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엣지’ 있게 살고 싶어? 그렇다면 ‘엣지’를 버려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09년 9월1호 밥보다문화

 

‘엣지’ 있게 살고 싶어? 그렇다면 ‘엣지’를 버려

 

 

최남도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소비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주변에서 엄청난 속도로 번져가다가 사라져간 수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말들 가운데도 새롭게 만들어 졌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사람의 계급과 학력 등의 사회적 자본을 가늠하게 하는 척도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좀 배웠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좀 더 일상적인 언어나 쉬운 말들로 표현하기를 고민하는 한 편으로 자신들만의 용어나 특정한 어휘를 사용하여 은연중에 자신의 지적 고귀함이나 독특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은연중의 드러남을 통해 상대방이 느끼게 되는 난망함이나 당황스러움 또한 그들이 노리는 효과이기도 하다.


최근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은 ‘엣지(edge, 에지)’다.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서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주요 일간지에서도 볼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사실 내 기억에 ‘엣지’라는 말은 탁구 경기에서 탁구공이 탁구대 모서리를 맞고 불규칙하게 미끄러져 나가 득점으로 인정되는 경우와 아일랜드의 록맨드 ‘유투(U2)’의 기타리스트 이름 정도로 남아있다. 즉, 나에게 ‘엣지’란 사전적 의미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엣지’라는 말을 모르면 그 사람은 영락없이 ‘엣지’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엣지’라는 말을 유행시킨 최고의 수훈은 역시 매스미디어에게 돌려야할 것 같다. 물론 스키나 스케이트 등, 날을 이용하는 스포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엣지’라는 말에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용되고 있는 의미의 ‘엣지’는 모휴대전화회사에서 만들고 모아이돌그룹이 광고한 ‘엣지폰’에서 스멀스멀 시작되더니 간접광고의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모방송사의 모드라마에서 모탤런트가 사용하면서 들불 번지듯 퍼져나갔다.


사실 ‘엣지’는 글이나 디자인 혹은 기술과 같은 창작물들이 무언가 새로운 느낌을 강하게 주거나, 기존의 것들을 넘어서지만 긍정적으로 수용이 가능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대로 마치 모서리나 극단에 있어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에 가장 가까워진 새로움, 독특함 등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찬사가 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저기서 ‘엣지’를 사용한다. 아니, 사실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지도 않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엣지’는 눈에 보이는, 외형에만 국한된 ‘엣지’일 뿐이다. 무리해서 명품으로 치장하고, 그도 안 되면 인터넷에서 ‘엣지’있다고 소문난 유행을 따라가는 ‘엣지’만 남았다.


국적불명, 의미불명의 언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사라지고 국민들의 국어 생활에 혼란이 가중된다는 비판을 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의 극단적인 창조성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엣지’가 아니라 특정 ‘엣지’를 좇아서 만들어내는 ‘엣지’는 더 이상 ‘엣지’일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남과 같이해서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엣지폰을 사용하고 모탤런트처럼 옷을 입는다고 해서 모아이돌그룹이나 모탤런트처럼 ‘엣지’있게 되지 않는 것은 그들과 같은 외모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엣지’의 근본정신인 창조성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덧붙여 드는 생각은 일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창조성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하게 만드는 이 자본주의야 말로 가장 나쁜 방향으로 ‘엣지’ 있는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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