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돌아가서 훌륭한 창작자들을 길러내지 않으면 … 외국 작품을 계속 수입해 무대에 올릴 수밖에 없다.(238쪽)” 여기서부터 논의를 풀어가겠다. 교육은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문화다. 오천년 문화 민족의 전통은 교육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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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가 중요함은 이미 검증되었다. “대기만성”에서 교육과정을 전체적으로 볼 줄 알았던 선조의 통찰력이 묻어 있다. 아프리카 속담인 “한 아이를 교육하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통찰력을 이미 일상적인 삶에서 실천에 옮겼다. 오줌싸개 자식을 키를 씌워 동네를 돌면 소금을 얻어오게 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교학이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어 서로를 잘 되게 한다. 이러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제식민지 교육과 서구 실증주의 교육학의 영향으로 교 따로 학 따로, 교수법 따로 학습법 따로, 이 둘을 별개로 보도록 암묵적으로 강요받아 왔다. 이제 이를 넘어서야 한다. 게다가 교학상장을 좀 더 들여다보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교육 난제를 풀어낼 조상의 지혜를 만나게 된다.
교육활동에 체계가 잡히면서 교는 교수(敎授)로 학은 학습(學習)으로 구분 정립되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교수-학습으로 통일되었다. 제안하고자 한다.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는, 혁신교육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은 교수-학습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적어도 습(習)이 무엇인지, 게다가 수(授)가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또 다른 토론자(327쪽)에 따르면 학습에서 학(學)과 습(習)은 다음과 같이 구분 정립된다. 학(學)은 정보, 지식, 원리를 대상으로 하고, 교사라는 매개자가 있고, 학습자가 수동적으로 참여하고,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지고, 누적되고, 비교적 단시간에 앎에 도달한다.
이에 반하여 습(習)은 사고, 지혜, 느낌을 대상으로 하고, 매개자 없이 자기 자신이 해야 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비약적으로 변하고,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앎에 도달한다. 결국 학습자 중심 교육이란 학습자가 습(習)에 이루게 하는 교육이다. 습(習)에 비추어 교사가 수(授)해야 할 것이 도출된다. 괄목상대(刮目相對)는 습의 놀라운 변화를, 청출어람(靑出於藍)은 수에 대한 철저함을,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는 수의 본질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교육 장면과 관련된 지혜를 음미하다보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넘어 주고 익히는 것에 교육의 본질임을 알게 된다.
일제식민지로 인해 올바른 근대 공교육을 경험하지 못해, 조상의 지혜를, 우리 교육문화전통을 직접 오늘의 교실에 적용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단절을 넘어서는 좋은 방법이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주의 입장에서, 교수-학습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학자, 비고츠키(특히 『생각과 말』 6장)를 만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문화적, 심리적, 우리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