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광화문 광장에서는 그저 ‘구경만’ 하세요.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09년 8월2호 특집기사 ①

 

광화문 광장에서는 그저 ‘구경만’ 하세요.

 

 

나영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팀장 curiousnyny@gmail.com)

 

 

  8월 1일, 광화문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 뒤에서 수 미터 높이로 솟아오르는 분수와 수십만 송이의 꽃으로 장식된 ‘플라워 카펫’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서울시는 화려한 개막 쇼를 준비했다. 하지만 애써 치장한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광장에 서 있노라면 뭔가 어색하고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거대한 도로의 한복판에서 양쪽으로 쌩쌩 달리는 차들은 마치 중앙선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그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꽃밭은 왠지 인공으로 조성된 남의 집 앞마당 같다. 벤치도, 나무도 없다. 그래도 연일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찾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세종로는 횡단보도도 하나 없는 ‘차들의 공간’이자 걸어서는 닿기 힘든 ‘권력의 공간’이었기에 광화문 광장이 가지는 사회적, 역사적 의미와 감동이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부와 서울시는 여전히 광화문 광장에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

 

광화문 광장의 디자인 철학은 오로지 ‘시위 방지’

 

  광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공디자인 공간이다. 광장과 같은 공적 공간을 조성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주변 시설과의 조화와 연계성, 그리고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interactive)이다.


  일례로 호주 멜번의 연방광장(Federation Square)은 바로 앞의 플린더스 역과 연계되어 있고 주요 트램의 환승센터 및 중심 도로와도 바로 맞닿아 있다. 여행자들은 이곳에 있는 여행안내센터에서 주요 여행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고 시민들은 커피나 간단한 점심을 해결하며 쉬어가기도 한다. 또한 이곳은 집회나 시위, 각종 캠페인이 수시로 열리는 곳이기도 하고 온갖 축제와 콘서트가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월드컵 등의 주요 스포츠 행사가 있을 때는 야라 강변을 마주한 대형 스크린을 보며 모두 함께 경기를 즐기기도 한다. 멜번의 연방광장은 여행자와 거주자, 시민과 시민, 예술인과 시민이 만나는 공간이자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와 소통이 발생하는 공간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공간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이유는 그곳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자유롭게 공간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곳의 사용을 ‘허가’하거나 ‘불허’하지 않는다. 그곳은 ‘모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반면 서울광장은 어떠한가. 행사를 주최하려는 시민은 시의 ‘사용허가’를 받아야 하며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간임에도 별도의 사용료까지 내야 한다. 시민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반면, 시는 공간을 전유하고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다. 2004년 5월부터 2009년 5월까지 서울광장에서 개최된 660건의 행사 중 66.3%가 사용료를 내지 않은 행사였는데 이중 53%가 서울시 주관 행사였고 나머지는 타 행정기관이거나 서울시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단체가 주관한 행사였다. 시민들은 그저 주어진 행사의 구경꾼일 뿐이었던 것이다.

 

  새로 열린 광화문 광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울시는 광장 조성 당시부터 ‘시위 없는 공간’을 조성하겠다고 강조해왔다. 광장 디자인의 주요 기준이 ‘시위 없는 공간’ 정도의 수준이니 ‘상호작용’과 같은 것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광화문 광장 조례에 의하면 시민들은 ‘서울광장’과 마찬가지로 사용료를 내야하고 시의 ‘사용허가’를 받아야 한다. 심지어 조례 6조와 8조, 9조에 의하면 사용신청이 중복되었을 경우에는 관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우선순위가 주어지고, 서울시는 이미 허가된 행사마저 취소하거나 중단시킬 수 있다. 이름만 ‘광장’이지 서울시의 앞마당인 셈이다.

 

광장의 주인은 시민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행복을 의심하지만 않으면 전혀 불행할 일이 없는’ ‘멋진’ 신세계가 묘사된다. 그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결정되지만 신생아로 인큐베이팅 될 때부터 끊임없이 반복되는 ‘조건반사 훈련’과 ‘수면훈련’을 통해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게 된다. 주어진 계급에 따라 평생 고된 일을 반복해야 하더라도 아무도 자신의 행복을 의심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이상해지면 ‘행복해지는 약’을 먹으면 된다. 이 완벽한 세상에서 고독을 아는 사람, 예술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사람, 혼자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다.

 

  이명박 정부가 원하는 세상은 바로 이런 ‘멋진 신세계’가 아닐까? 1%의 권력자들과 지배계급을 제외한 99%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세상.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지배자를 제외한 구성원들 간의 ‘창조’, ‘참여’, ‘만남’, ‘소통’ 같은 것들이 금지된다. 구성원들은 그저 ‘해주는 것’의 ‘관객’, ‘구경꾼’이 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지난 8월 3일과 4일, 문화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와 야4당은 광화문 광장 조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광화문 광장을 진정한 시민의 공간으로 운영할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그러나 8월 3일 기자회견의 참석자들은 결국 경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 여전히 광화문 광장에서는 ‘구경’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혼자서 피켓만 들고 다녀도 제지를 당한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요구가 마치 ‘집회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인 듯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집회냐 아니냐’가 아니라 ‘광장의 운영권은 서울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광장’을 시민들이 사용하는 데에는 ‘사용료’도 ‘허가’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광화문 광장의 주인은 서울시가 아니라 시민이다. 2002년 월드컵 응원전과 수차례의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광화문을 ‘우리의 광장’으로 만들어 내었듯이 ‘광화문 광장’은 시민들이 창조하는 생동감 넘치는 문화와 소통이 존재하는 온전한 ‘시민의 광장’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멋진 신세계’가 아닌 우리의 ‘멋진 신세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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