 시작했어요. 그런데 2007년 무렵부터 재개발 얘기가 솔솔 나오면서 상권이 죽기 시작했고, 이 앞의 사거리를 기점으로 청계천 개발되고 나서 높은 빌딩들이 모두 재개발로 생겼어요. 그분들은 저희처럼 싸울 용기가 없었는지 다들 조용히 나가셨어요. 그러면서 어렵게 근근이 그래도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 땅을 하나씩하나씩 명동도시환경정비에서 매입을 하더니, 어디서 그런 든든한 자금줄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서 재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된 거죠. 세입자들에겐 보상 얘기도 없고…….
재개발 집행 두 달 전부터 용역들을 상주를 시켰어요. 산만한 덩치들이 돌아다니고 장사 안 되도록 위협 분위기 만들고 그랬어요. 그런데 저희 3구역 철거당한 상가가 총 열한 개 상가인데요, 그래도 ‘똘똘 뭉쳐서 자본하고 한번 싸워보자. 여기 사거리를 중심으로.’ ‘너무나 나약하게 물러서는데 우리라도 싸워서 우리나라의 자본과 권력들이 쥐고 흔드는 나쁜 법들을 어떻게라도 알려 보자.’ 세입자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했어요. 사실 저희들만의 힘이었으면 이렇게 판이 커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여러분들의 힘이 모아지니까 저희가 가게를 다시 뚫고 들어갈 힘도 용기도 생겼고요. 저희 열 한명 이었으면 상상도 못했을 거에요, 그냥 조용히 앞에 천막치고 농성하고 그랬을 텐데. 여러분 와주시니 힘이 생기더라고요. 두리반 이야기 듣고 나서도 힘이 나고. 두리반 사장은 혼자 싸웠는데 저희는 열한명이잖아요. 그래서 ‘아 얼마든지 힘내서 싸울 수 있겠구나.’ 저희가 수요일 날 점거에 들어갔는데, 일요일 날 다시 쫓겨나온 거예요.
정말, 정말 중구청 공무원들은 정말……. 제 자식들은, 저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있다해도 공무원 시키고 싶지가 않아요. 중구청 공무원들과 두세 번 정도 저희가 면담을 했는데요. 그 면담을 한 게 중구청에선, 그저 “명분을 쌓는” 것에 불과했어요. 강제철거 2~3일전에 저희를 꼭 불러요, 그전엔 연락도 없다가. 한 번 만나서 그래도 대화의 창을 닫지 말고 대화를 해야겠구나 싶어서 가 봐요. 그런데 두세 달 전의 얘기랑 똑같은 얘기만 하는 거예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해줄 게 그 정도다. 시행사하고 협상해서 해주는 것들, 그 정도가 전부다.” 면담 후 2일 후 1차 강제집행 당하고, 그 다음 2차 강제집행도 면담 후 2일 후에 강제집행 당했어요. 공무원은 우릴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시행사와 함께 명분만을 쌓기 위해서 “우리는 중재를 하려 했는데 너희들이 거부했다.”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우릴 도와줄 힘이 없는 건지. 아니면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중구청에선 학생과 시민들이 저희를 도와주는 마음의 삼분의 일이라도 진심으로 시행사에 압력을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연대하러 모여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 용역들의 1차 침탈 당시 세입자 발언 속기 중에서


세입자, 도시개발계획, 시행사, 시공사, PF, SPC

3구역 협상 타결 며칠 후인 2011년 9월 21일, 서울시는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서울시정 고시를 통해서 현 중앙시네마 터에 24층 규모의 금융센터를 세운다는 내용을 담은 구체적인 명동 제4지구 도시환경정비구역 변경 지정안을 가결했습니다. 중구 일대는 은행 본사가 밀집해 있으며, 명동 3구역은 금융관련 특정개발진흥지구가 조성될 계획입니다. 명동성당이 포함된 명동관광특구 계획안을 포함하여 카페 마리가 속한 명동금융특구 계획안은 10여 년 전부터 진행 되었습니다.

명동 환경정비사업구역은 총 5구역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1구역은 이미 오래전에 재개발이 끝났고 5구역은 단일빌딩으로 구성되어 재개발 과정에서 상가세입자 문제가 없었습니다. 2, 3, 4 구역 가운데 3구역이 카페 마리를 비롯한 세입자들이 속한 구역입니다. 3구역은 현재 협상타결로 철거되어 터만 남아있고 시기는 구체화되어 있지 않으나 포탈라를 비롯한 2, 4구역도 역시 재개발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http://dart.fss.or.kr)에 조회해보면 1, 3, 5 구역의 재개발 시행사는 (주)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이며, 2, 4구역은 (주)명례방이 시행사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양쪽 모두 시공사는 대우건설입니다.

재무공시에 의하면, SPC인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은 국민은행 49%, 대우건설 44%, 중소기업은행 6%, 명례방 0.8%, 그리고 엠앤디인베스트먼트가 0.2%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주주회사로 등재되어 있으며 4천억 원 규모의 PF자금을 차입하여 확보한 상태입니다.

한편 대법원 인터넷등기소(www.iros.go.kr)에서 명례방을 조회하면,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의 주주로 등재된 명례방의 법인 등기부 등본상 소재지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 60번지 개양빌딩 703호”로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과 동일한 주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명례방은 공시자료도, 정부기관에 공인된 감사보고서도, 어떤 회사의 자료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2구역 건물을 사들일 때 근저당권을 설정한 저축은행 명단과 투자자 명단에 3구역에서 땅과 건물을 판 건물주들이 만든 유한회사 등이 포함된 문서에서만 나타납니다.

즉 명례방과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은 동일한 회사라고 짐작되며 SPC입니다. 명동 3구역의 세입자들은 투쟁기간 동안 명례방의 대표와 만나 협상을 해야 했으며 농성하던 열한 개 상가의 세입자를 포함하여 제3구역 102세대의 세입자들과 보상 문제로 협상을 진행한 대표도 명례방입니다. 시행사의 책임은? 대우건설은 직접 철거에 나서지는 않는 대형 건설사지만 명례방의 사장은 대우건설의 직원 출신이며 자본금도 대우건설에서 왔습니다. 원청의 책임은?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의 자본금 상당액이 기업은행에서 왔으며 들어설 건물 또한 기업은행 계열입니다. 상가세입자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 있음에도 불과 100m 인근의 기업은행은 이들의 대화요청과 1인 시위를 항상 무응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렇듯이 PF(프로젝트 파이낸싱)로 많은 기업들이 참여하여 조성된 자금에 시공사가 건설을 수주하고 SPC를 시행사로 내세워 턱없는 보상금을 제시하며 만약 상가 세입자들이 보상금에 응하지 않으면 점포를 강제 철거하는 방법으로 재개발을 진행합니다.

권리금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항목으로 감정평가에 포함되지 않아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누가 와서 턱없는 보상금 던져주고 가게 문을 닫으라하면 그것은 곧 생존의 위협입니다. 9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남편의 보상금과 퇴직금으로 분식집을 차린 세입자는 “시행사에서 받은 보상금이라고는 열 달치 월세인 1000만 원뿐”이라고 했고, 처음 가게 문을 열 때 권리금에다 인테리어 비용까지 1억6000만 원을 투자했지만 이제 남은 것은 월세 보증금 2000만 원을 포함해 2600만 원이 전부입니다. 심지어 강제명도비용 400만 원도 부담합니다. 인근 가게들의 사정도 비슷하여, 모퉁이 식당은 370만 원, 23년 동안 명동을 지켰던 낙원화랑이 제시 받은 보상금도 700만 원이었습니다. 현재 협상타결로 철거가 이루어졌지만 당시 세입자들이 느꼈을 분노와 절망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카페 마리에 연대했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위와 같은 실상을 속속들이 알고 행동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번 경험으로 남의 일로만 알다가 운동을 접한 활동가의 이야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깡패들이 사람을 이불에 둘둘 말아서 내던지는 것을 보고 이럴 수는 없다 싶어서 갔습니다. 철거의 부당함이나 자본의 횡포는 그 다음 문제였고 먼저 찾아가서 눈으로 보고, 돌아와 생각하면서 문제를 인식한 부분이죠. 나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이 싫어서 갔습니다.”

6월 19일과 7월 18일, 8월 3일과 8월 11일 등 여러 차례 명동 3구역 농성장이 용역대치 상황과 침탈 위기에 놓였을 때. 시위참가자들은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알려 수백명의 사람들이 달려와 용역들과 대치했습니다. 명동 3구역 투쟁에 참여한 주체는 보통사람들이었고, 지금까지 모르거나 지나쳤던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들을 직접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불과 백미터 인근에 자리잡은 명동성당의 신부와 수녀들이 수없이 농성장 앞을 스쳐갔지만 애원소리에도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바삐 뛰어갔던 모습과, 용역의 폭력에는 한없이 관대하며 철거민의 작은 잘못에는 서릿발처럼 준엄하던 경찰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며 우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 처음은 모두 날카롭고 미숙하지만 그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법입니다.

협상 타결 후에 2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농성장에 연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여름방학 동안의 카페 마리는 실제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던 공간이었으며, 사람들과의 친밀감을 느끼는 강력한 공동체였습니다. 연대했던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고, 생활을 하고 살아가는 거점으로서의 3구역이라는 공간에서 서로 간에 느끼던 강한 유대감은 “현장을 지켜나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가치관과 정치색을 갖고 있었지만 모두 일상을 공유하며 유대감을 지켜나갔습니다. 일상성과 예술성의 연대는 철거 농성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상적인 모습과 분위기를 탄생시켰는데, 철거 현장이 “이곳은 우리가 사는 곳, 삶의 터전”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여기기 때문에 공간점유라는 시위방식을 원동력으로 삼았고, 이는 굉장히 유효했습니다. 마리에서의 방식은 “일상과 함께 가는 것”이었고, 정치성과 활동성도 일상성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일상성은 용역이 침탈하고 자본이 폭력을 휘두르더라도 이 노래를 통해서 승리를 이루리라고 서로 믿으며, 다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하게 이끈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처음 나에게 마리는 어떤 의미였을까

올해 3월에 강원도 철원의 포병부대에서 복무하다가 제대를 했습니다. 2009년 2월 용산참사를 보고 입대했는데, 동지들은 모두 병역거부를 하는데 혼자 비겁하게 입대했다는 죄책감에 자주 짓눌렸습니다. 2008년 촛불 당시에는 광화문 광장에 개근했습니다. 그리고 열기가 폭발할 듯 달아오르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왜 촛불이 강남성모병원으로, 용산으로 옮겨가지 못했는지, 경과는 어떠하였고 잘못은 무엇이었는지를 당시 매일 적었던 일기를 보며 고민했습니다. 결국 반(反) 지성주의에 대한 관용과 집단지성에 대한 과신, 그리고 정치성을 드러냈을 때 받았던 노골적인 적대감에 대한 공포심, 그러한 것들이 원인이 있다고 보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실천을 통해서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지 고민했습니다. 제 정신은 2008년에서 올해 여름으로 곧장 시간이동을 했던 셈입니다.

카페 마리에서 연대하며 제가 배우려고 했던 것은 카페 마리의 미디어적 표현법이었습니다. 농성장에 누워서 언론에 어떻게 우리가 비치는지 검색해 봤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웃통을 벗어 문신을 드러내며 욕하는 용역깡패의 코앞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며 춤을 추던 발랄한 모습이었습니다. 심지어 용역깡패가 바닥에 돈을 집어던졌는데 그 돈을 발로 걷어차며 계속 악기를 연주하던 모습이 가장 상징적입니다. 언론에 나온 자극적인 단면뿐만이 아닙니다. 시낭송, 연주회, 사진전, 미술전, 그리고 '장발농성'과 같은 독특한 아이디어의 문화제가 지속적으로 열렸습니다. 이런 일종의 '예술농성'을 유지해나가는 동력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왜 미디어적 표현이 잘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른 투쟁사업장에서 응용할 방법을 찾을지, 그것을 가장 고민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리의 특수성 때문에 대부분 사업장으로 확대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의 현장 활동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누구였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연대하러 농성장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우선 연대구성원의 나이에 놀랍니다. 농성장 다수 인원들이 젊고 청소년들도 투쟁의 주역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급단체의 지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놀라고, 무엇보다 투쟁의 연속성이 어떻게 유지되는가에 제일 많이 놀랍니다. 마리에 대한 관심도 위와 같은 마리의 특수성에 대한 궁금증의 맥락에 놓여있습니다.
마리를 찾았던, 지켰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일단 연대대오 절대다수가 트위터 유저(user)인 건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하다못해 생수 한 통을 말없이 던져놓고 후다닥 가버린 사람들도 모두 트위터를 보고 왔죠. 우리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참여자를 보면 시민운동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굉장히 다양한 직업과 개성의 사람들이죠. 우리는 불과 몇 달 전까지 서로 몰랐지만 이제 모두 아끼는 추억을 간직해서 공유하는 사람이죠. 마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 ‘공동체적 성격’입니다. 연대하러 온 이들에게는 서로를 묶어주고 생활하는 소중한 공간이었던 점도 굉장히 중요한 측면입니다. 공통점도 없고 친교도 없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투쟁 현장의 비참함과 연대의 소중함을 공유합니다.

현장에 지속적으로 연대하긴 어려웠지만 명동 3구역 농성투쟁을 지지하고 응원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장 큰 궁금증은 이것입니다. 집기가 부서지고 악쓰고 비명 지르는 아비규환 속에서 어떻게 기타치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겁게 싸우냐고. 저도 그런 제가 신기했죠.

차분하게 원인을 파악하자면, 카페 마리의 특수성은 SNS 네트워크, 방관자 효과, 탈 정치경향, 역량축적론, 이렇게 4가지로 설명됩니다. 네트워크 운동론은 트위터에 기반을 둔 조직형태가 사소한 신상과 감정을 공유하는 인간관계를 만들었고, 바로 그 긴밀한 사적 네트워크가 정보의 신뢰성(우리 투쟁은 정당하다)을 높이고, 작은 세계 효과(한두 단계만 거치면 모두 아는 사람)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부담도가 높은 직접행동으로 나설 수 있게 도왔다는 설명입니다.

방관자효과는 유동인구와 관광객이 많은 명동 한복판, 대로변이었던 독특한 위치와 그로 인해 모여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전철연과 2, 4구역 연대를 거부했던 3구역 세입자가 외롭게 용역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도와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더더욱 자원해서 연대하러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트위터로 '지목' 받는다면 더 더욱, 선뜻 나서기 쉬워집니다.

탈 정치경향은 세입자와 연대대오 양쪽에서 나타납니다. 명동 3구역 투쟁에선 많은 정당 활동가 그리고 기존 운동세력이 연대했지만 그들이 정치색을 눈에 띄게 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발랄함, 참신함 등 특이하고 새로운 투쟁방법을 많이 고안해냈다는 장점은 있으나, 명백한 단점은 다른 현장과 긴밀한 연대를 묶지 못하고 의제를 확장시켜 세력화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철거단체와의 연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세입자들의 정치성 거부로 연대대오와의 갈등도 계속 깊어졌다는 점은 결국 이 장점과 단점이 동전의 양면이고, 평가의 중요한 포인트라는 뜻이 됩니다.

역량축적론은 만델그룹과 SWP그룹에서 프랑스 민중운동을 설명하면서, 거리 투쟁 경험이 매년 축적되면 더 사소한 일로도 대중투쟁으로 발화할 구심점이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용산-(홍대)-두리반-마리에서 상당수 인원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옮겨가면서 공유했던 어떠한 경험이 공통된 상승효과를 냈다는 설명입니다.

재개발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

이유야 어찌되었건, 세입자들이 보상에 합의하면서 농성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보상금은 비공개이나 어느 정도 양측이 만족한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협상타결에 성공한 것은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농성투쟁이 단순히 제몫을 챙기려는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하게, 그래서 일반 시민들의 공감과 자발적 연대를 이끌어내고 원청과 시공사를 향한 여론적인 압박을 많이 이끌어냈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래하고 기타 치는 걸 '컨셉'으로 잡았죠. 철거하고 깽판을 치는 용역 앞에서 울며불며 구호를 외치고 머리띠를 두르는 대신 기타를 치고 춤추며 조롱했고 이게 '잘 먹혔'습니다. 그래서 석 달만에 협상타결이라는 엄청난 일이 있었고요. 차별적 이미지를 통한 일종의 포지셔닝의 성공이었습니다. 세입자들이 원했던 협상타결은 모든 연대자들이 목표했던 기쁜 일입니다. 한편 다른 결과는? 연대대오는 예고도 없이 하룻밤 만에 쫓겨났고 구심점을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탈 정치경향'의 동전의 양면입니다. 정당, 운동권, 모두 치우고 좋은 그림으로 남들에게 보이면 뭔가 ‘순수’하게는 보이는데 정당, 상급 철거단체(제도기구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당') 등이 없으면 우리의 사례처럼 운동으로 묶지도 못하고 결실을 인근사업장으로 확대하기도 힘듭니다.

앞서서 말했지만 철거투쟁에서 연대의 원칙에 대한 강력한 규율이 필요하고 그것이 없었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명동이 ‘순수성’을 부각(가령, 억지시위로 제몫만 챙기려 한다는 사회적 편견)한 것은 그 옆에 (사회악으로 부당하게 매도되는) 운동단체들 대신 뭔가 어설퍼 보이는 학생들, 시민들이 복작대는 모습이 유효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3구역을 포함해서 순수한 '현장'은 없었고, 개발현장 조건은 전국이 같습니다. 희망버스와 김진숙의 연대에서 보듯이 앞으로는 이러한 방식의 집회문화가 더 많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더 배우고 연습하겠습니다. 조절의 문제이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자신도 투쟁 주체 중 하나로 당당하게 목소리 내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카페 마리에 연대했던 사람들은 이 경험을 되살릴 때 현장의 이질적인 분위기를 떠나 관심을 연대로 돌리기 위한 방편에서 조금 더 궁리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같이 분노하고, 투쟁으로 분노를 표출해서 그것을 다른 곳으로 연대시키던 구세대인 저로선 익숙해지기 전에는 굉장히 이질적이었습니다.

트위터 등을 이용한 마리의 상황에 대한 호소는 대중에게 공분(대기업의 개발독재. 환경파괴. 신자유주의)을 이끌었는지, 단순히 호기심을 만들었는지를 곰곰이 고민할 때입니다. 찾아와 생수라도 두고 간 대중이 있다는 것은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참여의 방법을 모르지만 공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카페 마리에 연대했던 사람들은 많이 지치기도 했고 열심히 싸우기도 했지만 그동안의 경과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 어떻게 계속 재개발과 싸워나갈지에 대한 토론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정말 열심히 싸웠고 앞으로도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푸코가 담론과 이론을 설명하며 사용한 담론의 개념은 구어적 뜻이 아니라 역사화 되기 이전의 수많은 개인들의 주관적 기억입니다. 그중엔 죄수가 경험하는 역사, 장애인이 기억한 역사가 다 다르죠. 무수한 담론 중에서 살아남은 담론은 역사성의 이론이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담론은 가진 자들, 권력자들의 담론이었고요. 수많은 기억중 하나를 사실로 몰아가는 힘. 그리하여 푸코는 배운 자들의 의무는 저항하는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또 하나의 투쟁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론을 만드는 주체는 체험의 주체보다는 소수입니다. 우리가 남기는 진술이 훌륭한 역사 서술이 됩니다. 이론과 담론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발언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기억이 역사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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