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미디어 법/운동의 재구성을 위하여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09년 8월 특집기사 ③

 

미디어 법/운동의 재구성을 위하여

 


홍성일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96년도 각 대학은 학부제의 열풍에 휩싸였다. 과별로 학생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학부로 통합하여 학생을 선별하여 일정 기간이 지난 후 학생들에게 전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필자가 다닌 대학에서는 신문방송학과·사회학과·정치외교학과가 사회과학부로 묶였다. 96학번이 3학년이 되던 해에 전공을 선택하였는데 당시 신문방송학과의 인기는 대단했다. 사회과학부 150명 중 대다수가 신문방송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반면 정치외교학과와 사회학과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정치외교학과로는 20명 남짓, 사회학과로는 열 명 남짓이 지원했을 뿐이었다. 매년 신문방송학과로의 쏠림, 정치외교학과의 그나마 체면치레, 사회학과의 몰락은 반복되었다.

 

  되돌아보면 신문방송학과로의 쏠림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맞물린 것이었다. 87년 이후 정치 담론은 문화 담론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었고 9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문화 담론이 정치 담론을 압도했다. 정치외교학, 사회학에 대한 외면과 신문방송학의 인기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더불어 한국 사회 구성체의 성격 변화도 지적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계급으로부터 시민으로의 중심 이동이 있었다. 진보진영에서 노동자단체와 민중단체가 갖던 헤게모니는 시민단체의 도전에 직면했다. 노동자, 농민의 ‘낡은’ 정치는 시민의 ‘세련된’ 문화로 바뀌었다. 노동자와 농민·빈민층의 직접적 정치보다는 시민과 문화의 매개가 선호되었다.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필자가 속해 있는 문화연대 또한 이러한 시대 분위기와 함께 한다.

 

  이상의 지난 10여년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한다면 왜 현 정권이 미디어악법에 명운을 걸고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쌍용자동차 사태와 용산 참사에 대해 왜 정부가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지 또한 알 수 있다. 짐작컨대, 현 정권은 쌍용 자동차와 용산 참사를 그리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쌍용 자동차 사태는 ‘낡은’ 노동자 운동으로, 용산 참사 또한 ‘낡은’ 민중 운동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문화의 매개 혹은 신문과 방송을 통한 확대 재생산이 되지 않는 한, 쌍용자동차 사태와 용산참사는 시민사회로부터 고립 가능하다라는 판단이 섰겠다. 그리하여 미디어에 정권의 명운이 걸리게 되었다. 미디어를 장악하는 이가 시민사회를 장악하고, 더 나아가 영구적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보수 신문에게 상식적/진보적 공영 방송을 넘기려는 미디어법의 탄생 배경이다.

 

  혹자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새로운 미디어 법의 필요성을 강변한다.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다. 문화의 시대에 새로운 미디어 관련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포괄적인 문제틀을 제공하지 못한다. 사실 미디어는 세 가지 수준의 복합물이다. 직접성(immediate), 매개성(mediate), 재매개성(remediate)이 그것인데, 직접성이란 미디어를 통해 즉각적으로 생산되는 콘텐츠를, 매개성(mediate)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이 미디어에 반영된다는 의미를, 재매개성은 미디어에 담긴 콘텐츠를 재조직화하여 특정한 정치성을 담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미디어를 이해한다면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 강화 논의는 직접성에 한정되는 논리임을 알 수 있다. 계급의 후퇴, 민중 진영의 축소와 함께 직접 운동이 쇠퇴하는 시점에서, 그리하여 미디어를 통한 매개와 재매개가 일반화된 시점에서 유달리 미디어에 직접성의 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사태를 일면적으로 파악하게끔 한다. 미디어를 절름발이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미디어는 모든 사회적 이슈가 집중되고 확대 증폭되는 공간이다. 미디어 위에 진보/보수, 상식/비상식의 전선이 구축된 것은 필연적이다. mb 정부의 독선과 오만은 이러한 경향성을 가속화시켰다는 데에 문제가 있지 새로운 경향성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mb 정권에 대한 비난에 앞서 미디어의 재매개성에 얼마만큼 진보와 상식의 콘텐츠를 담길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직접성 역시도 산업적 콘텐츠뿐만 아니라 다양한 독립 제작자의 콘텐츠가 생존 가능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미디어 악법은 부적절하다. 지금의 미디어 악법은 흡사 10여 년 전 학부제 개편의 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학부제로 개편하며 신문방송학은 큰 인기를 얻었지만 정작 신문방송학은 지난 10여 년 동안 정치외교학과 사회학의 수요를 빼앗을지언정 미디어 산업담론 이외에는 제대로 된 담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미디어를 통해 학제간 대화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던 셈이다. 미디어 악법 이후의 미디어 또한 유사한 상황에 놓여있다. 매끈하게 미디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할지언정 사회적 이슈의 재매개성을 진보적으로, 상식적으로 구성하는데 있어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디어의 직접성/매개성/재매개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디어 홀로가 아니라 다양한 연대, 문화의 연대를 통해 미디어를 재조직화해야 한다. 단적으로 의 최근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용산 참사와 쌍용 자동차 사태에 카메라를 들이대 약자의 목소리를 매개/재매개한 그들의 노력은 우리 사회의 진보와 상식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계급과 민중 진영을 매개하여 그들을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담론으로 부상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칼라 TV>나 수많은 독립 미디어 활동가 역시도 현장에서 함께하며 이들을 재현/대표하고 있다. 미디어 개편 논의는 이러한 미디어 운동의 성과까지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미디어에 주목하고 미디어에 개입하며 미디어를 재구성하는 행위는 오늘날 진보와 상식을 위한, 우리 사회의 계급, 민중, 시민을 연결하기 위한 시대적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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