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추적하는 멋진 실명제

올 7월부터 도입되는 인터넷 실명제의 공식 명칭은 실명제가 아니다. 정보통신부는 ‘제한적 본인 확인제’라고 부른다. 무엇이 제한적이란 말인가? 정보통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인터넷’이 아니라 하루 평균 30만 명 이상의 포털 사이트와 20만 명 이상의 인터넷 언론이라는 ‘일부 인터넷’에만 적용된단다. 내내 실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본인확인을 한 후에는 아이디나 닉네임으로 글을 쓸 수 있단다. 그래서, 이것은 실명제가 아닌가?


정보통신부, 말장난한다


그러나 인터넷사이트 조사업체 ‘코리안 클릭’에 따르면 한 개의 포털사이트에 불과한 ‘네이버’의 지난 3월 방문자 도달률은 93.6%에 달했다. 네티즌 10명 가운데 9명 이상이 네이버를 찾았다는 얘기다. 네이트와 다음의 방문자 도달률도 80%에 육박한다. 포털에서 실명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은 대한민국 인터넷 대부분에서 실명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물론 네이버는 오래전부터 실명을 사용해 왔다. 네이버 아이디를 개설하려면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실명을 확인받아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악플로 인한 명예훼손을 방지한다’는 실명제 도입의 명분은 그야말로 궁색하다. 악플이 익명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보통신부는 지난 2003년부터 부진부진 우겨가며 실명제를 도입했다. 인터넷 실명제가 “모든 국민을 허위정보·비방 유포자로 전제하는 명백한 사전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인터넷 상의 표현의 자유와 여론형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행위”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반대와,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의 항의를 무릅쓰고 말이다.


인터넷 실명제 반대 운동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사실, 실명제 도입의 핵심은 ‘악플 방지’에 있지 않다. 실명제의 진정한 핵심은 국가 권력으로 하여금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정부가 원할 때 당신을 손쉽게 추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인터넷 실명제이며, 무엇보다 정부는 당신이 그 사실을 의식하길 바란다.


이메일을 쓸 때, 채팅을 할 때, 카페에 글을 올릴 때, 지식인에 답변할 때, ‘민증부터 까도록’ 하는 것. 즉, 실명제는 인터넷 이용자가 인터넷에서 표현 행위를 하기 전에, 정부의 시선부터 느끼게 한다. 아이디나 닉네임을 쓰는 것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인권 전문가들은 바로 이 점에서 인터넷 실명제를 비판한다. 실명제가 일반 국민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chilling effect) 그리고 우리 헌법재판소는 ‘위축’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말한 바 있다.


헌법상 보호받는 표현에 대한 위축적 효과...[는] 다양한 의견, 견해, 사상의 표출을 가능케 하여 이러한 표현들이 상호 검증을 거치도록 한다는 표현의 자유의 본래의 기능을 상실케 한다. (헌재 2002. 6. 27. 99헌마480,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 등 위헌확인)

심리적 위축만이 문제가 아니다. 올 7월부터 실시되는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정보통신부 산하에 정보통신윤리위원회라는 조직이 있다. 이용자 사이에 명예훼손 분쟁이 일 경우 올 7월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신설되는 ‘명예훼손분쟁조정부’라는 곳에서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가해자의 신원을 파악해 피해자에게 알려주는 방식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의 신상 정보를 알면 민형사상의 조치가 가능하다. 인터넷 실명제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이용자의 신상 정보를 손쉽게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강화되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


그런데 가만, 명예훼손분쟁조정부가 없어서 지금까지 명예훼손을 규제할 수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사이버경찰청에 신고하거나 사법적 절차를 통하면 해당 글을 삭제하고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이나 형사처벌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몸집을 불려주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정부가 정보통신윤리위원회라는 조직을 통해 인터넷의 내용을 규제하는 데 매우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1995년 ‘불온통신을 단속’하기 위해 발족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지난 2002년 ‘불온’이라는 기준으로 인터넷을 단속하도록 한 당시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위에 인용한 글귀는 바로 그 결정문에서 나온 것이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법적 근거는 이때 사라졌다고 보아야 옳다.


놀랍게도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그 구차하고 질긴 목숨을 지금까지 이어 왔다. ‘불온통신’ 이후에 ‘불법통신’을 규제하겠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자살사이트, 음란사이트, 사이버성폭력 등 인터넷으로 인한 문제가 불거질 때 마다 무조건 제일이라고 설레발을 쳐 왔다. 그리고 마침내 ‘악플’을 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명예훼손만 규제하는 것은 아니다. 음란성, 비방성, 청소년유해물, 사행성, 국가기밀, 국가보안법, 범죄 교사 등 인터넷의 ‘불법정보’를 모두 책임지겠단다. 만능을 자처하신다. 게다가,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보기에 불법, 특히 국가보안법 위반인데도 불구하고 홈페이지나 게시판 운영자가 삭제 요구에 불응하면, 정보통신부 장관이 친히 명령을 내려주겠단다. 장관의 명령은 말 안 듣는 운영자가 아니라 상위 사업자에게 떨어질 테니, 결국 홈페이지를 통째로 폐쇄하겠다는 말이다. 실제로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몇 년 전 김인규 교사 홈페이지나 군대반대 사이트를 통째로 폐쇄해 물의를 빚었던 전력이 있다.


법원이 비록 보수적일지라도, 어떤 것이 죄이고 어떤 것이 죄가 아닌지에 관한 것은 법률에 따라 엄격하고 공정하게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법 정의이다. 특히 문민정부 이후로 신문이나 방송, 영화 등 대부분의 표현물을 정부가 규제하고 있지 않다. 오로지 법률에 의해서 당사자가 자기 표현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인터넷에서만은 ‘윤리’를 앞세운 정부 기구가 나서 명예훼손입네, 국가보안법입네 하고 갖은 죄목을 자의적으로 갖다 붙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수많은 인터넷 표현물에 대해 엄격하고 공정하게 심사하고 있는지도 궁금하지만 그럴 만한 법적 권위와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이 모호한 조직에 대한민국 네티즌의 표현의 자유가 달렸다.


이제는 IP추적도 편리하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 실명제는 이미 지난 2004년부터 선거 시기에 도입되었다. 올해 말 대통령 선거는 물론이고 모든 선거 시기에 실명을 확인받아야만 인터넷 언론에 글을 쓸 수 있다. 거기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통신비밀보호법은 국가적 차원에서 모든 인터넷 사업자가 모든 인터넷 이용자의 인터넷이용기록을 1년 이상 보관하도록 했다. 수사기관이 요구만 하면 언제든지 넘겨줄 수 있도록 말이다.

각각의 정책에는 그럴듯한 구실이 있다. 선거 실명제는 공정한 선거를 위하여, 인터넷 이용기록 보관은 범죄 수사를 위하여 도입되었거나 도입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정책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한 가지 뚜렷한 경향이 보인다. 바로 정부가 인터넷 이용자에 대한 추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전방위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인터넷 이용자의 표현 행위가 위축되는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종류의 실명제가 당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당신이 쓰는 글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번뜩이고, 당신이 어떤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시시콜콜히 보관되는 것을 알면서, 어떤 강심장이 제멋대로 키보드를 누빌 수 있겠는가.


올더스 헉슬리의 1931년작 [멋진 신세계]


인터넷이 너무 자유롭다고 생각했는가? 너무 자유로워서 악플이 판을 친다고 생각했는가? 그래서 악플을 규제하고 악플러를 추적하기 위한 정부 정책을 지지했는가? 더욱 멋진 인터넷을 위하여? 그러나 이 정책들은 악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 모든 정책에도 불구하고 악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범죄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악플과 범죄는 감시 기술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 공간에서 우리는 우범 지대를 오간다 하여 민증을 지참하고 제시할 것을 강요받지 않는다. 전화를 사용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를 대라고 요구받지 않는다. 익명권을 포함한 표현의 자유와 통신의 비밀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어떤 행위를 하기도 전에 국가로부터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되고 신원을 밝힐 것을 강요받음으로써 존엄성을 훼손당해서도 안 된다.


멋진 신세계라는 우울한 미래


그러나 우리는 둔감하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CCTV에 둔감해 졌듯이, 실명을 밝혀야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고,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현실에 익숙해지고 있다. 감시와 처벌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결국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우울한 두 소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년]이 가진 공통점은, 국가적인 통제 기술의 최절정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1984년]에는 빅브라더가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이, [멋진 신세계]에서는 투약과 유전적 조작이 등장한다. 두 기술 모두 지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된다.


[멋진 신세계]가 [1984년]과 다른 점은, 공포가 아닌 자발적 복종으로 통치되는 사회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교묘한 기술적 조작으로 자신의 사상이나 자신의 취향, 그 어느 것 하나도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1958년 헉슬리는 자신의 소설을 되돌아보며 “1931년에 했던 예언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실현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거운 심정으로 그가 했던 말들을 곱씹는다. 지금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미 구축된 인터넷의 ‘기술적’ 질서 하에서의 자유다. 이 ‘기술적’ 질서야말로 신세계적인 통제 질서이다. 완벽하게 통제되는 인터넷이 오고 있다. ‘멋진 신세계’가.

출처: 웹진ActOn
덧붙이는 말

바리 :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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