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다시 겨울 농성을 다집하며

얼마만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밤을 대한문 농성장에서 지냈습니다.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이 단식농성에 들어간 지 26일째 되는 일요일, 밤이 되어도 건너편 서울광장에서는 문화행사로 늦은 밤까지 시끄럽고, 자동차 소리도 밤이 깊도록 잦아들지 않는 곳입니다. 거기에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밤새 내렸습니다. 긴 밤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겨울이 다가오면 겨울 농성 채비를 했습니다. 명동성당과 여의도 국회 앞이 주요 농성장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열흘 이내의 거리 농성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는 두 달을 거리에서 잠자며 생활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겨울 눈밭에 굴러도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농성 복장 두 벌이 옷장에는 항상 준비되어 있었고, 지금도 옷장 깊은 구석에 그 옷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옷장을 정리할 때마다 이 옷을 없애자고 하지만 아직 그 옷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올 겨울 이 농성 복장을 다시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하늘인 세상
18대 대선이 달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언론은 유력 대선 후보들의 입만 쫓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목숨을 건 현안들은 쉽게 묻혀버립니다. 마치 대한문 농성장의 소음 속에 숨소리가 묻히듯이. 지난 10월 5일부터 한 달 동안 ‘2012 생명평화대행진’이 진행되었습니다. “함께 살자! 모두가 하늘이다. 함께 걷자! 강정에서 서울까지”란 구호를 수없이 외치며 전국의 45개 투쟁현장과 30개 지역을 방문하고 서울로 올라온 생명평화대행진단은 11월 3일 밤 서울광장에서 대행진을 마감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오랜만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시위에 나섰고, 열기는 자못 뜨거웠습니다. 서울광장에서 “아프고 약하고 힘들지만 싸우고 있는 우리가 곧 하늘”임을 선언했습니다.

저들의 가치를 강요당한 우리는 민주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긴 무권리의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승자독식의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사회는 매일 50명이 자살하는 끔찍한 야만적인 사회가 되었으며,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배제된 약자와 소수자들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자신의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우리 모두의 삶은 불안하고,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자연도 파괴되어 대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 안보와 치안만을 내세우는 폭력적 법질서를 단호히 반대하며,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향해 싸워나갈 것임을 천명한다. - <2012 생명평화대행진 선언문> 중에서

동학농민들이 인내천을 내걸었던 그 뒤 100년도 넘어 우리는 다시 사람이 하늘임을 내걸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리해고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 천막이 있었고, 핵 발전에 반대하고,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노인들이 산중에서 온몸으로 4계절을 막아 싸우는 농성장이 있었습니다. 골프장 건설 때문에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내쫓길 신세에 처한 농민들의 절규가 있었습니다. 강정마을에서는 매일 24시간 내내 해군기지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정규직으로 전환 받지 못한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자들이 송전철탑에 올랐습니다. 이런 현장을 만나 뜨겁게 눈물 흘리고, 그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올라온 행진단이었습니다.
강정마을 주민들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고통 받는 민중들의 원한을 확인하며 무겁지만 연대의 마음을 안고 걸어온 길인지라 행진 일정이 끝났다고 그대로 해산할 수는 없었기에 농성장을 꾸리고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대선이 끝나고, 겨울철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투쟁일지 모릅니다. 고통의 원인이 국가의 폭력이고, 자본의 폭력임을 눈으로, 귀로, 가슴으로 확인하고 왔는데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10대 요구안도 발표했습니다. 구름 위의 정치가 아니라 현실에 발 딛은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하겠다고 작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참 어려운 싸움입니다. 모든 현장에서 싸우는 이들은 절박하기 때문에 싸웁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이들의 절박한 요구를 외면합니다. 대선 후보로 나온 유력주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마나한 소리나 해대고 있는 저들이 과연 세상의 고통을 아는지, 저들을 지지한다는 유권자들은 정말로 대선 유력주자들이 이런저런 고통을 헤아리고,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하는지…. 대중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그냥 보기에는 모두 대선 주자들에게 나뉘어서 향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행히 5년 전의 대선 때처럼 여야 후보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잘 살게 해주겠다는 사기성 짙은 슬로건은 사라졌고, 경제민주화니 복지니 한 목소리로 외치는 대선이 되었지만 왜 그들의 공약은 한결같이 구름 위에서 노니는 신선들의 노래처럼 한가롭게 들릴까요? 삶의 터전에서, 일터에서 쫓겨나고 내몰리는 이들은 울며불며 망루를 짓고 하늘로 오르고 있는데 우리사회의 미래를 만들겠다는 이들은 이 망루를 애써 외면합니다. 용산에서, 쌍용자동차에서, 강정에서 그리고 수많은 고통의 현장마다 세워진 망루의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을 외면하고 미래를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를 선택해야 하나
이번호에 인권정치에 대한 연간 기획을 마무리하는 좌담을 가졌습니다. 자연스레 대선이 주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좌담에 참석한 이강윤 시사평론가는 이번 대선을 한국 정치를 신·구 정치로 구분하는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로 규정했습니다. 이번 대선 결과가 갖는 의미가 심각하다는 뜻이겠지요. 구정치를 극복하는 신정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그의 주문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는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새로운 변화를 외치고는 있지만 새로운 변화를 담을 만한 그릇이 제 눈에는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보정당의 대선 후보들은 이미 국민적인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별 영향력이 없이 자신들의 세력 키우기가 목표가 될 수밖에 없고, 노동자 후보는 대선 판을 뒤흔들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진보운동이 너무 지리멸렬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찾을 수 없어서 차선을 택하는 것이 아닌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지금의 우리 앞에 놓인 대선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망쳐놓은 우리사회의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서는 차악을 선택하는 것도 선택의 한 방법이겠지만, 그걸 생각하면 이 나라에서 국민 노릇하는 우리는 참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명박을 이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그는 아직도 박정희 시대 독재를 그리워하는 사람입니다. 5.16, 인혁당, 정수장학회에 대한 역사적인, 법적인 평가마저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역사관은 지극히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사회는 더욱더 힘든 불평등과 부정의의 나락에 떨어져 헤어 나올 구멍조차 찾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저만의 판단일까요?
이제 다시 농성장으로 향하면서 보니 덕수궁 돌담길에 가지가지 노오란 낙엽들이 뒹굴고 있더군요. 단풍으로 물든 산에는 눈길 한 번 주지도 못하고 이 가을이 다 갑니다. 누구에게는 여유롭게 걷을 수 있는 길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배부른 풍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겨울까지 이어질 대한문 농성이 쫓겨나고 내몰린 사람들이 하나 되어 국가의 폭력, 자본의 폭력에 맞서는 아름다운 연대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하나 가져 봅니다.

휴간의 변
이제 《사람》은 59호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5년 7월호에 월간지로 시작했다가 32호까지 낸 다음에 휴간을 했다가 다시 33호(2008년 7·8월호)부터는 격월간지로 바꾸어 발행해왔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민간 인권 전문지를 자처한 《사람》이지만 그 존재감은 참 미미했습니다. 매번 내는 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꽤 좋은 글들이 읽히지 않고 사장되는 것도 속이 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권담론지로는 뭔가 부족하고, 필진도 빈약하고, 내용도 어렵고 딱딱한 그런 글들이 대부분인 《사람》은 독자들에게 외면 받아오지 않았을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 유일한 인권 전문지의 위상을 갖는 《사람》이 그 위상에 맞게 재탄생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인권재단 사람에서는 숙원사업인 인권센터를 세우게 되고, 그러면서 재단의 사업방향에 대한 고민을 하는 중에 이 잡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쉽게, 보다 눈에 들어오게, 보다 풍부하게, 보다 알차게, 읽히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이 《사람》 잡지의 발행을 6개월간 쉬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직 뚜렷한 방향은 잡지 못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는 인권잡지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를 해서 2013년 7월부터 다시 발행할까 생각합니다. 이미 구독료를 내신 분들은 환불 또는 그에 준하는 조치를 취해드리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값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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