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문화연대 10년, 그들의 장수 비결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09년 9월1호 특집기사 ③

 

문화연대 10년, 그들의 장수 비결

 

 

(기사출처 : 한겨레 21 제 779호, 신윤동욱 기자)

 

대마·문신·스포츠 민족주의… 문화가 2등 주제였던 때부터 엄숙주의에 물든 한국 사회에 ‘금기를 금지하라’ 외치다

 

문화연대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졌다. 최근에 문화연대가 함께한 행사만 보아도 그렇다. 문화연대는 8월29일 기타를 만드는 콜트·콜택 해고 노동자와 함께하는 모던록 페스티벌을 인천에서 열었다. 이렇게 노동자와 연대하나 싶으면 아이돌 스타와 관련된 토론회도 열었다. 8월14일, 서울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서 주최한 ‘동방신기 사태를 통해 본 연예 매니지먼트 시스템의 문제와 대안 모색 토론회’가 그것이다. 이렇게 대중문화에 집중하나 싶으면 9월엔 광화문 광장 문제를 제기하고, 종묘 앞의 고층건물 조성계획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조직한다.
 
인디문화에서 대중음악까지
 
20세기 사회운동 안에서 문화는 2등 주제였다. 사회가 힘들고 정치가 어지러운데 문화까지 돌아볼 여력이 없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문화의 시대가 열렸다. 그래서 집회의 문선대, 예술가 단체가 아니라 일상의 문화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문화연대가 탄생했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지나온 문화의 시대 10년은 문화연대라는 프리즘을 통해, 문화연대가 ‘연대’한 사람을 통해 보인다. 노동자에서 ‘빠순이’까지, 서울에서 섬마을까지, 문화연대가 연대해온 이들의 스펙트럼은 넓다. 이렇게 종횡무진 한국 사회를 횡단해온 문화연대가 9월18일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이렇게 다양한 집단과 연대해온 덕분에 ‘~사이에’ ‘~에서 ~까지’라는 통섭과 융합의 문장은 문화연대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구조다.


사회운동과 인디문화 사이에 문화연대가 있었다. 오랫동안 대마는 ‘약쟁이’만의 문제였다. 그러나 문화연대가 김부선, 신해철, 전인권 등과 함께 2005년 대마 비범죄화 기자회견에 나섰다. 이것은 진보 진영마저 엄숙주의에 눌려 있던 한국 사회에 던지는 불타는 화두였다. 문화연대의 불온한 상상력은 국가의 규제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시했다. 비록 법이 바뀌진 않았지만, 흔들림 없던 한국 사회의 금기 하나가 마침내 도전을 받았다. 대마에 이어서 문신이 문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하는 문신이 불법이란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세계적인 타투이스트 김건원씨가 불법 문신 시술로 실형을 받자 문화연대 등이 문신 합법화 운동에 나섰다. 여전히 문신도 불법이지만 진전은 있었다. 2009년 3월 한국타투인협회가 창립했고, 타투 합법화를 위한 개정법안이 마련됐다. 나영 문화연대 활동가는 “홍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디문화의 흐름이 배경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운동들”이라고 말했다. 물론 사회운동 안에선 여전히 “다른 중요한 일도 많은데…”라고 에둘러 낯섦을 표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신체의 자유는 이제 진보의 상식이 되었다. 문화연대는 그렇게 인디문화의 발랄한 정신을 사회운동에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해고 노동자에서 아이돌 스타의 팬까지, 문화연대가 ‘연대’한 이들은 색다르다. 먼저 2000년대 초반을 달군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운동이 있었다. 문화연대는 음악평론가 등과 함께 아이돌 스타 위주의 공중파 가요순위 프로그램이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죽인다는 비판에 나섰다. 여기서 뜻밖의 사람들과 만났다. 서태지, 이승환, god 등 팬클럽 회원들이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의 취지에 공감해 운동에 함께했다. 당시 이 운동을 벌였던 이동연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공동소장은 “팬덤이 한국 대중문화에 등장한 최초의 사례”라고 말했다. 비록 2000년대 후반에 슬며시 부활되긴 했지만, 당시엔 가요순위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성과도 얻었다. 이어서 문화연대는 연예기획사와 오락 프로그램 프로듀서 사이의 홍보비(PR) 거래도 팬덤과 함께 지적했다. 이동연 소장은 “<연예가중계> 같은 오락 프로그램에 등장한 드문 운동단체가 문화연대”라며 웃었다. 이제 동방신기 팬들도 소속사와 갈등이 터지면, 스타들의 인권을 앞세울 정도로 당시의 영향은 현재형이다. 죽이는 방식을 넘어서 살리는 운동이 나왔다. 2003년 라이브 활성화를 위해 공연을 열었고, 2004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만들었다.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은 음악적 평가를 중심에 두는 것으로 권위를 쌓아왔다. 이제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은 문화연대 행사가 아니다. 문화연대에서 독립한 이들이 주최하는 행사로 치러진다. 그렇게 문화연대는 성과를 조직의 이름으로 독점하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뛰고 아줌마는 수다 떠는 마을축제를 벌이며

 
그렇다고 화려한 조명만 좇지는 않았다. 문화연대는 2008년 기타를 만드는 콜트·콜택 노동자와 연대하기 시작했다. 기타를 생산하던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흑자를 내던 회사가 갑자기 공장을 인도네시아 등으로 이전하면서 해고를 당했다. 1년이 넘게 외롭게 싸우던 기타 노동자의 손을 문화연대가 잡았다. 문화연대는 2008년 9월 뮤지션들과 함께 콜트·콜택의 사연을 알리는 콘서트를 열었다. 노동조합과 대중음악인을 잇는 사건이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콜트·콜택을 위한 콘서트는 이어진다. 이러한 노력에 바탕해 지난 9월8일 인천지법에서 콜트악기 노동자에 대한 부당해고 판결이 나왔다.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은 “문화연대가 신자유주의에 희생당한 문화 노동자들과 직접 연대하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문화연대의 ‘달리는 놀이터’는 서울에서 섬마을까지 달렸다. 2004~2007년 5t 트럭에 장비를 싣고 문화연대 활동가들은 전국을 누볐다. 강원도 태백에서 영화 <여자, 정혜>를 상영했고, 경기도 평택 대추리에선 ‘평화축제-들이 운다’에 함께했다. 특히 여름이면 장비를 싣고서 섬마을 투어를 다녔다. 때로는 ‘소히’ ‘시와’ 같은 인디밴드가 동행해 노래도 불렀다. 그렇게 찾아다닌 문화 불모지가 방방곡곡 100곳에 이른다. 당시 전국을 다녔던 송수연 활동가는 “영화 상영을 넘어서 아이들은 뛰어놀고, 아주머니들은 못다 한 얘기를 주고받는 마을축제가 되었다”고 돌이켰다. 이렇게 문화연대가 추구해온 문화 향유권 확장은 현실이 되었다. 송 활동가는 “지역 문화축제가 생기고 자리를 잡는 데 우리도 조금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연대는 창립 때부터 지역 문화축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제안을 해왔다. 이렇게 달리는 놀이터, 등을 통해 쌓아온 대중음악인과의 인연은 올해 열린 용산 참사 희생자를 위한 콘서트에 블랙홀, 이승환, 이상은 같은 가수들이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연대는 문화 게릴라로 나섰다. 2004년 예술과들과 함께 공사가 중단된 서울 목동 예술인회관을 점거했다. 비어 있는 건물을 점거해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활용하는 ‘스쾃’(Squat)이 한국 사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문화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운동도 꾸준히 벌였다. 미술교사들과 함께 대안미술 교과서를 만든 일처럼 문화예술 교육을 개혁하는 활동도 문화연대의 한 축이었다. 이런 활동은 일부 민주정권 10년을 거치며 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문화연대는 다른 단체와 함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캠페인을 벌였고, 전국에 기적의 도서관을 세우는 일에 함께했다. 문화방송 교양오락 프로그램 <느낌표>와 더불어 진행한 캠페인처럼 대중과 함께하는 사업도 있었고, 스쾃처럼 실정법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문화운동도 벌였다.
 
월드컵 응원과 외규장각 환수운동
 
문화연대의 오지랖은 스포츠 분야까지 뻗쳤다. 때로 국민 감정에 이의를 제기해 ‘돌’을 맞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2002년, 2006년 월드컵 당시 국민 다수가 열광한 월드컵 분위기에 이의를 제기했다. 방송의 월드컵 중계 싹쓸이 편성을 규탄했고, 집단주의 응원문화를 비판했다. 나아가 문화연대는 대한축구협회 개혁을 촉구하는 활동도 체육인과 함께 벌였다. 독선적인 축구 행정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쇼트트랙 대표팀의 파벌 문제, 학원 스포츠의 구타 문제까지 문화연대 체육문화위원회는 사회운동의 불모지였던 스포츠 분야에 강력한 감시자, 비판자가 되었다.


이런 문화연대가 얼핏 민족주의 분위기가 강해 보이는 외규장각 환수운동도 벌였다. 문화연대는 2003년 덕수궁 터 미대사관 설립 반대를 시작으로 청계천 난개발 반대, 한반도 운하 반대 같은 운동을 꾸준히 벌였다. 이런 운동을 주도해온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국수주의 관점에서 문화유산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개발정책에 반대하는 관점에서 문화유산 보존운동을 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환수운동처럼 국가가 지키지 못한 유산을 시민의 힘으로 찾아오는 의미도 있다”고 덧붙였다. 동대문운동장 철거 반대운동처럼 문화재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근대문화 유산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도 문화연대 활동의 성과였다.


금기를 금지한다. 문화연대가 오래전 개최한 토론회 주제였다. 문화연대는 청소년을 보호 대상으로 보는 청소년보호법,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는 국가보안법 반대에도 앞장섰다. 2000년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부터 2009년 인권영화제 사전 심의 문제까지, 문화연대는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영비법(영화 및 비디오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대한 반대운동도 벌였다. 선거 나이를 18살로 낮추는 운동에 함께 한 것에서 보듯이 문화연대는 청소년이 사회의 주체로 서는 일을 지원했다. 올해 6월부터 청소년이 직접 만드는 인터넷 방송 ‘모난 라디오’를 만든 것도 그런 취지다. 모난 라디오를 함께하는 정소연 문화연대 활동가는 “여성 없는 여성운동을 상상할 수 없듯이, 청소년 없는 청소년 운동도 없다”고 말했다. 정 활동가는 경찰에서 범죄심리사로 일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2006년 문화연대가 벌인 월드컵 캠페인 ‘집 나간 이성을 찾습니다’를 통해 문화연대의 존재를 처음 알았고, 헤이리 록페스티벌에 참여하며 문화연대의 힘을 느꼈다. 소년범들을 담당했지만, 공권력의 청소년 보호 논리를 도저히 수긍하기 어려웠던 그는 문화연대 활동가로 변신해 청소년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이전에 운동 경험이 없는 활동가들이 문화연대엔 적잖다. 이들의 상상력은 오히려 새로운 운동을 벌이는 힘이 되었다. 대마·문신 같은 운동이 그렇게 나왔다. 


스스로에게 문신을 새기다
 
문화연대는 시민운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왔다. 좌파의 좌파로 불리는 운동부터 정부와 협력도 마다하지 않는 유연한 시민운동까지, 문화연대를 불편해하지 않는다. 문화연대가 10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문화연대는 2005년 시민사회단체 ‘관계성’ 조사에서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이원재 사무처장은 “문화가 삶의 곳곳에 스며 있어 노동부터 생태까지 여러 단체와 접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7년 마포로 사무실을 옮긴 문화연대는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민중의 집’을 통해 지역에서 미래를 꿈꾼다. 진보신당 마포위원회 등과 더불어 민중의 집을 통해 동네에서 미래를 찾는 일상의 문화정치를 일구고 있다. 그렇게 지속 가능한 문화운동의 꿈은 시작됐다. 참고로, 문화연대 활동가들은 대부분 몸에 하나씩 문신을 새기고 있다. 문신 합법화운동을 통해 그들 스스로 문신의 매력을 발견했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그렇게 세상을 바꿀 뿐 아니라 스스로 변하려 노력해온 것이 문화연대 10주년 기념전의 제목처럼 ‘장수의 비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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