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민주주의의 스마트한 적들

사춘기 무렵 동네에는 “사는 게 다 욕”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보며 난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요새 말로 ‘쿨’하게 살고 싶었죠. 돌이켜보면 쿨이나 심플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어릴 적 돈 문제, 집안 문제로 다투는 부모님을 보며 절대 결혼은 하지 말아야지 했습니다. 하더라도 애는 절대 낳지 말아야지 했는데 둘째가 곧 있으면 두 돌입니다. 뜻대로 산다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절대라는 생각, 뜻대로 산다는 생각 자체가 철없음의 반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잡지를 만드는 일도 늘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갈수록 참신한 기획도 쉽지 않고, 마음에 드는 기획을 했다 해도 좋은 필자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이고, 밀려들어오는 원고와 씨름하다보면 애초에 정해놓은 마감 일정은 훌쩍 넘기기 일쑤입니다.
클릭이 운동을 망친다? 마감을 하다 메일함을 보니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진보네트워크센터가 보낸 <네트워커>라는 뉴스레터였습니다. 클릭해서 열어보니 ‘클릭 운동(Clicktivism)이 좌파 운동을 망치고 있다’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미셀 화이트란 외국 사람이 2년 전에 쓴 것을 번역한 글인데 사회운동이 온라인 활동을 하며 시작된 디지털 행동주의 운동이 사회변화의 시장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보니 메일 제목은 ‘클릭이 운동을 망친다’가 아니라 ‘클릭 운동이 운동을 망친다’는 것이었죠. 사실 클릭 운동이란 게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문득 나도 클릭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습니다. 또 하루에 몇 번이나 마우스를 클릭하는지, 몇 번이나 스마트폰을 터치하는지 궁금해졌지만 이내 헤아리길 포기했습니다. 엄두가 나지 않아서요.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20여 년 전 대학에 입학해서야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컴퓨터는 컴퓨터가 아니라 모니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처럼 그냥 끄면 안 되고 꼭 ‘park’라고 입력한 다음에 꺼야 한다는 선배의 말에 이건 뭔가 대단히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물건이란 느낌이 들었죠. 몇 년이 지났을까, 삐삐란 호출기가 등장해 학생회에서는 교정에 공중전화기 수를 대폭 늘리겠다는 선거공약을 앞 다투어 내놓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 되어버렸고 컴퓨터가 고장이 나거나 인터넷이 안 되면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죠.
이렇게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이 고유명사가 되고 ‘나꼼수’ 같은 팟케스트가 화제가 되는 세상이라지만 정보격차, 정보 불평등은 심각합니다. 몇 달 전 스마트폰 보급률이 전체 국민의 50%를 넘겼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지난해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발표한 보고에 따르면 장애인과 저소득층, 노년층, 농어민과 탈북자, 결혼이민자 등 취약계층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8.6%에 불과합니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 접근성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지만 그 활용도에서의 격차는 쉽게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정보통신 강국이란 미명아래 인터넷 실명제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고 CNN의 최근 보도처럼 “이명박 대통령 취임 2년 만에 북한 찬양 내용을 인터넷에 올렸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람이 5명에서 82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참으로 스마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스마트하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구질구질한 통합진보당의 진흙탕 싸움 한복판에 첨단의 인터넷 투표가 있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면서도 편리함과 효율성의 가치를 우선시 하고 기술과 시스템을 맹신하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민주주의란 본래 불편하고 비효율적이고 성가신 것인데 민주주의를 향한답시고 민주주의를 놓아버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고병권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정치체제)의 근거가 몰락할 위험을 각오하고 비판의 심연에 기꺼이 자신을 개방하며, 그런 개방을 통해 정체 갱신의 힘을 얻겠다는 의지의 표출”이기에 “민주화가 의미하는 것은 ‘교정’이 아니라 ‘이행’일 것”이며 “정체를 척도에 비추어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척도 자체를 바꾸는 일”이라는 지적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몰락의 위험을 감수하고 비판을 통해 갱신하며 척도 자체를 바꾸는 일로 나갈 수 있을까요?
편집은 두려운 일입니다. 편집이란 말이 제일 많이 등장하는 데는 아마도 TV 연예프로그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편집은 잘려나가거나 선택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편집은 필름을 오리고 붙이는 일입니다. 단행본이나 잡지에서 편집은 자료를 모아 펼친다는 원래 의미가 있지만 이 또한 선택과 배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보며 저는 이 편집이란 단어와 함께 지난 5월에 봤던 노순택의 사진전 <망각기계>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몇 년에 걸쳐 시간이 날 때마다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았다고 합니다. 거기서 해가 질 때까지 카메라를 세워놓고 셔터를 열어놓은 채 5.18 희생자의 영정사진을 다시 렌즈에 담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눈과 비를 맞고 햇볕과 서리를 견디며 자연스럽게 망가진” 그 사진들은 5.18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5.18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 같았습니다(대담 ‘나는 살아있는 너, 너 또한 죽은 나’). 마치 그동안 수없이 봐왔던 용산 남일당 망루가 불타오르는 칼라TV의 영상을 <두 개의 문>에서 보여주며 우리가 용산참사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되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사람》을 생각합니다. 처음 잡지를 만들 때 다들 요즘 세상에 무슨 종이잡지를 내냐고 물음표를 달았습니다. 그때마다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이 잡지가 형식에서뿐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시대를 거스르는 잡지였으면 했습니다. 갈수록 스마트해지는 세상에 얼마나 《사람》이 어리석은 저항을 고집해왔는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건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곧바로 지식인이 된다는 뜻이자 그 행위 자체가 지배계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권력을 행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글들을 편집하는 일은 또 다른 권력입니다.
무수하게 많은 일들 중에 특정 사건이나 사안을 골라 적당한 필자를 물색합니다. 원고가 들어오면 독자의 이해를 위한다는 이유로 문장을 손질하고 어떨 때는 단락을 나누거나 잇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필자와 소통을 한다고 하지만 그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쉰일곱 번 《사람》을 만들며 570번도 넘는 잘못을 알게 모르게 저질렀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편집인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사람》은 아직도 여러분의 사랑이 더 필요하고 감히 더욱 사랑받아 마땅한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현장과의 끝을 놓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장과의 거리를 고민하는 잡지, 진리와 선에 대한 의심과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 잡지, 그러면서도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잡지, 권력에 대해 저항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잡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합니다.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변화하고 그럼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수 있게, 사람들이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민주주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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